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질서를 찾아내고 어디에서 이 패턴들이 왔는지 파악하는 것으로 우주에 참여한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은 진리를 건드렸다. "저는 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세부 사항일 뿐이에요." ‘신의 마음‘을 ‘우주의 목적‘으로 바꾸면 평생추구해볼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시간은 두 얼굴, 즉 하나는 직접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학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객관적인 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문제는 얽혀 있다. 치과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막힌 도로 위에 있어서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은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신은 이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이 실제이고, 개인적인 시간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아니면 시간의 개인적인 측면을 배제하는 건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경험의 세계에서는 모든 시간이 개인적이다. 이 시점에서 급진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조차 들리지만, 우리는 두 번째 입장을 취한다.
사실, 아인슈타인식 민주주의는 참여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안겨주는 더 보편적인 민주주의다. 상수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빛의 속도는 하나의 물체가 얼마나 빨리 시공간을 통해 움직일 수 있는가에 동일한 한계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상수들은 우리를 막고 있는 감옥의 벽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같다. 규칙을 따라야만 체스 미식축구든 마작이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과학은 지나치게 그 규칙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전자기파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 속 어디에서도 속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빛의속도를 어떤 절댓값으로 고정하면 주관적 시간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계산을 해낸다는 쪽에서는 바람직한 성취였다.
시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최선의 답은 인간적인 답human answer임이 밝혀졌다. 빅뱅이 심리적 요소를 갖기 위해서 빅뱅의 순간에 우리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마음과 뇌를 사용하여 인간이 말한 빅뱅 이야기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은 기제가 바로 이 순간에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미스터리는 우리의 눈앞에 존재한다. 인간적인 해답 없이는 이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현실(실재)은 명백히 물리학 이상의 것이다. 양자적인 ‘것들‘을 하나의 물리적 상자 안에다 욱여넣는 짓은 현실과 거리가 먼 짓이다. 그래도 물질적 현실감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 과학자의 DNA에 일부 남아있다. 표준모델의 성공을 들먹이는 과학자들은 남아 있는 간극이 곧채워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우리는 거의 다 왔어요"라는 낙관론을부채질한다. 그러나, ‘물질‘이 진부한 개념임을 받아들인다고 전제하면, 우주에 대한 비물질적 설명은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거의 다 왔다‘와 ‘우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는 의심 없이 전자를 고른다.
자연스럽게 물질주의자 진영은 이 주장에 상당히 강하게 저항한다. 한 세기 동안 이 거대한 다툼은 관찰자 문제라고 알려져 왔다. 무언가를 측정하기 전에, 과학은 먼저 관찰을 해야만 한다. 고전 세계에서는우리 앞에 놓인 것이 올챙이, 토성의 고리, 또는 프리즘을 지나 굴절하는 빛, 혹은 그 무엇이든 그것을 관찰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실험자는 방을 떠날 수 있었고,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문제가 되지않았다. 관찰은 똑같았다.
전적으로 무작위성에 의존하여 우주를 설명하는 과학은 아직 한참부족하다. 지능과 설계는 우주를 매우 신비스럽게 만드는 같은 실뭉치에 얽혀 있기 때문에, 과학의 이성적 활동 내부에는 여전히 논쟁할 것이 많다. 우리는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꼬인 매듭을 풀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감춰진 주제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았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인간 육체에 실마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윌첵은 이런 종류의 사고에 무척 공감한다. "그의 그림은 기하학과 ‘이상적인‘ 인간의 비율 간에 근본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제시한다." 이 아이디어는 우주가 인간의 몸안에 반영되어 있고, 역으로 인간의 몸이 우주에 반영되어 있다는 훨씬 더 오래된 고대의 신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프게도 우리 인간이나 우리 육체는 과학적 연구로부터 그려진 세상의 그림 속에서는돋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무작위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차갑고 텅 빈 진공 속에서 인간 존제가 부차적인 먼지 입자들처럼 하찮게 취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견해를 주장하는 물리학자들의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인간은 창조의 바로 그 직물 속에 엮여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빅뱅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우주‘의 공동 창조자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엮인 이 직물이 어디까지 가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 사실에 부합되는 다른 대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에 부합하는 게 과학의 전부다.
우주의 모든 이론이 하이젠베르크 컷을 따르지는 않지만(예를 들어, 다중우주는 그렇지 않다), 의심의 여지 없이 양자는 우리 감각의 경계 너머에 있다. 우리는 양자를 시각화할 수 없는데,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마주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에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경계 너머에는 모든 것everything과 아무 것도아닌 것nothing이 함께 놓여 있다. 가상 양자 영역은 지금까지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것이다. 또한 물질, 에너지, 시간, 공간,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떻게 창조가 이뤄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이원성을 조화시키는 건 상당히 신비로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중슬릿 실험은 더욱 복잡해지고 흥미로워졌다.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생명선이 측정과 관찰이다. 그어떤 과거의 과학보다도, 폰 노이만이 양자 실체 자체가 심리적 요소를 지녀야만 한다고 믿을 정도니, 관찰자가 측정에 미치는 영향이 방정식 안에 포함된다. 관찰자가 이중슬릿 실험의 결과를 바꾸고 있는건가? 상보성의 두 측면인 파동과 입자는 동시에 관찰될 수 없다.
물휠러의 결론이 맞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물리학자들이 애당초입자들이 파동과 입자 이중성을 갖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말했다. "사실 양자현상은 입자도 파동도 아니다. 관측을 하기 전까지는 물질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2세기 전 영국의 철학자 버클리 주교가 ‘존재하는 건 (인간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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