우아한 방어 - 우리 몸을 지키는 면역의 놀라운 비밀
맷 릭텔 지음, 홍경탁 옮김 / 북라이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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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인가, 연령대에 따른 흥미를 조사하다가 삼십 대부터 관심이 급증하는 관심사 중 하나가 건강이라는 통계를 읽었다. 그때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하에 스스로를 혹사시키다가 그 변화가 급격히 나타나는 게 그때부터가 아닐까, 하는 아주 당연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건강을 우려해서는 아니지만 “우아한 방어”라는 제목에 끌려 이 책을 택하게 되었다.

  우선 제 1부 「조화로운 생명」에서는 건강했지만 시나브로 병에 물든 네 인물을 소개한다. 호지킨병에 걸린 제이슨, 에이즈에 걸린 밥,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앓게 된 린다, 그리고 루푸스를 앓는 메러디스이다. 제 2부 「면역계와 생명의 축제」는 본격적으로 면역계 연구의 역사를 설명한다. 각 인물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제3부에서 제5부는 각 인물과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으로 제6부 「귀향」에서는 네 인물의 치료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달함과 동시에 삶의 의미에 관한 환기로 책을 마무리한다.


  면역계의 역사 사전 같은 첫인상을 뽐내던 이 책은 실제로 접하고 나니 그보다 맷 릭텔의 면역 연구 일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알고 있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뒤섞으며 생생히 발자취를 좇는다. 동물 실험을 토대로 발전해 온 의학과 잘못된 신약이 도입되었을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이식 수술 등의 이야기가 주되고,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어 지루한 느낌을 덜어주기도 했다. 나는 이런 쪽에 문외한이라 면역체계가 바이러스의 교묘한 술수에 속아넘어가거나, 특히 나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순수한 충격을 자아내는 대목이었다. 와중에 바이러스를 몰아내기 위해 영차영차 일하는 세포들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때는 본 적은 없지만 <일하는 세포>라는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별안간 세계를 덮친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 렘데시비르 도입을 앞두고 약의 효력을 확인하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지 다시 한 번 통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감상이겠지만 새삼 동물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온 의학 발전의 역사가 부끄럽고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생물을 가차없이 짓밟고 희생시키며 얻은 삶을 우리는 조금 더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자기 파괴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면역계를 알고자 시작했던 독서가 책의 마지막 부분처럼 삶의 의미나 삶을 대하는 태도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얼마 전 읽은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가 휴이넘과 나누는 대화 중 ‘인간은 상성이 달라 서로 충돌하는 성분들을 함께 섭취하여 스스로를 망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맛있는 음식이나 편한 자세는 건강을 망친다. 물론 건강을 고려해 건강식을 찾아 먹고 바른 습관만을 가진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에 힘든 현실이니 몸이 보내는 신호를 최소한 무시하지 않고 한번 돌아봐주는 것만이 답이 아닌가 싶다. 나라는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힘써 주고 있는 세포들과 면역 체계를 위해서라도.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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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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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버지니아 울프의 회고록을 읽었다.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지난날의 스케치』를 읽은 지 꼭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이번에는 『등대로』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원체 페미니스트로 잘 알려져 있어 저번 책을 읽을 때에도 그 생각을 떨쳐 버리고자 크게 노력했었다. 이번에도 같은 생각으로 독서를 시작했다.

  『등대로』는 총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1부 「창」에서는 궂은 날씨 때문에 등대로의 여정이 무산된다. 이후 램지 가의 일상을 독신 여성 화가인 릴리 브리스코우가 주시한다. 2부 「시간이 흐르다」는 제목답게 시간의 흐름을 보여 준다. 미사여구가 점철된 아름다운 표현들로 덧없는 세월의 흐름을 표현하는 동시에, 램지 가의 변화를 내레이션처럼 대괄호 처리 했다. 이 장에서는 램지 가의 젊은 여식에게 집을 복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맥냅 부인과 바스트 부인이 복구 작업을 한다. 두 사람의 의식 속에서 램지 가의 삶이 잠시 되살아난다. 3부 「등대」에서는 복구된 집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돌아온다. 램지 가의 막내 제임스와 캠은 아버지 램지 씨와 매칼리스터, 그리고 그의 아들과 함께 등대로 여정을 떠난다. 릴리는 램지 부인을 회상하며 그림을 그린다.

  『등대로』는 이상적이고 단란한 가정의 일상을 구석구석 비추는 다정한 소설이 아니다. 램지 부부의 여덟 자녀는 뒤로 물러서고, 대신 어른들이 앞에 서며 아슬아슬하면서도 평온히 유지되는 일상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의 일상은 램지 부인이 제임스의 예민한 감수성이 다칠까 등대에 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심어 주면, 램지나 탠슬리는 ‘내일은 비가 올 것이니 등대에 가기는 글렀다’며 그 희망을 꺾어 버리기 바쁜 식이다. 이렇듯 서로 다른 성정을 지닌 이들이 모여 상충하기도,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감정을 숨기고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며 하루가 굴러간다. 기본적으로 램지 부인에게는 자녀를 보듬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천사 같은 역할이, 램지에게는 권위 있는 가장의 역할이 주어져 있어 그런 일이 가능했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완전하지 않고 저마다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주목하고 싶다.




진실로 그녀 자신의 만족감만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녀가 그렇게나 거의 본능적으로 돕고 베풀기를 원해서, 사람들이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오오 램지 부인! 사랑하는 램지 부인......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램지 부인이지!”라고 말하고, 그녀를 필요로 하고, 그녀를 부르러 사람을 보내고, 그녀를 찬미하는 것이?

pp.62~63




부인은 야채 껍질 이야기를 할 때 결혼을 찬양하고, 숭배하고, 그것을 보호하고 있지만 성사시킨 뒤에는 왠지 웃으면서 그녀의 희생양들을 제단으로 인도한다고 릴리는 느꼈다.

p.143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미워하거나 완전히 좋아하지 않는다. 일관적으로 찬양받고 한결같이 눈총을 받는 인물도 없다. 여성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을 폄하하고, 우쭐대기를 좋아하는 찰스 탠슬리마저 웃음은 매력적이다. 심지어는 가장 세세히 묘사되어 있고, 작품 속에서 “천사”로 나타나는 여성인 램지 부인조차도 완벽하지 않다. 그녀는 언제나 베풀고 사람들을 화합시켜 누구든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지만, 혹자는 그녀를 독선적이고 지배적이라고 평한다. 이를 단순 질투로 여기기에는 어렵다. 사실이 그녀가 늘상 상대를 배려하는 데에는 은밀히 찬미를 원하는 마음이 관여하며, 속마음으로는 찰스 탠슬리를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겨도 그의 비위를 맞추는 등의 처세도 타고난 그대로라기보다는 적절히 덜어내고 덧칠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슬로건처럼 제시하는 “모든 사람은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따라, 릴리의 손을 붙들고 ‘너는 아직 아이를 키우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건네거나 나서서 민터와 폴을 주선하는 행동의 기저에는 자신의 결혼을 후회 없는 선택으로 인식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부인의 부드러운 강압은 주변인에게 ‘이 선택이 올바르다’는 안도와 ‘해야만 할 것 같은’ 불가항력을 느끼게 하고, 자신과 같은 길을 걷다 못해 결국 “실패한 결혼”까지 하게 만든다. 램지는 그런 자신의 아내를 아름답다고 여기고 사랑하지만 그녀가 책을 읽을 때 “내용을 과연 이해하기나 하는지” 의심하고, 부인의 지나치게 이타적인 면모를 싫어한다. 릴리의 감정도 마찬가지로 이중적이다. 부인을 찬미하고 존경하는 동시에 결혼 제도나 가부장제에 대한 태도를 비판하고, 램지 가의 일상에서 환희를 느끼는 동시에 그 이면을 통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램지 가를 관망하며 끈덕지게 결혼 제도를 파헤친 덕에 부인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던 윌리엄 뱅크스와의 관계도, 램지와의 재혼 유혹도 뿌리친다. 부인의 죽음 뒤에 램지를 바라보며 릴리가 느끼는 애증을 비롯해, 이 소설에서 그려진 대부분의 인물들이 상대를 좋아하는 것인지 싫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주 감정을 번복하는 듯한 인상은 억측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으로 느껴지는 관계도 있다. 램지 부부는 각자 과거를 그리워하면서도 책임감으로 현재를 사는 이들처럼 보이는 한편, 변치 않는 두 사람의 사랑이 그 관계의 안정적인 기반으로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전쟁 이후 유망한 시인으로 주목받게 된 카마이클은 릴리에게 그저 카마이클일 뿐이다. 선망과 질투, 이중적 감정의 대상이었던 부인은 릴리에게 존재 자체만으로 여러 순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던 한 인간으로 남는다. 이렇듯 그들은 주변인을 다각도에서 바라보며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되, 그 감정을 딛고 올라서서 한 개인을 향한 순수한 애정을 품는다. 1부에서 타인이 자신의 그림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릴리는 마지막 장에 와서 그 그림을 완성한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덕분이다. “드디어 통찰력을 획득한” 그녀는 타인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삶과 행위를 지속하게 된다.

  더불어 제목은 “등대로”이지만 등대행은 마지막에서야 이루어지고,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제목의 의미를 고민해 보게 되었다. 등대는 1부에서부터 가야 할 곳, 언젠가는 향할 곳으로 정해져 있으나 마지막 챕터에서 결국 추려진 인원끼리 도착한 곳이다. 사실 등대행에 대부분이 큰 관심을 두지 않으나, 취미가 비슷하고 함께 있을 때 편한 제임스와 램지 부인만은 당도하고 싶다는 욕구를 내비친다. 특히 램지 부인이 불빛에 홀린 듯 바라보는 대목은 『위대한 개츠비』의 초록색 불빛이 연상될 정도였다. 주시할 만한 점은 부인이 넋을 놓고 불빛에 빠져 있다가도 남편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바라보는 일을 관두고 현실로 돌아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는 점이다.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등대는 “내일은 갈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를 품고 내일을 기다리게 하는 용기이기도, 그러나 가장 바랐던 부인은 끝내 닿을 수 없었던 먼 염원이기도, 멀리에서 봤을 때에는 멋져 보였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다소 초라한 꼴의 삶인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책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분명 어렵거나 복잡하지는 않다. 하지만 온정신을 쏟아 읽으며 그녀가 만들어내는 잔잔한 물결에 몸을 맡겨야 하기에 어느 정도 정돈된 상태가 아니면 온전히 흐름을 따라가기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대로』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특별할 것 없는 인간들로 차곡차곡 불편하고 애틋한 일상을 쌓는다. 십 년의 세월을 겨우 몇 장으로 요약해 전달하며 허무로 치닫는 삶을 그렸다가, 마지막에는 붕괴된 기억은 그대로 둔 채 살아 있는 이들로 망자를 추억하고 그들만의 새 삶을 꾸려냄으로써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한다. 남은 이들은 절망하거나 참담해하지 않고 각자 얼마큼의 영향을 받아 계속 산다. 이런 소설은 어떻게든 우리를 나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여전히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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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포스터 북 by 성립 아트 포스터 시리즈
성립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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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테에서 성립과 이미소의 작품으로 『더 포스터 북』을 출간했다. 성립의 인스타그램은 팔로우해 두었어서, 전에 그림과 짧은 편지가 동봉된 이메일 수신을 신청했던 기억이 있다. 이미소의 그림은 이번 아르테 더 포스터 북 시리즈로 처음 알게 되었다. 백지에 검은색만을 이용해 다소 무심해 보이는 드로잉이 주가 되는 성립의 그림과 달리, 이미소의 그림은 색채로 가득하다. 인쇄본이지만 질감이 그대로 나타나 화면으로 보기보다 생생했다. 『더 포스터 북』이 오월에 다룬 주제는 “소중한 관계”인데, 성립은 사람 간의 거리를 좁히고 넓히는 방식으로, 이미소는 우리가 잊고 있는 일상 속 관계를 조명하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마음 같아서는 벽에 죄다 걸어 두고 둘러보며 “내 공간에 여는 작은 전시회”라는 카피를 몸소 체험해 보고 싶었지만, 우선 가장 좋았던 그림 한 장씩만 걸어 보았다.







  성립의 그림은 디테일하게 모든 구성 요소를 맞추어 그리지 않아도 인물의 표정이 보이는 점을 특히 좋아한다. 서로 애틋한 표정을 한 채 마주보고 있는 <숨, 5cm>나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70cm>가 그 이유에는 더 부합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그림을 택할지 한참 고민했는데, 결국 두 인물이 같은 곳을 응시하며 별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별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50cm>로 정했다. 어쩐지 이 그림에는 내가 경험해 본 적 없는, 하지만 경험해 본 적 있는 것만 같은 시절에 대한 향수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등을 돌리면 세상에서 가장 먼 사이가 된다 했던가, 4,000km>였다. “처음에 성립 작가는 0~4,000km를 표현했다”는 설명 문구를 보고 궁금증이 생겼었는데, 각자의 길을 가는 두 사람을 표현해 참신하게 느껴지고 생각이 많아졌다.








  노을을 분홍색으로 표현한 <19시 40분>과 나란히 두고 고민했던 그림. 내가 붙일 곳은 침실이라 이 그림을 골랐다. 좋은 꿈을 꾸길 바라고 걸어 둔 드림캐처처럼 머리맡에 두고 싶었으나, 종이가 꽤 두텁다 보니 무게 때문에 내 얼굴 위나 침대 뒤로 떨어지지 않을까 해서 대신 눈을 떴을 때 바로 보이는 곳에 붙였다. 그림에 사용된 색채도 그림 자체도 아주 좋았던 <가려진 틈 사이에>. 캐리어를 던져 두고 잠을 청한다니,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렇기에 여행을 가지 못하고 그리워만 하는 현실에 더욱 자주 꺼내 두고 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기지개를 켜면서 이 그림을 본다면 일상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도록이나 드로잉집은 여러 번 봤지만 이번에 받아 본 포스터북과는 꽤 큰 차이가 있었다. 활용도가 높다는 게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더 포스터 북』에는 말 그대로 포스터 크기로 인쇄된 작품이 열 장 수록되어 있어, 책으로 보관해도 좋고 한 장씩 뜯어서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해도 좋다. 책장에 꽂아 두고 읽는 드로잉집이나 실제 작품을 구매하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이 되는 사람이라면 가능성을 열어 두고 즐거이 고려해 볼 만한 조건이다. 전시회는 날짜를 정해 두고 하기 때문에 원하는 작가의 전시회가 열려도 일정이 맞지 않거나 거리가 부담이 되면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더군다나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으미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테의 여러 책을 읽으면서 왜 더 포스터 북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동시에 찾아왔다. 이전 시리즈를 살펴보니 인스타그램에서 이름을 떨치는 우리나라 작가뿐만 아니라 드가나 르누아르 같은 유명 화가의 그림도 출간된 바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나온다면 또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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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문지 스펙트럼
사무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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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머릿속에 대만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인식도 비슷할 거라고 믿는다. 우리가 미디어로 가장 익히 배운 내용이다. 그러던 중 사뮈엘 베케트가 그려낸 사랑은 어떤 맛과 어떤 향을 풍길까 하는 궁금증에 이 책을 택했다. 내 생에는 첫사랑이라고 이를 법한 사람이 없었기에, 책을 들춰 보기 전 이번에는 또 어떤 형태의 사랑을 배울 수 있을지 기대감이 증폭되었다.

   「첫사랑」에서 ‘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집에서 쫓겨난다. 노숙 생활을 지속하다가 찾아낸 벤치에 어느 순간부터 륄리라는 여자가 매일 나타난다. 모진 말로 그녀를 타박한 뒤 자신 역시 벤치를 찾지 않지만 며칠씩 생각나는 감정을 사랑이라 여긴다. 재회한 두 사람은 동거를 하게 되지만 ‘나’는 그녀가 출산하는 날 집을 떠난다. 「추방자」에서도 주인공이 집에서 추방당한다. 그는 선천적 류머티즘으로 기이하게 걸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다가 경찰에게 경고를 받는다. 마부를 만나 그의 헛간에서 하룻밤을 보내려다가 길을 떠난다. 「진정제」는 자신이 언제 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화자의 진술로 시작한다. ‘나’는 어떤 여자의 지하실에서 묵게 된다. 급한 돈이 필요하다기에 할인된 가격으로 6개월치를 선불하나, 실은 다른 사람의 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진짜 주인에게 쫓겨난다. 「끝」은 수록작 중 가장 먼저 쓰였다고 하지만, 그야말로 이 단편선의 마지막 수록작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단편이다. ‘나’는 자선 기관을 빠져나와 방랑한다. 구걸을 일삼다가 자신에게 적선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연설가의 연설을 들은 뒤 구멍 뚫린 보트 안에서 진정제를 삼키고 눈을 감는다.







  단편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읽었다면 이어지는 이야기인 줄 알았을 것이다. 완독한 뒤 가장 먼저 든 솔직한 생각이다. 네 단편의 주인공은 모두 정서적으로 불안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1인칭 시점인 데다가 떠올랐다 지워지기를 반복한 생각들을 다듬는 일 없이 그대로 나열한 특유의 화투. 게다가 늘 지니고 다니는 모자나 집에서 쫓겨난 사연 등 유사한 처지를 공유한다. 이 책이 나에게 남긴 인상은 ‘쓸쓸하고 공허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표지의 빈 벤치를 처음 보았을 때 들었던 기분과 흡사했다. 내가 마주한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 세계는 “이게 첫사랑인 걸까?”에서 출발해 결국 “이게 삶인 걸까?”에 종착했다.

  베케트의 글쓰기는 보편을 벗어난다. 표제작도 마찬가지이다. 육체적 관계를 원치 않는 플라토닉을 추구할 수는 있으나,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이 질린다며 멋대로 안느라는 새 이름을 붙이는 화자의 태도는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동떨어져 있다. 컨디션과 기분이 회복되자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의 감정이 벌써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고백은 마침내 ‘사랑 아닌 거 아니야?’라는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꾼다. 해설에서는 이를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첫사랑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단편들마저 “추방자”, “진정제”, “끝”이라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단어들로 귀결된 것을 보면 삶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화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살아 있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그 이야기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보게 될 거다. p.74

  ‘나’는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해도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삶에 순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을 전전한다. 욕구로 그득한 사람들과 충돌하며 말이다. 주인공은 어떤 일도 하지 않고 누군가가 떠밀면 떠미는 대로 밀려갈 뿐이다. 이를테면 가정을 꾸리고 싶어하는 륄뤼와 대척점에 서는, 어떠한 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아 하는 ‘나’의 태도가 그렇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보면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을 정도로 통달하고 초월한 인간 같다. 하지만 나는 그가 혼자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 같은 상태라고 판단했다. 그는 아버지가 모자를 씌워 주었던 그 시절의 ‘나’에서 전혀 성장하지 못한 듯 성인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져야 할 책임을 외면하고 오로지 안식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 모든 게 준비된 방에서 지낼 수 있도록 제공해 줄 가족을 원한다. 자신이 가장이 되는 것은 거부하나 가정에 편입되어 방을 제공받고 싶어 하는 태도에서 ‘안식처’를 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나’는 노부인을 깔아뭉개고 내심 대퇴골이 부러졌기를 바라며 노부인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잘못해도 면죄부를 받는 아이를 향해 질투 섞인 눈빛을 보낸다. 이런 태도를 토대로 ‘나’의 마음 한구석에 보호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휩쓸고 간 아버지의 흔적은 뚜렷한데 어머니가 부재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요람이나 포근하게 품어 줄 수 있는 자궁을 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모자가 그에게 가지는 의미에 관해서도 침심해 보게 되었다. “마치 창세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듯하고 ‘나’의 것으로 낙점되어 있었던 듯한, 아버지가 사서 건넨 모자는 “혈기 왕성한 나를 질투했던 건 아닌지 종종 자문”하는 징표가 된다. 흔히 머리는 이성을 이르는 부위로 자주 사용되는 일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성장한 시점에 아버지에게 받은 모자로 머리를 꽁꽁 싸맴으로써 더 이상의 성장도, 독자적인 자아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을 은유하는 게 아닌가 짐작했다. 나는 내가 할 뻔했던 이야기를, 말하자면 끝낼 용기도 계속할 힘도 없었으면서 할 뻔했던, 내 삶을 본뜬 그 이야기를 아무 미련 없이 어렴풋이 떠올렸다. p.146 베케트는 억지로 묶이는 관계와 관습을 비틀고 끊어내기도 한다. 결혼으로 결합된 륄뤼와 아기를 버리고 한 가출, 처음부터 한 집단으로 주어졌던 가족에게서 차출당하는 일, 장례 행렬에 동참한 사람들이 성의 없이 성호를 긋는 모습, 자신을 챙겨 주는 자선 기관에 “발가벗겨서 땡전 한 푼 없이 거리로 내쫓지 못하게 하는 무슨 법”이 있는 것이냐고 묻자 그렇게 하면 “손해를 보는 건 결과적으로 우리”라는 답변 모두 공통적으로 사회에서 묶어 주는 집단과 그 관계를 대하는 각자의 태도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질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달리 생각하면 상대에 책임을 지게 되는 것 아닌가. 오늘날에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도리를 저버릴 수 없기에 의무적으로 품고 보듬는 일이 만연한 우리 사회를 떠올리면 의아하지 않고 솔직해 보이는 장면이다.

 
이렇듯 다양한 사유가 가능했지만 어머니는 부재하고 아버지만 그에게 있어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등 대체적으로 여성이 지워져 있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알고 보니 매춘부였으며 아기로 ‘나’를 붙잡아 두고자 하는 륄뤼(「첫사랑」),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이상하리만치 엉덩이가 큰” 마부의 부인(「추방자」), ‘나’에게 거짓말을 하여 돈을 들고 도망간 여자(「진정제」) 등에 그쳤다. 심지어 륄뤼는 이 시대 문학의 지겨운 클리셰를 다 지닌 캐릭터로, ‘나’의 머릿속에서 실제 이름 대신 안느로 불리기도 한다. 이를 토대로 베케트의 삶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의 작품관에서 여성은 큰 영향력을 지니지 못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읽기보다 쓰기가 어렵지만, 특히 고전은 더욱 그렇다. 이번에도 역시 책을 세 번 넘게 읽는 데보다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단상을 모아 하나의 글로 엮는 데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연 문지 스펙트럼의 시리즈로 구성된 만큼 생각의 스펙트럼을 넓혀 줄 수 있는 책이었다. 다행이었던 점은 문지 스펙트럼의 문고본 버전이 아주 작고 가벼웠다는 사실이다. 내용은 무거워도 책이 무겁지 않아 오고 가는 차 안에서 몇 번이나 펼쳐 볼 수 있었다. 약속이 있을 때에는 책을 들고 다니기에 부담스러워 잘 가지고 나가지 않는데, 『첫사랑』은 실로 오랜만에 함께 외출한 책이었다. 「끝」을 기점으로 보트 안에서 문을 감은 채 여태까지의 삶을 반추하거나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결국에는 보트 안에서 끝을 맞이하는 이 단편선은 여러 생에 걸쳐 반복되는 삶의 굴레와 어쩐지 유사점을 보인다. 리뉴얼판 문지 스펙트럼의 다음 도서가 기대된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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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과의 대화
이시형.박상미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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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왜 사냐?”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 입에서도, 지인들의 입에서도 자주 흘러나오는 말이다. 정말 궁금해서 던지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자책하는 데에 가깝지만, 생각해 보면 삶의 이유도 정말 모른다. 클리닉이나 병원이 많이 마련되어 있는데 현대인들은 정신적으로 크고 작은 질병을 앓고 있다. 과거보다 인식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대부분 정신병원 내원이나 상담을 꺼리기에 이런  “셀프 치유 안내서”가 끊임없이 출간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인간 심리, 특히 사람의 행동을 진단하고 원인을 찾는 데에 무한한 흥미를 느낀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의미 치료”라는 새로운 심리 상담 기법을 알아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이시형과 박상미는 모두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이 펼친 의미 치료 이론에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에 기반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책은 우선 빅터 프랭클의 저서 내용과 이론을 간략히 소개하고, 이후 저자의 상담 사례를 보여 준다. 후반부에는 두 저자의 대화도 실려 있다. 이들이 지지하는 의미 치료는 로고스를 중심으로 한다. 로고스는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본연의 힘”인데, 프랭클은 그것을 깨우는 행위로 삶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의미 치료는 처음 들었을 때 ‘치료’라는 단어 때문인지 나와는 동떨어져 있는 듯 느껴졌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빅터 프랭클이나 두 저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그저 무게를 옮기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의미를 찾고, 두는 것은 인생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인생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겠다는 능동적인 태도였다. 부정적인 사고 대신 긍정적인 사고를 하자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이런 어렵지 않은 방법으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조금 더 활기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자는 저자들의 제안에 솔깃했다. 의미 치료 분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명사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더욱 신빙성 있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언제나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쉽지 않기에, 혼자 살아남아 죄스럽게 생각하는 대신 상대가 느낄 상실감과 고통을 대신 경험해 주었다고 생각하기를 제안하는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의 이론을 단순히 이어받음에 그쳤다는 점이 도리어 아쉽게 느껴지는 지점이었다. 지지자로서 비판 등 살을 붙이지 않고 맥을 잇는 입장도 이해하지만, 공저인 만큼 두 저자의 시각에서 조금 더 확장했다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두 저자의 다른 저서보다는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관심이 생겼다는 데에서 특히 실감했다.


책장을 덮고 되돌아보니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굉장히 직접적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책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에 걸쳐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지기 때문이다. “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과연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모든 생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의미가 존재한다고들 하지만, 추상적인 이야기일 뿐 정확한 답을 제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삶은 나에게 너무 어려워서 종종 살아도 살아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미 벌어지거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의미를 찾는 것은 발상의 전환만으로 가능하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렇게 한 문제씩 답을 찾다 보면 어느새 인생이라는 커다란 난제 앞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품은 채 오늘도 가르침 하나를 기필코 습관화하리라 다짐한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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