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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들
에마 스토넥스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1월
평점 :
등대는 늘 그 자리에 있다. 변함없이, 한결같이.
등대지기들이 지니는 고독감 같은 건 그들이 감내해야 할 사명 같은 것이라 생각해왔다.
올여름, 바닷가 여행 중에 만난 등대(본래의 제 역할에서 벗어나 관광상품 내지는 학습용으로 물러난 등대)를 호기롭게 올라가 보았었다. 둥그렇게 설치된 계단 따라 위로 올라가 보는데 잠깐임에도 머릿속이 빙빙 돌 것만 같았다. 갇힌 공간, 빠를 듯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그들의 사명이라고만 보기에 용기 내지는 정의감 같은, 엄숙하고 심오한 뭔가가 필요해 보였다.
출간 즉시 아마존 베스트셀러라고 적힌 붉은 띠지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그 옆에는 보기 좋게 한창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작가의 평또한 궁금증을 배가시킨다. 기대감을 품고 든 책이 제법 묵직하다. 휘리릭 책장을 넘겨본다.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겨올 듯하다.
소설 '등대지기들'은 해상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메이든 록 타워 등대를 지키는 세 명의 등대지기들이 물처럼 증발한 듯 사라져버린 사건을 다루고 있다. 실제 사건인 1900년 스코틀랜드 앞바다의 엘런모어 섬의 등대에서 세 명의 등대지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은 사건에 작가의 추리력과 상상력이 더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1972년 겨울, 바다의 한 등대에서 등대원 세 명이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일련의 단서들이 남아 있었다. 출입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고, 두 개의 벽시계는 같은 시각에 멈추어 있었으며, 식탁에는 식사를 앞둔 식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p. 36)
사람들이 쉽게 찾아갈 수 없는 고립된 곳 해상 등대, 그곳을 지키는 세 명의 건장의 사내들,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나고야 말 것 같은 상황이다. 더불어 자연이 뿜어내는 높은 위엄 앞에 등대는 한없이 초라해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사라져버린 그들, 이 사건은 자연재해일까 인재일까?
잠을 자야 한다. 잠을 자지 않으면, 내가 깨닫기도 전에 몇 시간이 며칠이 되고, 낮이 밤으로 접어든다. 달력 위에 날짜를 지워나가야 흐르는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 (p. 176)
처음엔 이 소설을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이라 여겼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스릴러 소설보단 개개의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한 심리 소설이라 봐야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소설은 사건이 발생된 1972년 세 명의 등대원들의 목소리, 그리고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 남겨진 가족들인 그들을 사랑했던 세 여자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각각의 인물들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그려내고 있어 사건의 잔상을 파헤쳐 나가는 것이다.
베스트셀러라고 모두에게 베스트이진 않는 법이다. 이 소설은 서정적이고 심리적인 묘사를 원하는 이들에겐 더없이 좋지만, 다이내믹한 긴장감을 원한다면 구미에 맞지 않을 소설이다. 그래서랄까. 풀리지 않을 듯한 이야기에 맥이 빠져버린 것은 사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좋았던 것은 작가가 그려내는 필력에 있었다. 눈에 담는 배경 하나하나, 인물의 자그마한 행동도 놓치지 않는다. 작가의 섬세한 시선에 마음이 동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흡사 고체인 듯,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공기는 술잔 속의 얼음조각인 양 어부들의 오두막들 사이에서 짤그랑거린다. (p. 13)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공기가 짤그랑거린다는 식의 표현은 자꾸만 소설 속 장면을 떠오르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등대지기들은 8주를 바다에 우뚝 솟은 타워 등대에서 보내고 4주를 집에서 보내는 생활을 한다. 보이는 것은 하늘이요, 물 뿐이다. 좁은 공간에서 나이도 성격도 다른 이들이 모여있다면? 작가는 사라진 등대원들은 다름 아닌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들의 등에 칼을 꽂은 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들이었다. 그 과정까지 다다르는 인물의 섬세한 심리묘사는 단연 눈에 띈다.
묵직하고 축축한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실제 사건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져 장편소설이 탄생한 것에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이제 나는 눈을 감아도 등대의 모습이 눈에 그려질 것만 같다.
요 며칠간 이 책이 나에게 머물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려나?
※ 이 도서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