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토머스 쿤은 미국의 하이데거인가

<쿤/포퍼 논쟁>(생각의나무, 2007)이란 책이 출간됐다. 제목이나 주제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닌데, '쿤과 포퍼의 세기의 대결에 대한 도발적 평가서'란 부제가 눈길을 끈다. 재작년에 출간된 원서의 표지에는 그런 부제가 붙어 있지 않으므로 국역본에 새로 붙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도발적'이라니까 흥미는 끈다. 분량도 230여쪽이어서 부담없고(원서는 143쪽이다).

소개에 따르면, "1965년 7월, <과학혁명의 구조>로 명성을 떨친 토머스 쿤과 <열린 사회와 그 적들>로 비판적 지성의 거장으로 주목받던 칼 포퍼가 만나 과학의 본성에 대해 토론했다. 그 한 번의 격돌은 지난 반세기 동안 공적 토론의 중심 주제로 군림해왔으며, 거기서 쿤의 다원론적 시각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지은이 스티브 풀러는 논쟁의 주역들이 풀어놓은 이야기의 맥락이 완전히 오해되었다고 평가하며 쿤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과 열광 속에 대중의 집단적인 판단 착오가 녹아있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대립한 쟁점은 과학철학뿐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판단한다."



"풀러에 따르면 쿤은 과학의 개방성을 옹호하기는커녕 냉전의 압력에 맞닥뜨려 과학자들의 자율권을 지켜내려 애쓴 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포퍼는 '열린 사회'를 옹호했던 그의 철학적 입장에 걸맞게 비판적 합리성의 기수로서의 과학을 옹호하며 나아갔다는 것이다. 독자적으로 MIT의 '쿤 아카이브'를 연구 고찰한 풀러는 쿤의 과학적 변동 이론에서 철학적 감시를 찾아볼 수 없음을 피력하며, 이를 바탕으로 과학자 사회에 지나치게 부여된 독자적 권한을 되찾아오고자 노력한다. 세기의 대결에 대한 이 급진적 평가서 속에는 쿤/포퍼 논쟁의 맥락을 짚어주는 섬세하고도 정교한 지침이 숨어 있다."

그러니까 책은 과학철학사의 이 세기의 논쟁을 일종의 추리소설로 재독해하는 재미를 줄 듯하다. 게다가 마지막 장의 제목은 '토머스 쿤은 미국의 하이데거인가?'이다. 별로 웃을 일이 없던 차에 슬며시 웃음을 머금게 하는 주제이고 구성이다.

 

 

 

 

사실 이 주제/논쟁과 관련하여 참조할 만한 책들은 많이 나와 있다(이전에 소개한 바도 있고). 먼저, <현대과학철학 논쟁>(아르케, 2002)은 이 논쟁의 '원문'을 읽어볼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스티브 플러가 참조하고 있는 건 '쿤 아카이브'이며 이러한 공식적인 논쟁의 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탐색하는 것이지만. 그리고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이제이북스, 2002)은 쿤의 과학철학과 그 사회학에 관한 가장 읽기 쉬운 소개서이다. 이 주제에 처음 관심을 갖는 독자라면 제일 먼저 손에 들 만하다.

그리고 평전 <토머스 쿤>(사이언스북스, 2005). 소개에 따르면 "토머스 쿤 위에 두껍께 쌓인 오해의 먼지를 날려 버리는 책. 저자들은 토머스 쿤의 저술들을 조심스럽게 독해하여, 쿤이 <과학 혁명의 구조>를 중심으로 하여 과학사와 과학 철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를 생생하게 재현해 낸다." 그리고 포퍼의 과학관/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그의 에세이집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부글북스, 2006). "눈부신 과학발전, 탐욕과 독선으로 빚어진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등 21세기 격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산 지은이가 인생 마지막 25년 동안 에세이 형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간추"린 책이다.

 

 

 

 

쿤과 포퍼와 주요 저작들은 물론 번역/소개돼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 <과학으로 생각한다>(동아시아, 2006)는 한겨레에 연재됐던 글들을 모은 것인데, '과학 속 사상, 사상 속 과학'에 해당하는 넓은 범위를 다룬다. "뉴턴에서부터 인공지능까지 현대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과학자들의 사상을 다양한 학문 분야로 확장, 통괄하면서 펼치는 유쾌한 지적 파노라마. 과학자들이 세계를 보고 생각했던 다양한 방식을 인문학적, 사회적으로 되짚으며, 일상에서 어떻게 위대한 과학적 아이디어가 출현했는지, 그 과학적 사상이 세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다"루는 책으로 당연히 쿤과 포퍼에 관한 내용도 포함돼 있으며 이 논쟁의 배경이 될 만한 이야기거리들을 읽어볼 수 있다...  

07. 0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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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석궁 테러 뉴스를 접하고 생각난 단편 하나...

 

 

 

 

 

현직 판사를 겨냥한 석궁 테러 뉴스가 어제 처음 나왔을 때에는 피의자 이름을 밝혀두지 않았는데, 이제는 실명은 물론이고 유치장에 수감된 사진까지 몽땅 공개되었으니 좀 당혹스럽다. 연예인의 경우에는 뻑하면 A군, B양, C씨라는 이니셜로 지칭되어 네티즌들의 "알아맞추기" 놀이를 유도하면서 이번에는 어째 그랬을까? 정확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법에 호소했지만 억울함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을 택했다"는 저자 스스로가 요청한 것일 수도 있겠다. 본래 대학 교수였던 저자의 해직 배경이나 이후의 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법 앞의 개인"이라는, 마치 카프카의 단편소설과도 비슷한 상황이 그려진다. 나야 그 교수가 누구인지, 그 판사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함부로 가타부타 할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법 앞의 개인"이 느낄 수밖에 없는 막막함과 위화감 같은 것에 대해서는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뉴스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자 생각난 단편소설이 하나 있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추리/첩보 소설가인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유일한 단편집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No Combacks)에 수록된 "면책특권"(Previlege)이라는 작품이다.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싫은 분은 읽지 마시라.)

  • 주인공은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평범한 사업가인데, 어느날 한 신문에서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풍문을 사실인 양 기사화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다. 그는 변호사와 만나 명예훼손 소송을 논의하지만, 변호사는 명예훼손 소송이란 긴 시간과 막대한 금액이 소요되어 결국 개인을 파산으로 몰고 가게 마련이므로, 명예를 건지기 위해 인생을 망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주인공을 설득한다. 주인공 역시 이에 동감하여, 직접 신문사를 찾아가 문제의 기사를 쓴 기자와 편집국장과의 면담을 요구하지만 결국 거절당한다. 화가 난 주인공은 관련 법률을 찾아보다가, 영국 법정에서는 피고인에게 무슨 말을 해도 되는 "면책특권"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종의 계획을 세운다. 얼마 뒤, 주인공은 문제의 기사를 쓴 기자의 집을 찾아가고, "변호사와 이야기하라"는 퉁명스러운 기자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상대방의 콧잔등을 주먹으로 갈긴 다음,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며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은 이 문제를 그냥 무마해 버리려 하지만, 주인공은 고집을 부려 결국 폭행 사건에 대한 재판이 성사되게 만든다. 재판 직전에 누군가가 런던의 주요 신문사에 이 재판에 관한 정보를 흘리고, 재판 당일에 법정에는 신문기자들이 대거 몰려든다. 주인공은 변호사 없이 본인이 변론을 하겠다고 요청하고, 재판이 진행되어 피해자인 그 기자가 증언을 해야 하는 차례가 되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겠다고 한다. 그로 인해 기자는 증언할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도로 내려가고, 피고는 "피고인은 어떠한 말을 해도 용납된다"는 "면책특권"을 십분 활용하여, 그 기자가 쓴 기사는 거짓이었음을 자세히 설명하고, 자신이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기자를 찾아가서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욱 하는 심정에서 폭행을 저질렀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판사 역시 주인공의 처지를 십분 공감하는 한편, 그래도 폭행은 잘못이므로 "150파운드"의 벌금은 선고하는 것으로 재판은 끝나 버린다.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수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송 비용 대신에 겨우 수백 파운드만 들여서 명예훼손을 당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 기사 내용도 사실이 아님을 증명했으며, 여러 신문사에서 기사화가 될 테니 만약 상대방이 상고해도 훨씬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으며, 재판 내내 검사 측은 한 마디도 못 하게 만든 "면책 특권"을 톡톡이 이용한 셈이었다. 재판을 끝내고 나오는 도중에 분노에 사로잡힌 기자가 그를 붙잡고 "네가 뭔데 나에 대해 그따위로 이야기하느냐?"고 으르렁거리자, 주인공은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받아친다. "왜, 당신도 그랬잖소?"

물론 어제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석궁 테러"는 물론 이와 상황이 다르겠지만, 나로선 위에 소개한 단편소설과 비슷한 부분이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여차 하다간 사람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흉기를 들이밀기보다는, 차라리 위의 작품에 소개된 주인공처럼 철저한 계획을 세워 "최소 투자로 최대 효과"를 이끌어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그래, 솔직히 어차피 사람 죽일 생각이 없고, 이렇게 대대적인 "언론 플레이"가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석궁보다는 주먹질이 더 낫지 않느냐 이거다. 아니면 그냥 따귀나 한 대 치고 말든가.) 물론 그런 일이 "소설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차라리 그냥 실랑이를 하다가 주먹질을 했다면 과실일 수 있으니 정상참작이 된다 치더라도, 이건 무슨 빌헬름 텔도 아닌데 석궁을 들고 기다렸다니... 아무래도 피의자 본인에게는 유리한 상황이 아닌 듯하다. 피의자는 전직 수학교수였다고 하는데, 그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그런 문제에 대한 고려가 어째서 들어가지 않았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만큼 절박하고도 자포자기했던 것일까?

법조계에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법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처럼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폭력을 쓴 것까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공감"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쉽게 말해 "오죽 억울했으면 그런 황당한 짓까지 저질렀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상황이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 역시 얼마 전에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아파서 죽는다고 신음하는 환자의 고통은 외면한 채 고압적인 자세로 틱틱거리기만 하던 새파란 의사란 놈을 보면서 몇 번이나 멱살을 틀어쥐고 싶었으니까.(솔직히 그 놈 보고 집에 와서 <하우스> 드라마를 보니, 이제는 "싸가지는 요만큼도 없는 주인공" 천재 의사 하우스보다도, 그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은 것에 앙심을 품고 의사의 마약 관련 불법행위를 뒷조사해 법정에 세우려는 "악역" 트리터가 오히려 더 공감이 갔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테러나 린치 같은 "사적 처벌"에 호소하려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이야기다.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정의파 경찰이나 판사는 아무래도 공감이 안 가지만, 악덕 경찰이나 판사는 공감이 가는 것도 어쩌면 그런 맥락이 아닐까.(실제로 잘못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므로.)

물론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남에게 폭력까지 쓴다는 것은 곤란하다. 다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법 앞의 개인"이 느끼는 막막함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봐야 하니 문제다. 아무리 법치국가라고 하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법대로" 한다고는 하지만, 개인이라는 존재는 법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교수 정도 되면 나름대로는 서민 아닌 특권층 취급을 받는 사회에서, 전직 교수 출신의 한 개인이 법 앞에 석궁을 들이댔다는 것, 그건 어쩌면 "법 앞의 개인"이 느끼는 막막함을 처절하게 반증해 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단편집 No Comebacks 는 정말 "주옥 같은" 작품들이 늘어선 책이다. "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There are No Snakes in Ireland),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No Comebacks), "협박"(Money with Menaces) 등은 포사이스 특유의 "반전의 묘미"를 보여주는 걸작이고, "황제"(The Emperor)는 감히 "<노인과 바다>에 맞먹는 걸작"이라고 단언할 만한 인상적인 작품이다.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한동현 옮김, 예전사, 1983), <올 수없는 사랑>(김정숙 옮김, 삼진기획, 1988) 등을 비롯해 여러 가지 번역본이 나왔지만, 탁월한 이야기꾼인 저자의 말빨을 제대로 살리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나중에 큰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면책 특권>인가 하는 책도 지금은 절판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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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승호의 인터뷰와 정기자의 서평

엊그제 우리 곁을 떠난 정군님의 리뷰를 하나 옮겨놓는다. 지승호의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시대의창, 2006)에 대한 것이고, 형식은 '오마이뉴스'의 서평기사를 퍼오는 식으로 하겠다(정군님의 알라딘 리뷰들은 현재로선 모두 그와 걸음을 같이 했으므로). 딴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아침에 '필름2.0'을 읽다 보니까 이번주 인터뷰이(!)가 지승호씨였다. 이달에 나대로 고른 '사회적 독서'의 대상 중 하나가 <금지를 금지하라>였기에 관심을 갖고 읽었고(이 인터뷰는 내주에 옮겨놓을 생각이다), 두 주 전쯤에 산 책을 아직 못펴들고 있지만 조만간 읽어볼 결심을 다시 하게 됐다.

그런 생각으로 '지승호'를 검색하니까 가장 먼저 뜨는 게 바로 오마이뉴스의 이 서평기사이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지. 서평도서에 대해서 그만한 애정과 부지런함을 갖춘 '서평꾼'이 이제 이 마을에는 거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쉽고 씁쓸하다(물론 나도 '양다리 걸치기'에 대해선 충고를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것이 도덕적인 책임의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래의 리뷰는 그걸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오마이뉴스(06. 12. 11)  세상을 발전시키는 대화가 여기에 있다!

국내 유일의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가 열 번째 인터뷰집을 내놓았다. 자본의 논리에 맞서는 이들, 박원순,조정래, 마광수, 이상호, 정태인, 문정현, 최승호, 지승호 등 8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가 담긴 <禁止(금지)를 금지하라>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그 분야에서 자신이 믿는 것들을 위해, 그것이 권력을 지닌 자본의 논리에 비켜나는 것일지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열혈인사들이기에 인터뷰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맨 뒤에 있는 '지승호'와 한 인터뷰다. 저자가 다른 이를 만나서 인터뷰한 것을 담은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셀프 인터뷰'다. 10번째 인터뷰집을 기념해서 담아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시도가 생소하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묵묵히 인터뷰집을 내놓았던 지승호의 철학을 직접적으로 들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가장 마지막에 있는 지승호 인터뷰부터 보도록 하자. 눈길을 끄는 것은 솔직함이다. 그동안 인터뷰를 통해서 소를 연상케 하는 성실함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인터넷에 달린 댓글에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며, '열등감으로 가득 찬 나르시스트'라는 자평은 예의로 하는 말 같지는 않다(*지승호씨 또한 알라디너인데, 나는 본인도 고백하는, 그리고 노출하는 그의 '피해의식'이 오히려 책읽기를 방해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저자는 적당히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어야 하지 않나. 이건 굳이 저자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일기장에 담을 법한 내용이라고 할까? 인터뷰집이라는, 아직은 생소한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저자의 어려움과 고뇌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그는 왜 인터뷰를 계속하는 걸까? 지승호는 도올의 말, 즉 "대화는 편견의 확인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터뷰의 매력을 소개하고 있다. 대화는 힘이 세다! 그것을 믿고 인터뷰를 하며, 더 좋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일 게다. 자본은 뒤로하고, 오로지 그 믿음 하나만 갖고 사는 열혈남자의 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지승호가, 대화의 힘을 믿는다는 그가 책 속에서 만난 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시작은 참여연대를 나와 희망제작소를 만든 시민운동가, 얼마 전에 삼성에서 지원금을 받아 논란을 일으켰던 주인공 박원순이다. 인터뷰에서 박원순은 본의 아니게 유명인이 된 시민운동가의 고뇌를 털어놓는다.

그 고뇌란 무엇인가? "글을 쓰고 싶다"는 그는 주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와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심지어 이름만이라도 빌려달라는 것도 있다. 박원순은 마지못해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문제가 생긴다. 다른 곳에서 '너무 설친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셈이다.

박원순은 이것을 농담처럼 말하지만 단순히 유명세로 얻은 병치레라고 치부하기에는 커다란 고민이 있어 보인다. 그런 고민을 듣는 것 외에 참여연대에서 희망제작소로 옮긴 과정, 그리고 희망제작소에서 삼성의 기부금을 받은 것에 대한 생각 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것도 반갑다.

지승호의 질문이 날카롭기 때문일까? 박원순은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않았다. 참여연대에서 나오게 된 과정, 기업으로부터 돈 많은 것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박원순을 비판했던 이들에 대한 생각까지 들을 수 있다. 박원순, 나아가 오늘날의 시민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체크해 볼 가치가 있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한강>과 <태백산맥>, 그리고 <아리랑>이라는 말 많은 작품의 주인공 조정래다. 이 작품들이 말이 많다는 건 왜일까? 고발된 문학 작품! 마광수, 장정일과 달리 조정래의 작품은 '레드 콤플렉스'로 인해 무성한 말이 오고 갔다.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다른 인터뷰들은 기이할 정도로 이것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작품의 의미만을 파고드는 반쪽짜리 인터뷰로 진행된 경우가 많았다. 조정래에 관해서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암묵적으로 존재했던 셈이다.

하지만 지승호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것을 파고들었다. 또 조정래에게 정치에 관해서도 물어보고 있다. 덕분에 조정래는 <금지를 금지하라>에서 작품으로 말할 기회에 이어 '대놓고 말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것은 예의 치레에 박힌 말들이 아니라 인간 조정래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말들이기에 반쪽이 아닌 정상 인터뷰가 만들어졌다. 조정래에 관한 인터뷰 중에서 가장 성실하다는 평가가 나올 만한 인터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세 번째 인터뷰이는 '자유정신 선동가' 마광수다. 마광수는 속칭 '야한' 소설로 말이 많은 작가다. 지승호나 마광수 또한 이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때문에 이들은 이것부터 파고든다. 마광수는 인터뷰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무엇이 억울한가? 마광수는 외국 작가들의 작품, 예컨대 무라카미 류의 작품처럼 야한 정도로 따지면 더 노골적이 있는데도 국내 작가들의 작품만 차별한다는 것이다.

대중에 대한 서운함도 빼놓지 않고 있다. 사람들이 작품을 읽어본 뒤에 '비판'을 한다면 감수할 수 있겠지만, '너무 야하다!'는 말만 듣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광수의 말은 듣기에 거북한 것이지만, 근거가 있는지라 간과할 수 없다. 외국의 것은 작품성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면서, 우리의 것은 작품성과 별도로 '위험하다'는 이상한 이중성의 잣대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광수의 인터뷰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리로만 전락한 것은 아니다. 다시 연애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며 자유로우면서도 '올바른' 성문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지적하는 것들은 농담 같지만 진지하고 장난 같지만 경청할 필요가 있는 뼈있는 말들이다.

이외 대추리에서 만난 문정현과의 인터뷰에서는 '낮은 곳'에서 나이를 잊고 고군분투하는 종교인의 속마음을, 정태인과 한 인터뷰에서는 한미FTA의 위험성을 이상호와 최승호가 만난 인터뷰는 한국 언론에 대한 문제점을 들을 기회가 된다.

인터뷰 하나에 질문을 140개 만들 정도로 성실하게 준비했기 때문일까? 이들과 나눈 대화는 살아 있다.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라 인터뷰만 봐도 그들을 직접 만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힘 있고 굳세다. '대화의 힘'은 묻히지 않았고 활자 위에서 생동하고 있다. 덕분에 세상을 발전시킨다는 대화의 힘이 무엇인지를 엿보게 해준다.

박원순, 조정래, 마광수 등 그들의 말만 갖고도 책 한 권은 족히 나올 법한데, 그들 8명을 한 권에 담아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금지를 금지하라>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의 논리에 맞서 싸우는, 진실을 찾는 이 사회의 일꾼들의 목소리가 담긴 <금지를 금지하라>, 세상을 발전시키는 대화가 담겨있다.(정민호 기자)

07. 01. 16.

P.S. 참고로 저자가 가장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인터뷰는 이상호 기자와의 인터뷰라고 한다. '사회적 독서'는 취향이나 형편에 따라 읽으면 좋고, 가 아니다. 의무적인 독서이고 강제적인 독서이다. 물론 그래도 각자의 사정을 무시할 수는 없겠다. 그래서 많이 봐드리자면, 한권씩 그냥 사서 꽂아두시길. 그래야 책이 계속 더 나온다. 지승호 인터뷰집의 근간은 <감독, 열정을 말하다> 속편이라고. 그의 계획대로 홍상수, 김기덕 감독 편까지 포함한 인터뷰집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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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60) : 섬뜩해서 다 못 읽은 책...

지난 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신작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에 대한 듀나의 서평을 읽자마자 문득 머리에 떠오른 책이 하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에 번역 출간된 (원서는 2002년) 그레그 캠벨의 <다이아몬드 잔혹사>(김승욱 옮김, 이마고)다.(영어 제목은 Blood Diamonds 라서 혹시 영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나 찾아보았는데,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영화가 나오면서부터 언제부턴가 "잔혹사"라는 말은 일종의 코믹한 뉘앙스를 풍기게 되었는데, (물론 그 오리지널(?)인듯한 <이조여인잔혹사>인가 하는 영화는 꼭 그렇지 않았겠지만)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에도 여기 나오는 "잔혹사"는 일종의 코믹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뜻으로 어림짐작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쳐보니, 여기 나오는 내용은 정말 "잔혹한 역사"였다. 책을 딱 펴자마자, 1996년에 다이아몬드 생산의 전초지인 시에라리온 코이두에 살던 이스마엘 달라미라는 사람이 반군에게 붙잡혀 "도끼에 두 손을 잃는" 장면을 아래처럼 생생하게(으윽!) 묘사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임산부나 심신 허약자는 읽지 마시라.) :

  • AK-47 총신이 그의 왼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달라미는 바로 조금 전, 아들이 만들어준 반지를 뺐던 가운뎃손가락에 난 반지자국을 보았다. 손으로 만든 도끼날에 순간적으로 햇빛이 반짝였고, 달라미는 도끼날이 내려올 것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도끼가 손목 바로 위의 뼈를 내리쳤다. 단 한 번의 도끼질로 손목은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희생자들의 신체를 절단할 때 아무렇게나 십여차례 도끼를 내려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이 툭툭 튀면서 그루터기 가장자리 너머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생전 처음으로 햇빛을 본 척골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반군들은 그의 나머지 손도 잘라낸 모양이지만, 달라미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19쪽)

솔직히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속이 확 울렁거렸다. 뭐, 매니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데드 얼라이브>를 집사람과 깔깔거리며 본 이래, 이제 웬만한 피칠갑은 눈 하나 깜짝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꽥, 제목도 뭔가 좀 웃기게 보이는 책 한 권을 펼쳐들자마자 카운터펀치를 맞은 기분이었다. 결국 책을 더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덮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고어 영화를 볼 경우에는 "아니, 이건 현실이 아니야. 눈속임이야, 특수효과라구. 실감은 나지만, 이 영화 찍으면서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걸" 하고 일종의 자기암시를 계속 걸어대는 반면, 이 책에 나온 "손 자르는 대목"은 그야말로 현실, 그것도 지금까지 계속되는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듀나는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이중적인 측면(액션영화이면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을 지적했는데, 하여간에 다이아몬드 자체의 그런 이중적인 측면에 관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 내 경우야 동네 악세사리점에서 7만 5천 원에 두 개짜리 14k 반지를 사서 결혼반지로 대신한 인간이니 (게다가 나중에 술 처먹고 길에 자빠져 자다가 결국 그나마도 잃어버린 다음부터는 반지 없이 돌아다니는 인간이니) 그쪽과는 거리가 영 멀다고 쳐도, 이 세상에서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라는 드비어스의 거창한 문구에 혹해 그 "피투성이 돌멩이"를 비싼 값에 구입할 순진한(어쩌면 멍청한)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몇 가지 생각 :

  • 어지간히 잔혹하겠지 싶어서 안 보려고 했는데, 영화에 제니퍼 코넬리도 나온단다. 와와... 아마폴라... 그리하여 이 영화, 봐야 되나 안 봐야 되나, 고민중.
  • 근데 "드비어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왜 이리 반가운 생각이 드나 했더니, 내가 좋아하던 노래, Just Tell Me You Love Me 가 한때 드비어스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그리고 내 기억엔 그때 여자 모델도 꽤나 호감이 갔던 듯... 아니야, 아니, 그건 모두 환상일 뿐이야, 블러드 다이아몬드, 블러드 다이아몬드, 블러드...)
  • 이건 인종차별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인데,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그런 "만행"(말 그대로 "야만적인 행동")을 보면 그건 일종의 문화적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유럽이나 우리나라처럼 겉으로는 "산업화"된 문명국을 자처하는 곳에서는 아무리 싸움이 크게 벌어져도 남의 손목을 뭉텅뭉텅 자르는 일은 없을 테니까.(물론 오늘 뉴스에 나온 것처럼 석궁을 쏘기는 할 망정.) 이건 꽤 오래 전에 데이비드 카플란의 기행문을 읽으면서 한 생각인데, 이른바 "산업화"나 "서구화"가 그런 식의 "만행"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제공한다면, 나로선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쉽게 말해서 나 같으면 혼자 길을 걷다가 노상강도를 당하기 일쑤고, 매번 출입국 할 때마다 관리에게 뇌물을 먹여야 하는 어느 아프리카 국가의 사회보다는, 차라리 지금 우리나라가 좀 더 마음에 든다는 거다. 물론 단순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이쪽은 비록 겉치레일망정 어느 정도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풍요한 미국보다는 가난한 라다크가 더 낫다"고들 주장하는데, 솔직히 나 같은 사람은 라다크보다는 차라리 미국이 더 살기 편하지 않을까 싶다.(어느 사회에나 부적응자는 있는 법이므로.)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럽이나 미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인권탄압이나 테러가 전혀 없으리라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프리모 레비의 말마따나 홀로코스트처럼 "독일인들 특유의 정확성이 빚어낸 만행"이 존재한다는 걸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어느 나라는 가스실을 만들고, 어느 나라는 손목을 잘라버리는 등 "만행"에 있어서도 일종의 문화적 차이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다만 나로선 둘 중 어느 쪽이 더 "야만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교양 있는 척 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수만 명 단위로 태워죽인 독일인과, 그야말로 "단순무식"하게 무고한 사람들을 수백 명 단위로 난도질하는 아프리카인 중 어느 누가 진정한 "야만인"인지는 말이다.(하긴 고대 중국에서도 공자의 제자 자로가 내전에 휘말려 사망한 후, 그의 원수가 그 살을 저며 젓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었지. 그 이야기를 들은 공자가 이후 평생 젓갈을 먹지 않았다나... 지금도 가끔 오징어 젓갈 먹을 때마다 내가 집사람에게 해 주는 이야기... 으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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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에 대한 두 가지 의견에 부쳐

지젝에 대한 비판에는 어떤 것들이 있냐고 에바님이 물어오셔서 몇 군데 검색을 해봤다. 몇 편의 글들에 대한 서지 정도를 확인해두었는데, 영문 서지인지라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띈 건 다름아닌 내가 3년전에 쓴 것이다. 다시 읽으며 약간의 '시간차'를 느끼게 되지만, '자료'로 치면 무난할 것도 같아서 그냥 옮겨놓는다(지젝에 관해 쓴 자료들을 다 옮겨놓은 줄 알았는데 창고에 없다!).  

인터넷 검색(산책)을 하다가 작년(*2003년) 10월 6일자 이대학보에 실린 '지젝 특집'을 읽게 되었다. 당시 각 대학 학보마다 지젝의 방한을 맞이하여 학술면 특집을 마련했더랬는데, "욕망과 실재로 현대사회를 본다"라는 이 특집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 특집은 "사회를 구하는 환상,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지젝의 작업을 개관하는 기사와 함께, 각각 그의 행동적 지식인으로서의 실천에 대한 지지와 이론적 작업에 대한 비판을 담은 짧은 기고문 두 편으로 구성돼 있다. 내가 제목에서 '두 가지 의견'이라고 한 것은 이 두 기고문을 말한다.

먼저 허윤(국문4)은 자신이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를 열거한다: "그는 학문이 삶과 괴리되지 않음을, 사상이 현실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가다. 이것이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학자는 상아탑에 갇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은 상아탑의 높은 벽을 부수고 두 발을 땅에 붙인 채로 자신의 사상을 펼친다. 개인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으로 여겨졌던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을 현실사회와 연결시키고 현실을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짧은 기고문의 마무리인데, 여기에 그대로 옮긴 이유는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에 나는 그보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우리의 전지구적/인간적 현실에 대해서 발언/비판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내가 작년에 읽은 가장 감동적인 책이다). 지난번 방한 강연회에서의 그의 거친 목소리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복장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바이지만, 그는 이론적/사회비판적 저작들을 계속 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즘의 인물은 아니다. 요컨대 '교수'나 '학자' 타입이 아니라, '활동가'이다.

사실 그가 슬로베이나의 류블랴나 대학에서 맡고 있는 지위도 우리식의 '연구교수' 같은 것이어서 강의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그는 강의로부터 면제돼 있다). 그것은 슬로베니아 당국 혹은 대학권력과의 마찰/불화의 결과이지만, 그는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전화위복으로 삼는다. 우연찮게(우연은 아니다. 그는 대담에서 영화에 대한 관심/열정은 철학보다도 앞선 것이었다고 말하니까) 대중적인 영화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으로 '뜨게' 되었지만, 그의 그러한 '전술'은 사실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낳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건 충분히 훌륭한 '미끼' 역할을 해준 것이니까.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부터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친-지젝파들은 애초에 라캉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갖지 못했거나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대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라캉 이해는 전적으로 자크-알랭 밀레에 기대고 있다. 밀레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지젝도 가능하지 않았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이론가이자 해석가로서 밀레와 구별되는 지점은 이미 언급되었다시피, 그가 '활동가'라는 점에 있다. 물론 그가 활동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라캉의 이론과 독일 관념론 같이 아주 난삽한 '이론'이긴 하지만, 이때의 이론은 이미 실천으로서의 이론이다. "정신이 뼈"라는 헤겔의 문구를 반복하자면, 그에게는 "이론이 곧 실천"이다(반면에 '실천적 이론'이라거나 '이론적 실천'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이론/실천의 이분법적 도식안에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와 작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열정은 '연구'에 바빠서 미처 사회적 '활동'을 할 만한 여가가 없는 책상물림들에겐 충분히 자극적이며 모범이 될 만하다. 그러한 모범에 따른다는 것은 무사안일하게 'mere life'나 'mere study'에 함몰돼 있는 '왜소한' 자신의 삶/학문을 더이상 방치하지 않는 것이며, 지금까지의 습관/관행을 "이건 아니지!"라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어서 진태원(서울대 철학과 강사)은 지젝의 세계적인 유명세("동유럽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주류 철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진단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론'(이건 비교문학쪽 소관이다)과 '철학'(분석철학이나 현상학)을 구분하는 미국 학계의 제도적 특성 때문인데, "더 나아가 이는 지젝의 논의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즉, "지젝은 정교한 논변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다양한 대중문화의 사례들의 제시를 통해 자신의 이론, 곧 라캉의 정신분석을 예증하는 논의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이론의 타당성을 따지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같은과 김상환 교수의 "지젝은 여러 이론들의 활로를 찾는 공을 세웠지만 독자적인 이론가는 아니"라는 평가와도 맥을 같이 한다.

사실, 이러한 평가/비판은 니체의 철학을 무체계적이라고 하여 '문학류'로 취급하거나, 데리다의 철학을 지나치게 수사적(동시에 수행적)이라고 하여 '비철학'으로 간주해버리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에코그라피>를 번역하기도 한 이에게서 이러한 태도를 다시 확인하는 것은 다소 의외이다. 국내 '유일의' 데리다 전문가 김상환 교수의 평 또한 그간에 '데리다'에게 쏟아졌던 단골 비판이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다. 문제는 지젝의 실재가 아니라 지젝의 대가적 명성을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함'이 아닐까?

진태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지젝의 급진적인 사회적 변혁에 관한 주장은 경험과학적 지식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어 논증적 효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데, 이 또한 비판을 위한 비판밖에는 되지 못한다. 최근에 바울이나 레닌에 경도되어 있는 지젝에 따르면, 진정한 행위(act)는 어떤 계획이나 고안에 의해서 성취/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겪어낸다거나 통과한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경험과학적 지식에 의해 뒷받침된 사회변혁의 사례가 과연 있었던가? 지젝의 말대로, '지식'은 사후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의미화하기 위해서 마련되는 것이다. 지젝도 인용하고 있는 영국 사회철학자 존 엘스터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항상 "본질적으로 부산물인 상태"이지, 결코 선행 계획의 결과가 아니다. 지젝이 강조하고 있는 행위에의 결단에 대해서,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식(증거)를 제시하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내보여라, 그럼 신을 믿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신앙은 도약의 문제이다).

평자는 당부의 말로 덧붙인바, "앞으로 '이론가' 지젝의 핵심과제는 라캉 사유의 약점이기도 한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괴리'를 해결하는 것인 듯하다"라고 했는데, 평자가 과연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일치'(이건 상당히 프래그머티스틱한 주장인데)야말로 이론의 목적이자 철학의 지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좀 의심스럽다. 평자가 전공한 스피노자가 과연 그러한 철학자이며, 헤겔이 그러한 철학자이며, 알튀세르가 그러한 철학자인가?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양자역학의 진리(이론)는 전부 넌센스가 될 것이고, 무의식의 진리(앎)를 말하는 정신분석학 또한 잠꼬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사실 지젝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내 경우에, 상당히 역설적이고 급진적인 그의 주장들이 매우 실감있다는 점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아주 리얼한 것이다. 책속의 진리야 말로 지젝이 혐오해 마지 않을 만한 것인데, 지젝의 '이론'을 책속의 진리로만 치부하는 것은 비판으로서도 좀 고약하다...

04. 01. 07/ 07.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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