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을 헤치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8
아이리스 머독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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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아노]를 보면 여주인공 에이다가 피아노 다리에 묶인 밧줄로 자신의 발목을 묶어, 피아노가 바다에 빠질 때 함께 떨어진다. 영화를 본 후로 몇 해가 지났는지도 가물거리니, 기억이 정확한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아무튼 내 머릿속에는 그렇게 남아있다. 바다 속에서 뒤집힌 검은 치마는 에이다의 얼굴을 가렸고 화면이 바뀌었다. 에이다는 검은 망사가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에이다가 자신의 시야를 가린 망사를 걷어 올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에이다는 검은 베일 너머 앞을 응시할 뿐 그것을 걷어 올리지 않았고, 잘게 짜여진 격자 무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미지는 아직까지도 나의 두 뺨을 붙잡고 에이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게 만들었다. 

[그물의 헤치고]의 주인공인 제이크도 스스로 만든 그물을 뒤집어 쓰고 살아가는 룸펜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나쓰메 소세키가 쓴 [그 후]의 다이스케와 비슷한 인물일거라 단정했다. 그러나 아이리스 머독은 제이크를 '그물을 헤치고' 눈 앞의 가리개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로 성장시킨다. 끝없이 자신을 고백하는 제이크의 독백은 하찮고 졸렬하며 변변찮고 사소하다. 그의 산책과 헤매임은 내가 가진 푸념과 변명을 닮아 범속하다. 고등 룸펜이었던 그가 병원의 잡역부로 들어가 자신이 행하는 육체적 노동의 유희적인 면면들을 독특한 관점에서 부각시키는 곳에 이르자, 나는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둘러싼 그물을 헤치내기 시작했음에 동조했고 기뻤다.   

아이리스와는 이 소설로 처음 만났다. 그가 자신의 첫 작품에'그물을 헤치고'란 제목을 붙인 건 우연이 아닐 것만 같다. 그래서 '그물을 헤치고' 앞으로 쑥쑥 나아가면서 써냈을 다른 작품들이 읽고 싶어졌다. 어서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어 출판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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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열림원 이삭줍기 4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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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카나파니는 낯선 작가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서를 읽고 나면 그의 작품이 국내에 더 이상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워진다. 그리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라는 제목이 가지는 숨막히는 열기를 고스란히 경험하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제목을 잊은 어떤 영화가 떠올랐다. 오직 생존하기 위해 밀항을 선택했던 한 소년이 있었다. 자신이 살던 나라를 탈출하기 위해 소년은 컨테이너 안의 한 드럼통 속에 숨는다. 소년은 그 항해가 얼마나 길지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는 보름 이상 바다 위를 떠다닌 후에 비로소 소년이 가려던 나라의 한 항구에 정박했다. 컨테이너에서 하역된 드럼통은 부두 위를 굴러가다 멈췄다. 옆으로 누운 드럼통의 뚜껑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팔 하나가 검은 땅 위로 툭 떨어졌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는 트럭의 물탱크 안에 숨어 팔레스타인에서 쿠웨이트로 가려는 세 사람의 탈출기이다. 그들은 빈 철재 물탱크에 숨어 잔인하게 뜨거운 태양을 머리 위에 두고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간다. 칠 분 후에 열어준다던 물탱크 뚜껑은 삼십분이 지나도록 열리지 못했다. 예기치 못한 국경 검문소의 사정 때문이었다. 한 낮의 태양으로 달궈진 물탱크 안은 그대로 불구덩이와 다르지 않았다. 사십여분이 지난 뒤 뚜껑을 열었을 때 물탱크 안은 뜨겁게 삶아진 고요만이 가득했다. 

죽을 지도 모르지만 살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야만 한다면, 죽더라도 넘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살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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