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문지 스펙트럼
사무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머릿속에 대만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인식도 비슷할 거라고 믿는다. 우리가 미디어로 가장 익히 배운 내용이다. 그러던 중 사뮈엘 베케트가 그려낸 사랑은 어떤 맛과 어떤 향을 풍길까 하는 궁금증에 이 책을 택했다. 내 생에는 첫사랑이라고 이를 법한 사람이 없었기에, 책을 들춰 보기 전 이번에는 또 어떤 형태의 사랑을 배울 수 있을지 기대감이 증폭되었다.

   「첫사랑」에서 ‘나’는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집에서 쫓겨난다. 노숙 생활을 지속하다가 찾아낸 벤치에 어느 순간부터 륄리라는 여자가 매일 나타난다. 모진 말로 그녀를 타박한 뒤 자신 역시 벤치를 찾지 않지만 며칠씩 생각나는 감정을 사랑이라 여긴다. 재회한 두 사람은 동거를 하게 되지만 ‘나’는 그녀가 출산하는 날 집을 떠난다. 「추방자」에서도 주인공이 집에서 추방당한다. 그는 선천적 류머티즘으로 기이하게 걸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다가 경찰에게 경고를 받는다. 마부를 만나 그의 헛간에서 하룻밤을 보내려다가 길을 떠난다. 「진정제」는 자신이 언제 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화자의 진술로 시작한다. ‘나’는 어떤 여자의 지하실에서 묵게 된다. 급한 돈이 필요하다기에 할인된 가격으로 6개월치를 선불하나, 실은 다른 사람의 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진짜 주인에게 쫓겨난다. 「끝」은 수록작 중 가장 먼저 쓰였다고 하지만, 그야말로 이 단편선의 마지막 수록작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단편이다. ‘나’는 자선 기관을 빠져나와 방랑한다. 구걸을 일삼다가 자신에게 적선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연설가의 연설을 들은 뒤 구멍 뚫린 보트 안에서 진정제를 삼키고 눈을 감는다.







  단편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읽었다면 이어지는 이야기인 줄 알았을 것이다. 완독한 뒤 가장 먼저 든 솔직한 생각이다. 네 단편의 주인공은 모두 정서적으로 불안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1인칭 시점인 데다가 떠올랐다 지워지기를 반복한 생각들을 다듬는 일 없이 그대로 나열한 특유의 화투. 게다가 늘 지니고 다니는 모자나 집에서 쫓겨난 사연 등 유사한 처지를 공유한다. 이 책이 나에게 남긴 인상은 ‘쓸쓸하고 공허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표지의 빈 벤치를 처음 보았을 때 들었던 기분과 흡사했다. 내가 마주한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 세계는 “이게 첫사랑인 걸까?”에서 출발해 결국 “이게 삶인 걸까?”에 종착했다.

  베케트의 글쓰기는 보편을 벗어난다. 표제작도 마찬가지이다. 육체적 관계를 원치 않는 플라토닉을 추구할 수는 있으나,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이 질린다며 멋대로 안느라는 새 이름을 붙이는 화자의 태도는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동떨어져 있다. 컨디션과 기분이 회복되자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의 감정이 벌써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고백은 마침내 ‘사랑 아닌 거 아니야?’라는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꾼다. 해설에서는 이를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첫사랑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단편들마저 “추방자”, “진정제”, “끝”이라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단어들로 귀결된 것을 보면 삶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화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살아 있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그 이야기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보게 될 거다. p.74

  ‘나’는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해도 화를 내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삶에 순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을 전전한다. 욕구로 그득한 사람들과 충돌하며 말이다. 주인공은 어떤 일도 하지 않고 누군가가 떠밀면 떠미는 대로 밀려갈 뿐이다. 이를테면 가정을 꾸리고 싶어하는 륄뤼와 대척점에 서는, 어떠한 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아 하는 ‘나’의 태도가 그렇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보면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을 정도로 통달하고 초월한 인간 같다. 하지만 나는 그가 혼자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 같은 상태라고 판단했다. 그는 아버지가 모자를 씌워 주었던 그 시절의 ‘나’에서 전혀 성장하지 못한 듯 성인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져야 할 책임을 외면하고 오로지 안식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 모든 게 준비된 방에서 지낼 수 있도록 제공해 줄 가족을 원한다. 자신이 가장이 되는 것은 거부하나 가정에 편입되어 방을 제공받고 싶어 하는 태도에서 ‘안식처’를 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나’는 노부인을 깔아뭉개고 내심 대퇴골이 부러졌기를 바라며 노부인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잘못해도 면죄부를 받는 아이를 향해 질투 섞인 눈빛을 보낸다. 이런 태도를 토대로 ‘나’의 마음 한구석에 보호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휩쓸고 간 아버지의 흔적은 뚜렷한데 어머니가 부재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요람이나 포근하게 품어 줄 수 있는 자궁을 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모자가 그에게 가지는 의미에 관해서도 침심해 보게 되었다. “마치 창세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듯하고 ‘나’의 것으로 낙점되어 있었던 듯한, 아버지가 사서 건넨 모자는 “혈기 왕성한 나를 질투했던 건 아닌지 종종 자문”하는 징표가 된다. 흔히 머리는 이성을 이르는 부위로 자주 사용되는 일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성장한 시점에 아버지에게 받은 모자로 머리를 꽁꽁 싸맴으로써 더 이상의 성장도, 독자적인 자아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을 은유하는 게 아닌가 짐작했다. 나는 내가 할 뻔했던 이야기를, 말하자면 끝낼 용기도 계속할 힘도 없었으면서 할 뻔했던, 내 삶을 본뜬 그 이야기를 아무 미련 없이 어렴풋이 떠올렸다. p.146 베케트는 억지로 묶이는 관계와 관습을 비틀고 끊어내기도 한다. 결혼으로 결합된 륄뤼와 아기를 버리고 한 가출, 처음부터 한 집단으로 주어졌던 가족에게서 차출당하는 일, 장례 행렬에 동참한 사람들이 성의 없이 성호를 긋는 모습, 자신을 챙겨 주는 자선 기관에 “발가벗겨서 땡전 한 푼 없이 거리로 내쫓지 못하게 하는 무슨 법”이 있는 것이냐고 묻자 그렇게 하면 “손해를 보는 건 결과적으로 우리”라는 답변 모두 공통적으로 사회에서 묶어 주는 집단과 그 관계를 대하는 각자의 태도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질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달리 생각하면 상대에 책임을 지게 되는 것 아닌가. 오늘날에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도리를 저버릴 수 없기에 의무적으로 품고 보듬는 일이 만연한 우리 사회를 떠올리면 의아하지 않고 솔직해 보이는 장면이다.

 
이렇듯 다양한 사유가 가능했지만 어머니는 부재하고 아버지만 그에게 있어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등 대체적으로 여성이 지워져 있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알고 보니 매춘부였으며 아기로 ‘나’를 붙잡아 두고자 하는 륄뤼(「첫사랑」),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이상하리만치 엉덩이가 큰” 마부의 부인(「추방자」), ‘나’에게 거짓말을 하여 돈을 들고 도망간 여자(「진정제」) 등에 그쳤다. 심지어 륄뤼는 이 시대 문학의 지겨운 클리셰를 다 지닌 캐릭터로, ‘나’의 머릿속에서 실제 이름 대신 안느로 불리기도 한다. 이를 토대로 베케트의 삶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의 작품관에서 여성은 큰 영향력을 지니지 못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읽기보다 쓰기가 어렵지만, 특히 고전은 더욱 그렇다. 이번에도 역시 책을 세 번 넘게 읽는 데보다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단상을 모아 하나의 글로 엮는 데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연 문지 스펙트럼의 시리즈로 구성된 만큼 생각의 스펙트럼을 넓혀 줄 수 있는 책이었다. 다행이었던 점은 문지 스펙트럼의 문고본 버전이 아주 작고 가벼웠다는 사실이다. 내용은 무거워도 책이 무겁지 않아 오고 가는 차 안에서 몇 번이나 펼쳐 볼 수 있었다. 약속이 있을 때에는 책을 들고 다니기에 부담스러워 잘 가지고 나가지 않는데, 『첫사랑』은 실로 오랜만에 함께 외출한 책이었다. 「끝」을 기점으로 보트 안에서 문을 감은 채 여태까지의 삶을 반추하거나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결국에는 보트 안에서 끝을 맞이하는 이 단편선은 여러 생에 걸쳐 반복되는 삶의 굴레와 어쩐지 유사점을 보인다. 리뉴얼판 문지 스펙트럼의 다음 도서가 기대된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