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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너머 한 시간
헤르만 헤세 지음, 신동화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한 내용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이름을 들으면 늘 마음 한쪽이 조금 뜨거워지면서도 조심스러워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릴 적에 호기롭게 <데미안>을 펼쳤다가 결국 중간쯤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기억 때문입니다. 그때는 문장도 어렵고, 헤세가 말하고 싶었던 세계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제게 늘 “언젠가 다시 만나야 할 작가”처럼 남아 있었어요.
이번에 읽은 <자정 너머 한 시간>은 그런 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다리 같은 책이었습니다. 길고 복잡한 이야기 대신, 아홉 개의 짧은 산문이 조용하게 펼쳐져 있고, 청년 헤르만 헤세의 감정과 사색이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고스란히 드러나 있거든요.
자정 이후의 시간은 사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 일 없는 순간들로 가득하잖아요. 그런데 헤세는 그 고요한 틈에서 인간이 가장 솔직해지고, 억눌러둔 욕망이나 그리움이 가장 또렷하게 떠오른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다 보면 공감되는 지점이 자주 나와요.
외롭지만 외로움이 싫지만은 않았던 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던 그때,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커져서 오히려 겁이 났던 순간들 같은 것들요. 헤세는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거의 그대로 펼쳐 보이는데, 그 솔직함이 의외로 큰 위로가 되었어요.
무엇보다 이 책이 제게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데미안>이나 <싯다르타>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아주 적당한 예열이 되어주는 작품이라는 점이에요. 헤세의 철학이 아직 정교하게 정리되기 전이라 문장이 훨씬 부드럽고 감정이 선명해서, 오히려 그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책을 덮고 나니, 예전에 잠시 멈췄던 <데미안>이 이제는 조금 덜 두렵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늘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마음에만 두었던 <싯다르타>도 드디어 손에 잡힐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거창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 아니에요. 잠들기 전 한두 편씩 읽으면, 그날 하루의 소음이 자연스럽게 가라앉는 느낌도 있었고요. 저처럼 헤세에게 다시 다가가고 싶은 분들, 혹은 헤세와 첫 만남을 조금 가볍게 시작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