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야 : 야 1
묘니 지음, 이기용 옮김 / 메타노블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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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편집 방법이 낯설긴 하지만 가독성이 높은 편임. 드라마의 여백을 촘촘히 채워주는, 작가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1,2권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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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종교사회주의자 폴 틸리히

일요일에 한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폴 틸리히(1886-1965)를 전공하신 분과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저명한 신학자 정도로 알고 있는 내게 덕분에 '지적 거인'이란 이미지 하나가 더 보태졌다. 마침 레디앙에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를 다룬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참고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레디앙(07. 06. 09) 인간소외 극복 사명 띤 두개 공동체, 종교사회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체제만 종교를 인정한다? 어떤 자리에서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펴는 것이 그 나라의 ‘바른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이야기하곤 한다. 내가 목사라는 것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감출 것도 아니기에 나랑 서너 번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예의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될 때 예외 없이 말한다.

목사님이 왜 사회주의를?

“목사님인데... 사회주의에 호의적이신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한 나라가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또 대외적으로 인정되는 ‘체제’가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그 나라에서 펼치는 각종 정책이 ‘사회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 특히 ‘속세 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빈부 격차를 좁히려는 정책들은 ‘사회주의적 정신’에 기초하여 입안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 그들은 다시 말한다.

“어떻든 사회주의국가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잖습니까?” 왼쪽 가슴에 손수건 달고 다닐 때부터 들었던 말이다. 이론적으로 사회주의체제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도 어이없는 말이려니와 자본주의체제가 종교를 인정한다는 말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이다. 세상 어느 ‘체제’가 종교를 인정하나?

주지하는 대로, 이 나라에서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과 ‘미국을 모국으로 삼는 것’을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집회에는 예외 없이 성조기가 등장한다. 미국을 반대하는 것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빨갱이일 수는 없을 터, 그네들 입장에선 당연한 행동일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 신앙은 친미적이어야 하는지(그게 꼭 미국이래서 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특정한 나라를 추종하는 것이 가능한지),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인지 돌이켜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대단한 이론가들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내가 남을 짓밟아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체제,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뒤처지는 체제가 성경의 여러 ‘말씀’들과 맞아 떨어지는지 그 정도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나라에서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유럽에 있는 ‘신앙인’들은 그런 고민을 심각하게 했던 것 같다. 교회를 다닌다면, 성경에 쓰여 있는 ‘말씀’을 믿는다면, 그래서 이 땅을 이끄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삶이 윤택해지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기독교사회주의와 종교사회주의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사회주의’를 떠올린다. 그러나 기독교사회주의와 종교사회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이론이다. 기독교사회주의는 19세기 중엽에 자본주의 사회의 악마적 착취와 그에 따른 위기의 장기화 등을 타개하려고 영국의 킹슬리(Charles Kingsley), 모리스(F.D.Maurice), 루드로(J.N.Ludlow) 등이 주창한 운동이다. 1850년에 ‘기독교사회주의’라 불린 이 운동은 신자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배격하고, 경제적 사회악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기독인의 의무이자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미국, 일본 등으로 번진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며 교회의 신앙 부흥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곧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가난한 자, 눌린 자, 학대받는 자, 약한 자들을 위한 교회의 저항 운동이었으며, ‘전투적 교회’라는 모델을 채택했다. 반면 패배와 절망의 궁지에서 헤매는 자들에게는 적극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 그들을 그 상황에서 구출해 내는 것, 곧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종교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운동이 아니고, 교회와 사회의 벽을 허무는 운동이었다. 교회가 되었든 세계가 되었든 모두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교회와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없으며, 오히려 ‘주권’ 아래에 있다고 인정되는 교회보다 교회 밖, 속세에서 ‘주권’을 더 많이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교회 밖의 여러 ‘운동’, ‘현상’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찾자면 어떤 ‘이론’이 가장 ‘성경적’인지 따지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사회주의는 사회 현상을 유지하려는 보수적 전통교회보다 세계 혁명을 부르짖는 사회주의의 실천적 역동성 속에서 종교적 의의를 찾았다. 그러므로 종교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사회주의자들처럼 마르크스주의를 교회에 반하는 이론으로 생각하지 않고 포용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반종교성이나 무신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더 특별한 하느님의 경륜과 손길이 있다고 믿었다.

종교사회주의의 발흥

자본주의가 전성하던 시대에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목도한 요한 블룸하르트(John Blumhart)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교에서 종교사회주의의 불씨를 지폈고, 그의 아들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t)는 ‘하느님의 사랑’이 교회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종교가 없는 사회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영역이고, 그렇다면 마땅히 사회주의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곳으로 생각했다.(세계의 사회주의자 28-"예수는 사회주의자입니다" 참조) 하느님의 사랑은 그만큼 깊고 넓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당시 유일한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영향으로 나중에 종교사회주의의 지도자가 된 요(Joh), 뮬러(Mueller), 로츠키(Lhotzky), 쿠터(Kutter), 라가츠(Ragaz), 젊은 시절의 칼 바르트(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틸리히(Tillich), 하이만(Heimann), 멘니케(Mennicke), 덴(Dehn) 등이 뒤따랐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사회민주당을 적극 지지했다는 점이다. 라가츠나 쿠터는 사회민주당이 사회 정의에 아무런 관심도 영향력도 없는 기성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가차 없는 채찍질”이라고 했다. 특히 라가츠는 사회주의를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빛”이라고 했다.

물론 이들이 모두 같은 생각과 행동 방식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혹은 정치 일선에 직접 나서기도 했고, 혹은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만 했다. 나중 모습도 모두 같진 않았는데, 라가츠의 경우, 1차대전 이후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운동에 환멸을 느끼고 종교사회주의를 종교적 의미로만 국한했다. 칼 바르트도 후에 “하느님의 의지를 특정한 정치적 지향점과 동일하게 볼 수 없다”면서 종교사회주의를 떠났다.



종교사회주의자 틸리히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1886년 8월 20일 ~ 1965년 10월 22일)는 1918년 독일혁명 이후, 여러 교수들을 규합하여 ‘종교사회주의신문’을 발간하면서 종교사회주의와 관계를 맺었다. 틸리히가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이유는, 첫째, 그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이 있다. 1차대전 중 틸리히는 국민들이 계급적으로 분열되고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상황을 수수방관하며 오히려 지배계급과 결탁하였다. 틸리히는 기성 교회가 무산자의 인권에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였다.

둘째, 그는 1차대전에 참전한 경험으로, 사회주의 혁명만이 제국주의의 ‘계급 분화’를 타파할 것으로 믿었다. 혼돈과 전쟁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부르주아 시대는 가고 프롤레타리아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초월적 메시지와 사회주의 혁명을 연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이 종교사회주의였다. 틸리히는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제2의 카이로스(kairos)’라고 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느 순간에 이르면 하느님 나라의 핵심적인 현시가 역사 안으로 임하는데, 바로 이런 성숙한 시간을 신약에서 ‘시간의 성취’ 곧 카이로스라고 한다. 이 두 번째 카이로스는 새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창조적인 시간이었다. 틸리히는 카이로스라는 개념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진가를 평가하려 했다.

틸리히가 본 마르크스주의

틸리히는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종교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이것만이 부르주아 문화, 사회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틸리히는 사회주의 운동을 외적인 경제적 제도의 변혁이나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그치지 않고 노동자의 자기 소외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운동의 본래적인 사명을 자각시키며 인간소외를 치유하는 처방이었다. 사회주의가 외적 혁명만 아니라 부르주아로 인해 발생한 인간소외, 더 구체적으로 비인간화에 대한 항거로 발생한 것이라면 종교와 반목될 수 없으며 적대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란 인간소외에 대한 해방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겐 종교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 최대의 사명을 띤 공동체”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가 계급이기주의를 강화하고 지나치게 적의를 발산할 때, 종교사회주의는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부도덕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며 공동운명을 개척하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실존이 본래 가져야 할 위치에서 빗나갔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외형은 인간이나 인간으로 누릴 자유가 없는 사물이나 다름없다고 봤다. 곧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사회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생산과 교환이라는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해 노동자들은 ‘인간 상실’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를 두고 틸리히는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이라고 했다.

틸리히는,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유일한 도구인 노동력마저 위협받게 되며 상시적으로 실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불안정’하며, ‘고독’하다고 봤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절망’에 빠져 있다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이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동력의 사유화를 반대하며 생산이 공유되는 사회의 확립을 추구하게 된다.

또 하나의 일치된 지점은 ‘돈’에 대한 입장이다.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결국 인간의 소외가 일어난다는 점에서 틸리히와 마르크스는 일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동력을 파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그로 인해 인간성이 파괴되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점에서 둘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공통점이 있었고, 실제로 틸리히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받은 영향도 크지만 최종 해결점은 차이가 있다.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신률(神律)

틸리히가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던 것은 “인간의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점이었다. 소련에서 시도한 공산세계 건설도 인간을 소외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봤다. 틸리히는 공산주의를 자율에 반하는 타율적 체제로 규정하였고, 그 타율이 절대화되어 인간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을 개탄하였다. 그는 타율적인 ‘제도’, 곧 전체주의, 공산주의로는 인간의 소외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종교사회주의를 통해 인간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봤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사회주의 운동 속에 불어 넣음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자율도 타율도 아닌 ‘신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신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자율의 현상들인 자기 만족성, 개인주의 등이 종적을 감출 것이며, 타율에 의한 비인간화, 물건화(物件化), 도구화 등이 극복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런 이론을 기초로 틸리히는 그런 신률이 지배하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거룩한 공백기론(Sacred Void)'이다. 그러나 그 날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처지를 보면 조만간 그 날이 올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면서 소외되고 착취 받는 사람들에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한다면, 틸리히의 사상이 꽤 중요한 교과서가 될 듯하다.(서민식/ 목사, 대전이주노동자연대 대표)

07.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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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맛살, 사전, 억대 연봉, 그리고 장례식...

80년대 중반이었나, 아버지 따라서 "국제무역전시장"(아직 "코엑스" 아니었다)에서 열리는 중소기업 신제품 박람회인지 뭔지 가서 처음 본 물건 중에 "오양맛살"이란 게 있었다. 지금은 맛살이란 거, 여기저기서 다 내는 모양인데, 하여간 그때는 그것밖에 없었고, 처음에는 별다른 호응이 없다가 수년 뒤부터 갑자기 "맛살 시장"이 생겨났는지 여러 업체에서 경쟁적으로 비슷한 제품을 내놓게 되었다.(그러고보면 그 맛살이란 것, 오양이란 회사의 자체개발품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당시 내가 처음 먹어본 맛으로는 뭔가 오뎅 같지도 않고 햄 같지도 않은 것이 요상야릇했는데, 지금은 김밥부터 샐러드를 비롯해서 이런저런 "간단한 요리"(결코 "복잡한 요리"에 들어가는 법은 없더라)에는 꼭 들어가는 필수 재료가 되었다. 그것 참. 사람들의 입맛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현란한 광고 선전 선동의 결과인지는 모르겠다. 아참, 그때 그 전시장에서 본 신제품 가운데 역시 처음에는 반응이 미미했다가, 수년 뒤에 갑자기 "돌풍"을 일으키며 지금은 집집마다 한 통씩은 다 있는 "필수품" 대열에 끼어든 또 한 가지 물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옥시크린"이었다.(전시장에서 나눠주던 옥시크린 샘플을 어따 쓰는지 몰라 한참 갖고 있다가 버렸다는. 그 당시 그 업계의 지존은 "하이타이"였다. 수퍼타이도 비트도 아닌 오리지날 하이타이...)

네이버 첫화면에 모 중견기업 창업자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소동이니 뭐니 하는 뉴스가 나오기에, 뭔가 싶어 들어가보니 바로 오양수산 창업자인 김 아무개 씨 이야기였다. 창업자 겸 회장이 투병 중에 장남이 부회장으로 경영을 승계한 모양인데, 대주주인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과 갈등이 심했는지, 아직 장례를 마치지도 않은 상황에서 대주주들이 지분을 경쟁업체인 사조산업에 매각했고, 졸지에 경영권이 넘어가게 되자 회사 임직원들이 황당해 하며 일종의 실력저지로 장례식장을 점거했는지 어쩌는지 하는 모양이다. 그것 참... 무슨 기업 드라마나 <시마과장>의 한 대목도 아니고... 하여간 두고두고 이야기될 만한 황당한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유족 측에서는 100억원 대의 주식 매각 대금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다는데, 글쎄, 굳이 그렇게 드라마틱(말 그대로)한 방법까지 취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돌아가신 양반의 장례식장에서도 요란법석을 떨게 만들다니,그것도 좀 망자에 대한 예의는 아닌 것도 같고... 이거 여차 하면 장례절차도 지연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니까, 문득 더운 초여름에 시황제 이야기가 생각나서 좀 오싹하기도 했다. 뭐냐면, 시황제가 지방 순시 도중에 사망했는데, 유언은 장남을 왕으로 삼으라는 것인가 그랬는데, 주위의 권신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얼빵한 차남을 왕으로 삼으려고 일단 왕의 사망 사실을 숨기고 서둘러 수도로 향했는데, 한여름이라 시체 썩는 냄새가 나니까 그걸 숨기기 위해 생선을 잔뜩 사다가 왕이 탄 수레에 함께 싣고 갔다던가, 뭐 그런 황당엽기스러운 일화가 있었다는 거다. 어째 이번 뉴스를 보니 그 일화가 떠오르는지... 어차피 수산물 가공업체로 일가를 이룬 양반의 이야기라서 그런가...

그나저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어느 뉴스의 말미에 고인을 "오양수산 및 법문사 창업주"로 소개한 부분이었다. 오오. 법문사라면 "신판," "개정판," "신정판," "신수판," "삼정판," "개정신판" 등 갖가지 머릿글자를 달고 나오는 온갖 <원론>, <총론>, <개론>, <각론>, <개설>, <총설> 류 대학교재의 산실이 아니던가. 보도에 따르면 고인은 1953년에 법문사를 설립하고, 1966년에 오양수산을 설립했다고 하니. 그럼 나중에 비록 엉뚱한 길(?)로 나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원래는 "출판인"이었다는 뜻인가 싶다. 법문사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이 회사는 세 가지 임프린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학교재 전문 법문사, 사전류 전문 민중서림, 그리고 교과서 팀이었다. 이중 민중서림은 원래 "민중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사전류 전문 출판사가 1973년에 문을 닫자, 그곳에서 내던 책을 인수해서 "민중서림"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출판사를 차린 것이라고 한다. 오오. 또 이런 스토리가 있었다니. 오늘 처음 알았다. 그나저나 민중서림이라고 하면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이 2005년엔가, 한국의 역대 연봉자 가운데 10위권 안에 든 사람이 바로 민중서림 직원이라는 일화였다. 다시 한 번 인터넷을 뒤져보니 2005년 9월의 어느 뉴스에 국정감사 당시 건강보험료 납부액 추정 고액 연봉자 순위에서 김앤장, 삼성전자, 씨티은행의 뒤를 이어 민중서관의 K모씨가 9억여 원으로 5위에 올랐다고 나와 있다. 예전에 처음 그 뉴스를 접할 때에는 어디서 들었는지 "사전 전문 편집자"라고 해서, "오오, 출판사 직원이 억대연봉자라는 꿈 같은 일이..." 하고 무지막지 감탄했는데, 글쎄, 오늘 보니 오양수산 창업자의 차남 김 모씨가 현재 법문사와 민중서림 대표로 있다고 나오는 걸 보니, 혹시 그 고액연봉자 K모씨와 동일인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창업주나 사장은 따로 있고, 정말 연봉 10억씩 받는 고액 편집자가 있는지도 모른다. 내 추측일 뿐이니까.)

하여간 오늘 오양수산-법문사-민중서림의 관계를 알고 보니, 단순히 "사전 출판사가 웬 돈이 그리 많아서 억대 연봉 직원을 둘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도 의문이 어느 정도는 풀리는 느낌이다. 물론 사전이나 교재 출판사는 단행본 출판사와 매출 단위 자체가 다르기도 하겠지만, 뭐, 모기업이 어느 정도 빠방한 곳이면 출판사 치고는 무척이나 안정된 구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오양수산 정도면 아직 대기업 반열에느 못 들어가는지, 뉴스 보도마다 "중견기업" 운운 한다. 도대체 어느 정도기에 중견기업인가 보았더니 연 매출액이 약 1000억원 정도 된다고. 검색해 보니 보통 단행본 출판사 가운데 1등 먹는 민음사가 작년까지인가 연 매출액 400억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하긴 민음사가 200억 매출로 "부동의 1위"를 굳히던 시절, 당시 일반 중소기업 중에서는 유동골뱅이가 200억 매출의 "중소기업"이었다니, 뭐, 이것도 그럴 듯하다. 뭐, 책 팔아서 그 정도 규모로 키웠으니 대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뭐, 맛살 팔아 중견기업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문득 출판계라는 곳, 참으로 아기자기 깜찍발랄 귀여운 규모가 아닌가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출판인 가운데 종종 "외도"(치정이 아니라 사업상의) 하다가 쪽박 차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것 같은데, 다들 "맛살" 대박이라도 노렸던 것일까. 궁금하다.

하여간, 지금 돈 없어 쩔쩔매는 1인 출판사 사장님들도 힘들 내시길... (이 글을 읽고 힘이 날까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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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그 날

5월 광주, 열여덟 소녀 천재시인을 낳다
청소년 백일장에서 건진 '살아남은 자의 슬픔'
텍스트만보기   홍성식(poet6) 기자   
▲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우리에게 영광이자 상처로 남아있다.

놀랍다. 겨우 열여덟 소녀가 쓴 시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인식의 문학적 형상화로 이야기하자면, 할아버지뻘의 시인 김준태나 큰아버지뻘 작가 박몽구와 이영진 못지않다. 이야기시 즉 '담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선, 1970년 <사상계>에 발표돼 한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김지하 시인의 '오적'에 비견할 만 하다. 뿐이랴, 형식적인 세련미 역시 백석과 소월 김정식에 뒤지지 않는다.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는 항쟁 27주년을 맞이해 당시를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공동체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자는 차원에서 백일장을 열었다. 의미가 큰 행사였지만 우려도 없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이 5·18을 알고나 있을까? 그 때 어떤 비극이 이 땅을 휩쓸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잃었는지 관심을 가져줄까'라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기우에 불과했다.

김준태에 떨어지지 않고, 백석에 뒤지지 않는다

백일장 본심 심사를 맡은 시인 정희성(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은 경악했다고 한다. 경기여자고등학교 3학년 정민경(18)양의 시 '그 날'을 만난 것이다.

10일 오후 정희성 시인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정말이지 놀랐다, 항쟁을 겪은 사람도 이렇게는 쓸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어린 학생이…, 당신도 놀라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정민경양의 시를 처음 접할 때의 감동과 가슴 두근거림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있었다.

시력이 40년에 육박하는 원로시인 정희성. 그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학생들 대상 백일장의 심사를 맡으면서는 '맥 빠진 교훈을 되풀이하는 관념적인 글을 재미없어 어떻게 읽어내나'하는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민경양의 등장이 그 예측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정양의 시 '그 날'을 읽은 정희성 시인은 아래와 같은 말로 소녀 천재시인의 탄생을 축하했다.

"대상으로 뽑은 '그 날'은 처음 그 글을 접하는 순간 읽는 이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아넣었다. '그 날'의 현장을 몸 떨리게 재현해놓은 놀라운 솜씨다. 알고 보니 예심부터 심사위원들의 눈을 의심케 할 만큼 뛰어난 글로 지목되었다는 것이다. 자만하지 말고 저력을 길러 대성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산문형식으로 지어진 짤막한 시 '그 날'. 하지만 그 짧은 문장 속엔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살당한 어린 시민군의 슬픈 얼굴,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소시민의 비애,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진압군의 총구, 제 나라 국민에게 등을 돌린 비겁한 언론사들, 여기에 살아남은 자들의 견딜 수 없는 슬픔까지.

브레히트가 울고 갈 천재성, 직접 느끼시라

조금 과장하자면 1930년대 유럽 최고의 리얼리스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울고 갈 정도다. 쓰다 보니 길어졌다. 사실 시는 시 자체로 읽고, 해석하면 된다. 이후에 느낄 감동과 실망은 온전히 시를 읽은 독자의 몫. 아래 정민경양의 시 '그 날' 전문을 올린다.

그리고 하나 더.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는 오는 18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기념식을 연다. 이 자리에선 가수 정태춘과 시인 정호승의 공연 등이 펼쳐질 예정이다. 부대행사로 준비되는 광주항쟁 기획사진전과 초등학생들의 5·18 관련 그림 전시 등도 주목할 만 하다. 물론 정민경양을 비롯한 백일장 수상자 시상식도 이날 함께 열린다.

▲ 초등학생들이 그린 5·18 관련 그림들.
ⓒ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

그 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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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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