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그 날

5월 광주, 열여덟 소녀 천재시인을 낳다
청소년 백일장에서 건진 '살아남은 자의 슬픔'
텍스트만보기   홍성식(poet6) 기자   
▲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우리에게 영광이자 상처로 남아있다.

놀랍다. 겨우 열여덟 소녀가 쓴 시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인식의 문학적 형상화로 이야기하자면, 할아버지뻘의 시인 김준태나 큰아버지뻘 작가 박몽구와 이영진 못지않다. 이야기시 즉 '담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선, 1970년 <사상계>에 발표돼 한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김지하 시인의 '오적'에 비견할 만 하다. 뿐이랴, 형식적인 세련미 역시 백석과 소월 김정식에 뒤지지 않는다.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는 항쟁 27주년을 맞이해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공동체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자는 차원에서 백일장을 열었다. 의미가 큰 행사였지만 우려도 없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이 5·18을 알고나 있을까? 그 때 어떤 비극이 이 땅을 휩쓸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잃었는지 관심을 가져줄까'라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기우에 불과했다.

김준태에 떨어지지 않고, 백석에 뒤지지 않는다

백일장 본심 심사를 맡은 시인 정희성(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은 경악했다고 한다. 경기여자고등학교 3학년 정민경(18)양의 시 '그 날'을 만난 것이다.

10일 오후 정희성 시인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정말이지 놀랐다, 항쟁을 겪은 사람도 이렇게는 쓸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어린 학생이…, 당신도 놀라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정민경양의 시를 처음 접할 때의 감동과 가슴 두근거림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있었다.

시력이 40년에 육박하는 원로시인 정희성. 그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학생들 대상 백일장의 심사를 맡으면서는 '맥 빠진 교훈을 되풀이하는 관념적인 글을 재미없어 어떻게 읽어내나'하는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민경양의 등장이 그 예측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정양의 시 '그 날'을 읽은 정희성 시인은 아래와 같은 말로 소녀 천재시인의 탄생을 축하했다.

"대상으로 뽑은 '그 날'은 처음 그 글을 접하는 순간 읽는 이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아넣었다. '그 날'의 현장을 몸 떨리게 재현해놓은 놀라운 솜씨다. 알고 보니 예심부터 심사위원들의 눈을 의심케 할 만큼 뛰어난 글로 지목되었다는 것이다. 자만하지 말고 저력을 길러 대성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산문형식으로 지어진 짤막한 시 '그 날'. 하지만 그 짧은 문장 속엔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살당한 어린 시민군의 슬픈 얼굴,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소시민의 비애,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진압군의 총구, 제 나라 국민에게 등을 돌린 비겁한 언론사들, 여기에 살아남은 자들의 견딜 수 없는 슬픔까지.

브레히트가 울고 갈 천재성, 직접 느끼시라

조금 과장하자면 1930년대 유럽 최고의 리얼리스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울고 갈 정도다. 쓰다 보니 길어졌다. 사실 시는 시 자체로 읽고, 해석하면 된다. 이후에 느낄 감동과 실망은 온전히 시를 읽은 독자의 몫. 아래 정민경양의 시 '그 날' 전문을 올린다.

그리고 하나 더.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는 오는 18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기념식을 연다. 이 자리에선 가수 정태춘과 시인 정호승의 공연 등이 펼쳐질 예정이다. 부대행사로 준비되는 광주항쟁 기획사진전과 초등학생들의 5·18 관련 그림 전시 등도 주목할 만 하다. 물론 정민경양을 비롯한 백일장 수상자 시상식도 이날 함께 열린다.

▲ 초등학생들이 그린 5·18 관련 그림들.
ⓒ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

그 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