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를 옮겨 일상생활에서 양자 효과를 감지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양자가 매우 작아서 그럴까? 바이러스도 작지만, 질병을 일으켜 항상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감기 또는 독감 바이러스는 우리 몸에왔다가 가지만, 양자는 매 순간 영향을 미친다. 손을 들고 바라보라.
본다는 행위는 눈의 망막을 때리는 양자인 광자와 함께 시작하기 때문에, 이 간단한 몸짓에서도 우리는 양자 활동을 했다. 정원과 나무들을 보라. 햇빛의 광자가 이들을 성장시킨다. 미시적인 것이 자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광자의 행동을 감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내재된 메커니즘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박한 실재론의 큰 문제점은 인간의 뇌가 현실의 모습을 전달한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단지 하나의 지각perception일 뿐인 3차원 이미지만을 전달한다. 우리가 방금 다룬 이중 슬릿 실험을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어려움은, 광자가 날아갈 때는 볼 수 없고이들이 사라질 때만 검출된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애초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신경 시스템을 지날 때를 제외하고는 보이게 만들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일단 신경 시스템을 지나게 되면, 빛은 더 이상 자신의 자연스러운 자기가 아니라 신경이 창조한 것이 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면서 정반대로 반응한다면, 이들이 자신의 반응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이 이들을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상태 속으로 들어간다고 모든 단단한 물체가 환영이 되고, 모든 친구가 가상의 인물이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당신이 다른 관점으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의미하며, 자신의 삶을다차원적인 일련의 양자 사건들로 인식하게 됐음을 뜻한다.

당신은 우리가 현실에 대한 가정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는 유일한 동시대 물리학자입니다. 사람들이 정직하면 좋을 텐데…. 대부분은 자신들이 현실을 가지고 만지작거리는 게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고양이의 있음과 없음이 관찰위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진짜로 아무도 없습니다.

단순히 관찰하는 것만으로가 아니라 나타나는 현실 속에 참여하여,
우리 자신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곳에 투영한다. 우리는 허영심 때문에 우리 인간의 특성들을 우주에 주입하면서 자기중심적이 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주에 원래 마음이 내포되어 있어 그런 게 아닐까? 이것이 다음 장에서 풀어야 할 미스터리의 핵심에 놓여 있는 뜨거운 쟁점이다.

자연스럽게, 모든 과학자는 ‘나‘가 있고 개인의 삶이 있다. 하지만물리학과 현대 과학에 의해 발전된 현실에 대한 모델에서는 일반적으로 우주는 제3자 경험이다. 존 아치볼드 휠러가 한 유명한 말처럼, 유리를 깨뜨려야 할 때 두꺼운 유리를 통해 우주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과 같다.

인간 DNA의 이중나선이 수십억 개의 염기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처럼 당혹스러울 정도의 복잡성 뒤에 숨어 무지를 감추는 것도충분히 가능하다. 어떤 물체가 의식이 있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말하는 것은 아주 까다롭다. 전체 우주가 의식이 있다는 말은 의식이 없다는 말만큼 그럴듯하다. 이 논쟁은 물질적 토대에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없다.

"어려운 문제"는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가 공식적으로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마음 - 몸 문제mind-body problem’의 형태로 수 세기 동안 존재했다. 테그마크는 과학의 영원한 동반자인 수학에 의존하여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물리학자들에게 인간 존재는자신의 원자와 분자가 복잡한 방식으로 재배열된 음식 같은 존재라고말했다. "당신이 먹은 것이 당신이다"라는 말은 그대로 진실이다.

정보는 "입자들이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해답이 아니라 문제다. 정보를 더하면 더할수록 온전한 인간의 마음이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카드 묶음에 카드 묶음을 더하기만 해도갑자기 포커 게임이 진행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잭, 퀸, 에이스 모두정보를 전달하지만, 그건 정보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셔터가 열려 있는, 상당히 수동적이며, 기록은 하지만 생각은하지 않는 카메라다. 창문 반대편에서 면도하는 남자와 머리를 다듬는 기모노 입은 여자를 기록한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은 현상되고, 조심스럽게 인화되고, 색상이 입혀질 것이다.

"뇌=마음"은 투 스트라이크를 먹어서 막다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얄궂게도 마음에는 뇌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는 한 뇌 없이는 마음도 존재할 수 없다. 앞에서 다룬, 라디오를 통해서만 음악에 접근할수 있는 상상의 세계와 같이, 우리의 세상도 뇌를 통하는 방식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접근할 수 없다.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비스콧DavidViscott은 회고록에서 수련의 시절 한 병원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환자가 막 숨을 거두는 병실에 들어갔는데, 그 순간 환자의 몸을 떠나는 한 줄기 빛을 본 것이다. 흡사 영혼이나 정신이 떠나는 것 같았다.
그는 이 일로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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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질서를 찾아내고 어디에서 이 패턴들이 왔는지 파악하는 것으로 우주에 참여한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은 진리를 건드렸다. "저는 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세부 사항일 뿐이에요." ‘신의 마음‘을 ‘우주의 목적‘으로 바꾸면 평생추구해볼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시간은 두 얼굴, 즉 하나는 직접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학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객관적인 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문제는 얽혀 있다. 치과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막힌 도로 위에 있어서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은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신은 이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이 실제이고, 개인적인 시간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아니면 시간의 개인적인 측면을 배제하는 건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경험의 세계에서는 모든 시간이 개인적이다. 이 시점에서 급진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조차 들리지만,
우리는 두 번째 입장을 취한다.

사실, 아인슈타인식 민주주의는 참여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안겨주는 더 보편적인 민주주의다. 상수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빛의 속도는 하나의 물체가 얼마나 빨리 시공간을 통해 움직일 수 있는가에 동일한 한계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상수들은 우리를 막고 있는 감옥의 벽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같다. 규칙을 따라야만 체스 미식축구든 마작이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과학은 지나치게 그 규칙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전자기파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 속 어디에서도 속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빛의속도를 어떤 절댓값으로 고정하면 주관적 시간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계산을 해낸다는 쪽에서는 바람직한 성취였다.

시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최선의 답은 인간적인 답human answer임이 밝혀졌다. 빅뱅이 심리적 요소를 갖기 위해서 빅뱅의 순간에 우리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마음과 뇌를 사용하여 인간이 말한 빅뱅 이야기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은 기제가 바로 이 순간에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미스터리는 우리의 눈앞에 존재한다. 인간적인 해답 없이는 이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현실(실재)은 명백히 물리학 이상의 것이다. 양자적인 ‘것들‘을 하나의 물리적 상자 안에다 욱여넣는 짓은 현실과 거리가 먼 짓이다. 그래도 물질적 현실감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 과학자의 DNA에 일부 남아있다. 표준모델의 성공을 들먹이는 과학자들은 남아 있는 간극이 곧채워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우리는 거의 다 왔어요"라는 낙관론을부채질한다. 그러나, ‘물질‘이 진부한 개념임을 받아들인다고 전제하면, 우주에 대한 비물질적 설명은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거의 다 왔다‘와 ‘우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는 의심 없이 전자를 고른다.

자연스럽게 물질주의자 진영은 이 주장에 상당히 강하게 저항한다.
한 세기 동안 이 거대한 다툼은 관찰자 문제라고 알려져 왔다. 무언가를 측정하기 전에, 과학은 먼저 관찰을 해야만 한다. 고전 세계에서는우리 앞에 놓인 것이 올챙이, 토성의 고리, 또는 프리즘을 지나 굴절하는 빛, 혹은 그 무엇이든 그것을 관찰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실험자는 방을 떠날 수 있었고,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문제가 되지않았다. 관찰은 똑같았다.

전적으로 무작위성에 의존하여 우주를 설명하는 과학은 아직 한참부족하다. 지능과 설계는 우주를 매우 신비스럽게 만드는 같은 실뭉치에 얽혀 있기 때문에, 과학의 이성적 활동 내부에는 여전히 논쟁할 것이 많다. 우리는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꼬인 매듭을 풀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감춰진 주제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았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인간 육체에 실마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윌첵은 이런 종류의 사고에 무척 공감한다. "그의 그림은 기하학과 ‘이상적인‘ 인간의 비율 간에 근본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제시한다." 이 아이디어는 우주가 인간의 몸안에 반영되어 있고, 역으로 인간의 몸이 우주에 반영되어 있다는 훨씬 더 오래된 고대의 신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프게도 우리 인간이나 우리 육체는 과학적 연구로부터 그려진 세상의 그림 속에서는돋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무작위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차갑고 텅 빈 진공 속에서 인간 존제가 부차적인 먼지 입자들처럼 하찮게 취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견해를 주장하는 물리학자들의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인간은 창조의 바로 그 직물 속에 엮여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빅뱅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우주‘의 공동 창조자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엮인 이 직물이 어디까지 가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 사실에 부합되는 다른 대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에 부합하는 게 과학의 전부다.

우주의 모든 이론이 하이젠베르크 컷을 따르지는 않지만(예를 들어,
다중우주는 그렇지 않다), 의심의 여지 없이 양자는 우리 감각의 경계 너머에 있다. 우리는 양자를 시각화할 수 없는데,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마주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에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경계 너머에는 모든 것everything과 아무 것도아닌 것nothing이 함께 놓여 있다. 가상 양자 영역은 지금까지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것이다. 또한 물질, 에너지, 시간, 공간,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떻게 창조가 이뤄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이원성을 조화시키는 건 상당히 신비로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중슬릿 실험은 더욱 복잡해지고 흥미로워졌다.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생명선이 측정과 관찰이다. 그어떤 과거의 과학보다도, 폰 노이만이 양자 실체 자체가 심리적 요소를 지녀야만 한다고 믿을 정도니, 관찰자가 측정에 미치는 영향이 방정식 안에 포함된다. 관찰자가 이중슬릿 실험의 결과를 바꾸고 있는건가? 상보성의 두 측면인 파동과 입자는 동시에 관찰될 수 없다.

물휠러의 결론이 맞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물리학자들이 애당초입자들이 파동과 입자 이중성을 갖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말했다. "사실 양자현상은 입자도 파동도 아니다. 관측을 하기 전까지는 물질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2세기 전 영국의 철학자 버클리 주교가 ‘존재하는 건 (인간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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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질서를 찾아내고 어디에서 이 패턴들이 왔는지 파악하는 것으로 우주에 참여한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은 진리를 건드렸다. "저는 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세부 사항일 뿐이에요." ‘신의 마음‘을 ‘우주의 목적‘으로 바꾸면 평생추구해볼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시간은 두 얼굴, 즉 하나는 직접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학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객관적인 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문제는 얽혀 있다. 치과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막힌 도로 위에 있어서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은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신은 이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이 실제이고, 개인적인 시간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아니면 시간의 개인적인 측면을 배제하는 건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경험의 세계에서는 모든 시간이 개인적이다. 이 시점에서 급진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조차 들리지만,
우리는 두 번째 입장을 취한다.

사실, 아인슈타인식 민주주의는 참여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안겨주는 더 보편적인 민주주의다. 상수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빛의 속도는 하나의 물체가 얼마나 빨리 시공간을 통해 움직일 수 있는가에 동일한 한계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상수들은 우리를 막고 있는 감옥의 벽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같다. 규칙을 따라야만 체스 미식축구든 마작이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과학은 지나치게 그 규칙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전자기파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 속 어디에서도 속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빛의속도를 어떤 절댓값으로 고정하면 주관적 시간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계산을 해낸다는 쪽에서는 바람직한 성취였다.

시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최선의 답은 인간적인 답human answer임이 밝혀졌다. 빅뱅이 심리적 요소를 갖기 위해서 빅뱅의 순간에 우리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마음과 뇌를 사용하여 인간이 말한 빅뱅 이야기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은 기제가 바로 이 순간에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미스터리는 우리의 눈앞에 존재한다. 인간적인 해답 없이는 이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현실(실재)은 명백히 물리학 이상의 것이다. 양자적인 ‘것들‘을 하나의 물리적 상자 안에다 욱여넣는 짓은 현실과 거리가 먼 짓이다. 그래도 물질적 현실감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 과학자의 DNA에 일부 남아있다. 표준모델의 성공을 들먹이는 과학자들은 남아 있는 간극이 곧채워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우리는 거의 다 왔어요"라는 낙관론을부채질한다. 그러나, ‘물질‘이 진부한 개념임을 받아들인다고 전제하면, 우주에 대한 비물질적 설명은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거의 다 왔다‘와 ‘우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는 의심 없이 전자를 고른다.

자연스럽게 물질주의자 진영은 이 주장에 상당히 강하게 저항한다.
한 세기 동안 이 거대한 다툼은 관찰자 문제라고 알려져 왔다. 무언가를 측정하기 전에, 과학은 먼저 관찰을 해야만 한다. 고전 세계에서는우리 앞에 놓인 것이 올챙이, 토성의 고리, 또는 프리즘을 지나 굴절하는 빛, 혹은 그 무엇이든 그것을 관찰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실험자는 방을 떠날 수 있었고,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문제가 되지않았다. 관찰은 똑같았다.

전적으로 무작위성에 의존하여 우주를 설명하는 과학은 아직 한참부족하다. 지능과 설계는 우주를 매우 신비스럽게 만드는 같은 실뭉치에 얽혀 있기 때문에, 과학의 이성적 활동 내부에는 여전히 논쟁할 것이 많다. 우리는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꼬인 매듭을 풀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감춰진 주제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았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인간 육체에 실마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윌첵은 이런 종류의 사고에 무척 공감한다. "그의 그림은 기하학과 ‘이상적인‘ 인간의 비율 간에 근본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제시한다." 이 아이디어는 우주가 인간의 몸안에 반영되어 있고, 역으로 인간의 몸이 우주에 반영되어 있다는 훨씬 더 오래된 고대의 신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프게도 우리 인간이나 우리 육체는 과학적 연구로부터 그려진 세상의 그림 속에서는돋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무작위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차갑고 텅 빈 진공 속에서 인간 존제가 부차적인 먼지 입자들처럼 하찮게 취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견해를 주장하는 물리학자들의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인간은 창조의 바로 그 직물 속에 엮여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빅뱅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우주‘의 공동 창조자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엮인 이 직물이 어디까지 가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 사실에 부합되는 다른 대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에 부합하는 게 과학의 전부다.

우주의 모든 이론이 하이젠베르크 컷을 따르지는 않지만(예를 들어,
다중우주는 그렇지 않다), 의심의 여지 없이 양자는 우리 감각의 경계 너머에 있다. 우리는 양자를 시각화할 수 없는데,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마주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에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경계 너머에는 모든 것everything과 아무 것도아닌 것nothing이 함께 놓여 있다. 가상 양자 영역은 지금까지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것이다. 또한 물질, 에너지, 시간, 공간,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떻게 창조가 이뤄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이원성을 조화시키는 건 상당히 신비로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중슬릿 실험은 더욱 복잡해지고 흥미로워졌다.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생명선이 측정과 관찰이다. 그어떤 과거의 과학보다도, 폰 노이만이 양자 실체 자체가 심리적 요소를 지녀야만 한다고 믿을 정도니, 관찰자가 측정에 미치는 영향이 방정식 안에 포함된다. 관찰자가 이중슬릿 실험의 결과를 바꾸고 있는건가? 상보성의 두 측면인 파동과 입자는 동시에 관찰될 수 없다.

물휠러의 결론이 맞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물리학자들이 애당초입자들이 파동과 입자 이중성을 갖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말했다. "사실 양자현상은 입자도 파동도 아니다. 관측을 하기 전까지는 물질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2세기 전 영국의 철학자 버클리 주교가 ‘존재하는 건 (인간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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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문제가 마음속으로 그려지면, 아인슈타인은 똑같이 직관적인답을 찾으려 애썼다. 아인슈타인의 해법이 매력적인 이유는, 특히 우리의 목적에서 매력적인 이유는 상상력이 엄청나게 적용되었다는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자유 낙하하는 사람을 상상했다. 이런경험을 하는 사람은 중력이 없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떨어지는 도중에 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내 가만히 놓으면 사과는 그 사람 옆에 떠 있을 것이다. 또다시 중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이 감각을 속이고 감각이 마음을 속일 수 있다면, 갑자기 현실은 덜 견고해진다. 외부의 현실이 우리가 이동하는 방식이나 우리가어떤 중력장에 놓여 있느냐에 영향을 받는다면 어찌 이 외적 ‘현실‘을믿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등장하기 전의그 누구보다, 어떤 것도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불편한 느낌을 주는 데 기여했다. 시간에 대한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저는 과거와 미래는 정말이지 환영이며, 이 둘은 존재하는 것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인 현재에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보다 파격적인 주장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를 수용하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 불편해했다. 결국,
과거와 미래가 환영임을 받아들이면, 시간의 흐름이 전적으로 사실이라는 가정 위에 작동하는 세상은 붕괴될 것이다.

등호는 ‘같음‘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 에너지는 물질과 같고 물질은에너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오감이 느끼는 모래언덕, 유칼립투스 나무, 빵 조각(물질)과 번개, 무지개, 나침반 바늘을 움직이게하는 자력(에너지)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E=mc는 여러 번에 걸쳐맞다고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이로부터 뒤따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자연을 끝없이 변형되고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E=mc는 핵반응에서처럼 어떻게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되는가라는 질문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중력파는 현대 과학이 놓여 있는 더 큰 상황과는 관련이없다. 중력파는 우리가 현실을 보는 패러다임을 실제로 전환시킬 수도 있는 미제의 미스터리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역할을 할 뿐이다. 우선 첫째로 중력파의 확인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놀라운 것도 돌파구도 아니었다. 중력파는 거의 한 세기나 된 예측을 증명한 것이고,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중력파가 존재하리라고 충분히 예상했다. 우주가새로운 현상을 일으킨 게 아니다.

실험실의 원자는 이상한 것들이다. 무생물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활성채active agent처럼 행동한다. 이들은 양자역학의 법칙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둘 중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모든 원자에는 어느 정도 마음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연chanc과학계에서는 우연이라는 개념이 매우 지배적이어서 물리적 사물과 관련해서 선택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지구를 예로 들어보자. 지구에 존재하는 철처럼 무거운 원소 및 보다 무거운 모든 원소(보통 금속과 우라늄, 플루토늄 같은 방사성 원소들)는초신성supernova 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별이 폭발할 때 생성되었다.

타고르: 우리의 우주가 인간과 조화를 이룰 때, 영원한 존재theeternal, 우리는 이것이 진실임을 알게 되고, 우리는 이를아름다움으로 느끼게 됩니다.

아인슈타인: 그건 우주에 대한 순전히 인간적인 이해입니다.
타고르: 그 외에 다른 이해는 있을 수 없습니다.

타고르: 이 세계는 인간의 세계입니다. .… 우리와 별개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따라 그 현실이 달라지는 상대적 세계입니다.

두 위대한 정신이 나눈 유명한 대화는 이제 거의 잊혔다. 그러나 이대회는 놀라울 정도로 예언적이었다. 우리 인간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인간적 우주가 요즘 크게 다가오니 말이다. 우리가 현실의 창조자라는, 전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더는 공상이 아니다. 결국 믿거나 믿지 않거나 역시 인간의 창조물이다.

가상의 타임머신은 아닐지 몰라도, 창조의 바로 문턱에서 일어나는이 붕괴는 진짜다. 시간을 아무리 잘게 쪼개도 일상적인 방법으로는빅뱅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다.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빅뱅은 우리가 비행하여 도착할 수 있는 어떤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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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를 여는 첫 장면인 저녁 파티는 유난히인물이 많은 소설이 될 작품의 첫 장에서 주요 인물을
‘위치시키는 어려운 기술을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어떤 독자도 지루하고도 하찮은상트페테르부르크 연회에 연이어 도착하는 이들을 한명이라도 잊거나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의강력한 손길로 톨스토이는 모든 인물들을 한데 모아우리 앞에서 행동하게끔 만든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는 소설가가 이 다음으로직면해야 할 질문이다.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는 기술은도입부에서 여러 인물을 제시하는 능력보다 훨씬 더중요하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에서 보잘것없는 한남자의 죽음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우화로만들기 위해 이야기를 충분히 전개했다. 조금 더나아갔더라면 지나친 복잡함과 꼼꼼함이라는빠졌을 테고, 불필요한 세부 묘사로 의미를 퇴색시키고말았을 것이다. 자신의 주제가 요하는 돛의 양에 대해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감각을 지닌 또 다른 작가는모파상이다. 가장 좋은 증거는 「이베트」에 들어 있다. 꽃한 송이가 어떻게 나비 한 마리에 꺾이고 마는지에 관한 끔찍한 기록 말이다.

발자크, 톨스토이, 새커리, 조지 엘리엇과 같은위대한 소설 작가들(끊임없이 그들에게로 돌아간다!)은전부 주제의 비율에 관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위대한주장을 펼치기 위해선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살라티엘 파비(Salathiel Pavy)의 묘비명을 쓴벤 존슨의 시보다 더 아름다운 영어 운문은 거의 없다.
그러나 「실낙원」에는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며, 넉넉한분량으로 쓰였기에 그만큼 위대해졌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건 작업에 돌입할 때부터 자신이 손에 쥔 주제가살라티엘 파비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실낙원』에 관한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깨달음을 주는 사건은 소설가가 지닌 상상력의감수성에 대한 증거일 뿐 아니라 그의 이야기에현재성과 직접성을 부여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도하다. 대화보다는 깨달음을 주는 사건을 적절히 활용했을 때 직접성의 효과가 훨씬 더 크다.

그러나 깨달음을 주는 사건을 선택하는 일은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프랑스인들이말했듯, 방식이 중요하다. 정원 장면에서 스탕달이 보여준 무심하고 직설적인 서술은 모든 단어, 모든 구절이의미 있다. 방식에 관한 질문(각 장면에 적용되는특수한 방식)은 소설가가 결코 방심해선 안 되는 또다른 지점으로 이어진다. 모든 이야기가 고유한 층위를지닌다는 말은 그것만의 방식, 전체 의미를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스타일을 내포한다는 뜻이다.

괴테는 오직 생명의 나무만이 푸르며 모든 이론은회색이라고 선언했다. 생각에 대해 생각한 적 없다"고자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에 대해 생각한 적이없을지언정, 그는 예술에 대해선 매우 많은 생각을했기에, 예술적 실천에 관한 그의 격언은 자칭철학자들보다 더욱 심오하다.

그런데 대륙의 소설가들, 예컨대 톨스토이, 발자크,
플로베르의 소설에서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인물 묘사는 관습 연구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있다. 「루진」에서 투르게네프는 단일한 인물의 묘사로구축된 소설의 꽤나 드문 예를 보여 주었다. 그 반대편에놓인 새뮤얼 버틀러의 만인의 길」은 탁월한 인물 묘사덕에 가족과 사회 집단의 초상화를 그려 냈는데, 우리가발견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관습‘소설 중 하나다.
이러한 서두의 제안들은 피상적이긴 해도, 단순히정의 내리는 것보다는 인물 혹은 상황에 더 무게중심을두는 다양한 소설의 유형을 유념하는 데 도움이 될 수있다.

진정한 상황소설, 즉 보다 압축적이고 무엇보다도더욱 불가피한 사건을 담은 작품은, 최소한영어권에서는 외부 사건들이 뒤얽히는 의미에서의기존 ‘플롯‘ 개념이 진짜 드라마는 영혼의 드라마라는발견으로 변화하고 나서야 형태를 갖추었다. 실제로상황소설은 영어권에선 한 번도 통용된 적 없다. 반면프랑스에선 17~18세기 심리소설로부터 자연스럽게이행한 것으로 보인다. 인물들의 갈등은 도입부부터인물 자체의 묘사를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었고, 주인공은특정 개인이 아닌 특수한 열정의 소유자로 탈바꿈하곤했다.

소설 리뷰의 싸구려 공식들을 버리고 예술의 의미와한계에 관한 보다 명확하고 깊은 표현을 찾고자하는 사려 깊은 비평가라면, 상황소설과 인물(또는관습)소설을 필연적으로 대립적이고 상호인
것으로 말로만 그럴듯하게 정의 내라는 매 분개할것이다. 그 사려 깊은 비평가가 좋을 것이며 사깊은 소설가는 그와 견해를 같이 할 것이다. 거의 모든다양하고 풍부한 위대한 소설들이 두 유형의 소설을하나의 걸작으로 결합해 낼 수 있는 빛나는 가능성을보여 주는데, 그러한 자의적인 구분이, 하나를 다른하나에 대립시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담아내답은 명확하다. 창작 능력이 어느 정도 이상이되면 서로 상충되는 듯 보이는 다양한 방법들이 작가의종합적인 시야 안에서 한데 모이고, 주제에 내재한상황들은 전체적인 구성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완전한 배경 안에서 도드라지게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두고 했던 말처럼, 우리의 질문을따르는 게 아니라 다만 자유로이 쓴 가장 위대한소설가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들의 드넓은시야는 그만큼이나 대단한 구성력의 힘과 결합되어있다. 하지만 많은 소설가들은 창조적인 시야를가졌으나 구성력과 표현력은 부족하거나, 혹은 한 작품내에서 인물을 빚어 가고 상황을 충돌시키는 데 동등한힘을 쏟을 능력이 없다. 언제나 모든 분류를 넘어서는최고의 도구를 지니지 못했기에, 대부분의 소설 작품은상황소설이나 인물소설 둘 중 하나로 분류될 수밖에없으며, 그로써 소설 세계는 갈등 상황 혹은 인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피상적인 비평가들의 이론을 강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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