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서서 분자 하나를 계속해서 지켜보면 실제 사건이 일어나는 모습을 관측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리고 그게 역설이다. 관찰자가 계속해서 또는 아주 짧은 간격으로 지켜보게 되면 관찰되는 상태는 절대 붕괴하지 않는다. 날아가는 화살을 작은 시간 단위로 잘라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양자 시스템을 관찰하는 것은 잘게 쪼개진 활동을 더 쪼개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비유를 위해 당신이 웨딩 사진사라고 상상해보자. 당신이 "웃어요"라말하면, 신부는 "카메라가 나를 향해 있으면 웃을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이제 당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카메라를 그녀에게 향하는 한 미소는 없다. 카메라를 치우면 미소 띤 신부의사진을 찍을 수 없다. 이것이 양자 제논 효과의 본질이다.

‘물질 먼저‘ 진영은 지속적인 관찰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을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이들은 신부에게 "카메라가 당신을 향할 때 당신이 웃을 수 없다고 해도 전 상관 안 합니다. 제가 미소를 잡아낼 ㅁ까지 당신에게 카메라를 계속 들이댈 겁니다." 그는 영원히 기다릴 수있다. 양자 제논 효과에도 불구하고 ‘물질 먼저‘ 진영은 기다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양자 제 효과는 우리가 관찰을 고집하는 한 전이가 진행되는 특정 분자를 결코 볼 수 없을 것임을 말한다. 사실 더 많이 관찰할수록, 불안정한 시스템은 더 얼어붙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물질 먼저‘와 ‘마음 먼저‘는 둘 다 ‘현실 먼저‘에 항복해야만 한다. 관찰자는 현실 이외에는 서 있을 곳이 없다. 관찰자는바다를 탈출하려는 물고기와 같다. 물 밖으로 나가면 죽음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인간의 존재 방식은 우주에 참여하는 것이다.

방정식과 이론, 과학 데이터와 결과는 우리와 동떨어진 것이라 말할수도 있지만, 생명은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한다. 살아 있는 것의 가장특이한 점 하나는 이게 어떻게, 그리고 언제 생겨났는지를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어떠한 생명체(감기 바이러스, 티라노사우루스, 나무고사리,
또는 갓난아기)는 다른 생명체에서 태어났다.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
이것은 생명이 처음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려주지 않지만, 죽은 물질에서 살아 있는 물질로의 전이가 어떤 식으로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생화학에서는 이 중요한 전이 순간을 한쪽에서는 무기화학으로, 다른쪽에서는 유기화학으로 설명한다. 유기화학은 생물(유기체)에서만 나타나는 화학으로 정의한다. 소금은 무기물이다. 이는 탄소(생화학 반응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면에 DNA에 의해 다량으로 만들어지는 단백질과 효소는 유기물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생명은 물리학에서 가장 불편한 주제다. 생물학은 추상적인 방정식에 맞지 않는다. 생명을 경험한다는 것이 어떤느낌인지를 염두에 둔다면, 생물학조차 이를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명에는 목적, 의미, 방향, 그리고 목표가 있지만, 유기화학물질은 그렇지 않다. 단백질 사슬이 주변을 둘러보다 생명체와연관된 것들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신빙성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건 마치 뉴잉글랜드 들판에 있는 돌들이 주위를 둘러보다 농부의 울타리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소금은 ‘죽었다‘ 하더라도, 생명은 소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몸 안의 모든 세포에는 필수 화학 성분인 소금이 들어 있다.)

현 상황에서 이런 추측은 과학계에서 상당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표준적인 견해는 우주가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명의 시작에 관한 새로운 모델을 제공하기 전에, 먼저 기존의 사고를 해체해야만 한다. 의식하는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이미 살아 있다. 생명이 생명에서 나온다는 관찰은 우주적 진실임이 밝혀졌다.

미생물이든, 나비든, 코끼리든, 아니면 야자나무, 살아 있는 것이하는 일은 그 구성성분이 하는 일과 같지 않다. 화학물들을 아무리 섞어도 피아노가 음악 작품을 쓸 수는 없다. 인간 몸과 마찬가지로, 피아노의 재료인 나무는 주로 섬유소로 된 유기화학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섬유소에 대한 어떤 것도 비틀즈를 비롯한 다른 가수의 음악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 몸의 화학물질을 이리저리 뒤적거려서는사람이 행하는 어떠한 행동도 설명하지 못한다. 유전학은 불안정한토대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자는 거의 순간적으로 상호 작용한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몸에 존재하면서 파괴적인 과정과 건설적인 과정 모두에 작용하는 ‘자유라디칼free radical‘로 알려진 화학물질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자유라디칼은 양날의 칼이다. 노화와 염증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동시에 상처를 치료하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자유 라디칼이 기본적으로하는 일은 상당히 단순하다. 다른 원자나 분자에서 전자를 훔치는 것이다. 방사선, 흡연, 그리고 다른 환경적 요소나 인체 자체의 자연적인 과정에 노출되기 때문에, 자유 라디칼 자신의 전자 개수는 불안정하다. 면역 시스템은 자유 라디칼을 만들어 침입한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중화하는 방법으로 이들에게서 전자들을 훔친다. 전자 훔치기와 연관된 가장 흔한 원자는 산소다. 산소의 전자 개수가 불안정할때, 산소는 훔칠 수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전자에 달라붙는다. 따라서, 자유라디칼은 반응 속도가 빠르고 보통 수명이 짧다.

생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 정반대의 어울림은 가설이 아니다. 세포 내부에서 몇몇 원자와 분자는 다른 원자와 분자와 결합하여 다양한 일을 하기 위해 자유로워야만 한다. 반면에 이런 일을 완료하려면안정된 물질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원자가 어느쪽을 담당하는가? 정해진 주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건, 가장 중요한 유기화학물질 중 어떤 것, 주로 식물에 있는 엽록소와 붉은 피 동물의 헤모글로빈은 안정 대 불안정의 까다로운 균형을 놀라운 극단까지 유지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생명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납득시키는 것은 간단한 일이아니다. 최초 시작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작게 더 작게 가하는 충동에서 과학자들은 벗어날 수 없다. 가장 오래된 생물은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정도로 작은데, 세포보다 훨씬 작으며, 몇 억 년이지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최근에 이루어진 발견은 지구가 형성되고 고작 10억 년이 지난 35억 년 전부터 이미 복잡한 미생물이 강성했음을 보여준다. 몇몇 미생물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매우 오래된 암석에는 검출 가능한 박테리아 화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게 발견되고 연대를 추정할 때마다, 누군가 이의를 제기한다. 화석(즉생명의 흔적을 보고 있는지 결정체(즉 무생물)의 흔적을 보고 있는지를 구별하기란 극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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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옮겨 일상생활에서 양자 효과를 감지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양자가 매우 작아서 그럴까? 바이러스도 작지만, 질병을 일으켜 항상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감기 또는 독감 바이러스는 우리 몸에왔다가 가지만, 양자는 매 순간 영향을 미친다. 손을 들고 바라보라.
본다는 행위는 눈의 망막을 때리는 양자인 광자와 함께 시작하기 때문에, 이 간단한 몸짓에서도 우리는 양자 활동을 했다. 정원과 나무들을 보라. 햇빛의 광자가 이들을 성장시킨다. 미시적인 것이 자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광자의 행동을 감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내재된 메커니즘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소박한 실재론의 큰 문제점은 인간의 뇌가 현실의 모습을 전달한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단지 하나의 지각perception일 뿐인 3차원 이미지만을 전달한다. 우리가 방금 다룬 이중 슬릿 실험을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어려움은, 광자가 날아갈 때는 볼 수 없고이들이 사라질 때만 검출된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애초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신경 시스템을 지날 때를 제외하고는 보이게 만들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일단 신경 시스템을 지나게 되면, 빛은 더 이상 자신의 자연스러운 자기가 아니라 신경이 창조한 것이 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면서 정반대로 반응한다면, 이들이 자신의 반응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이 이들을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상태 속으로 들어간다고 모든 단단한 물체가 환영이 되고, 모든 친구가 가상의 인물이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당신이 다른 관점으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걸 의미하며, 자신의 삶을다차원적인 일련의 양자 사건들로 인식하게 됐음을 뜻한다.

당신은 우리가 현실에 대한 가정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는 유일한 동시대 물리학자입니다. 사람들이 정직하면 좋을 텐데…. 대부분은 자신들이 현실을 가지고 만지작거리는 게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고양이의 있음과 없음이 관찰위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진짜로 아무도 없습니다.

단순히 관찰하는 것만으로가 아니라 나타나는 현실 속에 참여하여,
우리 자신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곳에 투영한다. 우리는 허영심 때문에 우리 인간의 특성들을 우주에 주입하면서 자기중심적이 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주에 원래 마음이 내포되어 있어 그런 게 아닐까? 이것이 다음 장에서 풀어야 할 미스터리의 핵심에 놓여 있는 뜨거운 쟁점이다.

자연스럽게, 모든 과학자는 ‘나‘가 있고 개인의 삶이 있다. 하지만물리학과 현대 과학에 의해 발전된 현실에 대한 모델에서는 일반적으로 우주는 제3자 경험이다. 존 아치볼드 휠러가 한 유명한 말처럼, 유리를 깨뜨려야 할 때 두꺼운 유리를 통해 우주를 바라보고만 있는 것과 같다.

인간 DNA의 이중나선이 수십억 개의 염기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처럼 당혹스러울 정도의 복잡성 뒤에 숨어 무지를 감추는 것도충분히 가능하다. 어떤 물체가 의식이 있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말하는 것은 아주 까다롭다. 전체 우주가 의식이 있다는 말은 의식이 없다는 말만큼 그럴듯하다. 이 논쟁은 물질적 토대에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없다.

"어려운 문제"는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가 공식적으로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마음 - 몸 문제mind-body problem’의 형태로 수 세기 동안 존재했다. 테그마크는 과학의 영원한 동반자인 수학에 의존하여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물리학자들에게 인간 존재는자신의 원자와 분자가 복잡한 방식으로 재배열된 음식 같은 존재라고말했다. "당신이 먹은 것이 당신이다"라는 말은 그대로 진실이다.

정보는 "입자들이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해답이 아니라 문제다. 정보를 더하면 더할수록 온전한 인간의 마음이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카드 묶음에 카드 묶음을 더하기만 해도갑자기 포커 게임이 진행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잭, 퀸, 에이스 모두정보를 전달하지만, 그건 정보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는 것과는 다르다. 여기에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셔터가 열려 있는, 상당히 수동적이며, 기록은 하지만 생각은하지 않는 카메라다. 창문 반대편에서 면도하는 남자와 머리를 다듬는 기모노 입은 여자를 기록한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은 현상되고, 조심스럽게 인화되고, 색상이 입혀질 것이다.

"뇌=마음"은 투 스트라이크를 먹어서 막다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얄궂게도 마음에는 뇌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는 한 뇌 없이는 마음도 존재할 수 없다. 앞에서 다룬, 라디오를 통해서만 음악에 접근할수 있는 상상의 세계와 같이, 우리의 세상도 뇌를 통하는 방식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접근할 수 없다.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비스콧DavidViscott은 회고록에서 수련의 시절 한 병원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환자가 막 숨을 거두는 병실에 들어갔는데, 그 순간 환자의 몸을 떠나는 한 줄기 빛을 본 것이다. 흡사 영혼이나 정신이 떠나는 것 같았다.
그는 이 일로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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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질서를 찾아내고 어디에서 이 패턴들이 왔는지 파악하는 것으로 우주에 참여한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은 진리를 건드렸다. "저는 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세부 사항일 뿐이에요." ‘신의 마음‘을 ‘우주의 목적‘으로 바꾸면 평생추구해볼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시간은 두 얼굴, 즉 하나는 직접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학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객관적인 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문제는 얽혀 있다. 치과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막힌 도로 위에 있어서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은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신은 이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이 실제이고, 개인적인 시간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아니면 시간의 개인적인 측면을 배제하는 건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경험의 세계에서는 모든 시간이 개인적이다. 이 시점에서 급진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조차 들리지만,
우리는 두 번째 입장을 취한다.

사실, 아인슈타인식 민주주의는 참여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안겨주는 더 보편적인 민주주의다. 상수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빛의 속도는 하나의 물체가 얼마나 빨리 시공간을 통해 움직일 수 있는가에 동일한 한계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상수들은 우리를 막고 있는 감옥의 벽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같다. 규칙을 따라야만 체스 미식축구든 마작이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과학은 지나치게 그 규칙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전자기파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 속 어디에서도 속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빛의속도를 어떤 절댓값으로 고정하면 주관적 시간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계산을 해낸다는 쪽에서는 바람직한 성취였다.

시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최선의 답은 인간적인 답human answer임이 밝혀졌다. 빅뱅이 심리적 요소를 갖기 위해서 빅뱅의 순간에 우리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마음과 뇌를 사용하여 인간이 말한 빅뱅 이야기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은 기제가 바로 이 순간에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미스터리는 우리의 눈앞에 존재한다. 인간적인 해답 없이는 이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현실(실재)은 명백히 물리학 이상의 것이다. 양자적인 ‘것들‘을 하나의 물리적 상자 안에다 욱여넣는 짓은 현실과 거리가 먼 짓이다. 그래도 물질적 현실감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 과학자의 DNA에 일부 남아있다. 표준모델의 성공을 들먹이는 과학자들은 남아 있는 간극이 곧채워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우리는 거의 다 왔어요"라는 낙관론을부채질한다. 그러나, ‘물질‘이 진부한 개념임을 받아들인다고 전제하면, 우주에 대한 비물질적 설명은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거의 다 왔다‘와 ‘우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는 의심 없이 전자를 고른다.

자연스럽게 물질주의자 진영은 이 주장에 상당히 강하게 저항한다.
한 세기 동안 이 거대한 다툼은 관찰자 문제라고 알려져 왔다. 무언가를 측정하기 전에, 과학은 먼저 관찰을 해야만 한다. 고전 세계에서는우리 앞에 놓인 것이 올챙이, 토성의 고리, 또는 프리즘을 지나 굴절하는 빛, 혹은 그 무엇이든 그것을 관찰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실험자는 방을 떠날 수 있었고,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문제가 되지않았다. 관찰은 똑같았다.

전적으로 무작위성에 의존하여 우주를 설명하는 과학은 아직 한참부족하다. 지능과 설계는 우주를 매우 신비스럽게 만드는 같은 실뭉치에 얽혀 있기 때문에, 과학의 이성적 활동 내부에는 여전히 논쟁할 것이 많다. 우리는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꼬인 매듭을 풀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감춰진 주제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았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인간 육체에 실마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윌첵은 이런 종류의 사고에 무척 공감한다. "그의 그림은 기하학과 ‘이상적인‘ 인간의 비율 간에 근본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제시한다." 이 아이디어는 우주가 인간의 몸안에 반영되어 있고, 역으로 인간의 몸이 우주에 반영되어 있다는 훨씬 더 오래된 고대의 신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프게도 우리 인간이나 우리 육체는 과학적 연구로부터 그려진 세상의 그림 속에서는돋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무작위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차갑고 텅 빈 진공 속에서 인간 존제가 부차적인 먼지 입자들처럼 하찮게 취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견해를 주장하는 물리학자들의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인간은 창조의 바로 그 직물 속에 엮여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빅뱅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우주‘의 공동 창조자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엮인 이 직물이 어디까지 가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 사실에 부합되는 다른 대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에 부합하는 게 과학의 전부다.

우주의 모든 이론이 하이젠베르크 컷을 따르지는 않지만(예를 들어,
다중우주는 그렇지 않다), 의심의 여지 없이 양자는 우리 감각의 경계 너머에 있다. 우리는 양자를 시각화할 수 없는데,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마주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에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경계 너머에는 모든 것everything과 아무 것도아닌 것nothing이 함께 놓여 있다. 가상 양자 영역은 지금까지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것이다. 또한 물질, 에너지, 시간, 공간,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떻게 창조가 이뤄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이원성을 조화시키는 건 상당히 신비로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중슬릿 실험은 더욱 복잡해지고 흥미로워졌다.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생명선이 측정과 관찰이다. 그어떤 과거의 과학보다도, 폰 노이만이 양자 실체 자체가 심리적 요소를 지녀야만 한다고 믿을 정도니, 관찰자가 측정에 미치는 영향이 방정식 안에 포함된다. 관찰자가 이중슬릿 실험의 결과를 바꾸고 있는건가? 상보성의 두 측면인 파동과 입자는 동시에 관찰될 수 없다.

물휠러의 결론이 맞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물리학자들이 애당초입자들이 파동과 입자 이중성을 갖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말했다. "사실 양자현상은 입자도 파동도 아니다. 관측을 하기 전까지는 물질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2세기 전 영국의 철학자 버클리 주교가 ‘존재하는 건 (인간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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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질서를 찾아내고 어디에서 이 패턴들이 왔는지 파악하는 것으로 우주에 참여한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깊은 진리를 건드렸다. "저는 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나머지는 그냥 세부 사항일 뿐이에요." ‘신의 마음‘을 ‘우주의 목적‘으로 바꾸면 평생추구해볼 가치가 있는 목표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시간은 두 얼굴, 즉 하나는 직접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학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객관적인 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문제는 얽혀 있다. 치과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막힌 도로 위에 있어서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은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신은 이 문제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이 실제이고, 개인적인 시간은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아니면 시간의 개인적인 측면을 배제하는 건 이론으로만 가능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경험의 세계에서는 모든 시간이 개인적이다. 이 시점에서 급진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조차 들리지만,
우리는 두 번째 입장을 취한다.

사실, 아인슈타인식 민주주의는 참여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안겨주는 더 보편적인 민주주의다. 상수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빛의 속도는 하나의 물체가 얼마나 빨리 시공간을 통해 움직일 수 있는가에 동일한 한계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상수들은 우리를 막고 있는 감옥의 벽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같다. 규칙을 따라야만 체스 미식축구든 마작이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과학은 지나치게 그 규칙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전자기파는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 속 어디에서도 속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빛의속도를 어떤 절댓값으로 고정하면 주관적 시간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계산을 해낸다는 쪽에서는 바람직한 성취였다.

시간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미스터리에 대한 최선의 답은 인간적인 답human answer임이 밝혀졌다. 빅뱅이 심리적 요소를 갖기 위해서 빅뱅의 순간에 우리가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마음과 뇌를 사용하여 인간이 말한 빅뱅 이야기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은 기제가 바로 이 순간에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의 미스터리는 우리의 눈앞에 존재한다. 인간적인 해답 없이는 이것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현실(실재)은 명백히 물리학 이상의 것이다. 양자적인 ‘것들‘을 하나의 물리적 상자 안에다 욱여넣는 짓은 현실과 거리가 먼 짓이다. 그래도 물질적 현실감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 과학자의 DNA에 일부 남아있다. 표준모델의 성공을 들먹이는 과학자들은 남아 있는 간극이 곧채워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우리는 거의 다 왔어요"라는 낙관론을부채질한다. 그러나, ‘물질‘이 진부한 개념임을 받아들인다고 전제하면, 우주에 대한 비물질적 설명은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거의 다 왔다‘와 ‘우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과학자는 의심 없이 전자를 고른다.

자연스럽게 물질주의자 진영은 이 주장에 상당히 강하게 저항한다.
한 세기 동안 이 거대한 다툼은 관찰자 문제라고 알려져 왔다. 무언가를 측정하기 전에, 과학은 먼저 관찰을 해야만 한다. 고전 세계에서는우리 앞에 놓인 것이 올챙이, 토성의 고리, 또는 프리즘을 지나 굴절하는 빛, 혹은 그 무엇이든 그것을 관찰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실험자는 방을 떠날 수 있었고,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문제가 되지않았다. 관찰은 똑같았다.

전적으로 무작위성에 의존하여 우주를 설명하는 과학은 아직 한참부족하다. 지능과 설계는 우주를 매우 신비스럽게 만드는 같은 실뭉치에 얽혀 있기 때문에, 과학의 이성적 활동 내부에는 여전히 논쟁할 것이 많다. 우리는 특정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꼬인 매듭을 풀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몇 가지 감춰진 주제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았지만,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인간 육체에 실마리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윌첵은 이런 종류의 사고에 무척 공감한다. "그의 그림은 기하학과 ‘이상적인‘ 인간의 비율 간에 근본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제시한다." 이 아이디어는 우주가 인간의 몸안에 반영되어 있고, 역으로 인간의 몸이 우주에 반영되어 있다는 훨씬 더 오래된 고대의 신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프게도 우리 인간이나 우리 육체는 과학적 연구로부터 그려진 세상의 그림 속에서는돋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무작위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차갑고 텅 빈 진공 속에서 인간 존제가 부차적인 먼지 입자들처럼 하찮게 취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견해를 주장하는 물리학자들의 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인간은 창조의 바로 그 직물 속에 엮여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빅뱅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우주‘의 공동 창조자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엮인 이 직물이 어디까지 가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이 사실에 부합되는 다른 대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에 부합하는 게 과학의 전부다.

우주의 모든 이론이 하이젠베르크 컷을 따르지는 않지만(예를 들어,
다중우주는 그렇지 않다), 의심의 여지 없이 양자는 우리 감각의 경계 너머에 있다. 우리는 양자를 시각화할 수 없는데,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를 마주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에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경계 너머에는 모든 것everything과 아무 것도아닌 것nothing이 함께 놓여 있다. 가상 양자 영역은 지금까지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것이다. 또한 물질, 에너지, 시간, 공간,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떻게 창조가 이뤄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이원성을 조화시키는 건 상당히 신비로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중슬릿 실험은 더욱 복잡해지고 흥미로워졌다.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생명선이 측정과 관찰이다. 그어떤 과거의 과학보다도, 폰 노이만이 양자 실체 자체가 심리적 요소를 지녀야만 한다고 믿을 정도니, 관찰자가 측정에 미치는 영향이 방정식 안에 포함된다. 관찰자가 이중슬릿 실험의 결과를 바꾸고 있는건가? 상보성의 두 측면인 파동과 입자는 동시에 관찰될 수 없다.

물휠러의 결론이 맞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물리학자들이 애당초입자들이 파동과 입자 이중성을 갖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말했다. "사실 양자현상은 입자도 파동도 아니다. 관측을 하기 전까지는 물질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2세기 전 영국의 철학자 버클리 주교가 ‘존재하는 건 (인간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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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문제가 마음속으로 그려지면, 아인슈타인은 똑같이 직관적인답을 찾으려 애썼다. 아인슈타인의 해법이 매력적인 이유는, 특히 우리의 목적에서 매력적인 이유는 상상력이 엄청나게 적용되었다는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자유 낙하하는 사람을 상상했다. 이런경험을 하는 사람은 중력이 없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떨어지는 도중에 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내 가만히 놓으면 사과는 그 사람 옆에 떠 있을 것이다. 또다시 중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이 감각을 속이고 감각이 마음을 속일 수 있다면, 갑자기 현실은 덜 견고해진다. 외부의 현실이 우리가 이동하는 방식이나 우리가어떤 중력장에 놓여 있느냐에 영향을 받는다면 어찌 이 외적 ‘현실‘을믿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등장하기 전의그 누구보다, 어떤 것도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불편한 느낌을 주는 데 기여했다. 시간에 대한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저는 과거와 미래는 정말이지 환영이며, 이 둘은 존재하는 것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인 현재에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보다 파격적인 주장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를 수용하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 불편해했다. 결국,
과거와 미래가 환영임을 받아들이면, 시간의 흐름이 전적으로 사실이라는 가정 위에 작동하는 세상은 붕괴될 것이다.

등호는 ‘같음‘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 에너지는 물질과 같고 물질은에너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오감이 느끼는 모래언덕, 유칼립투스 나무, 빵 조각(물질)과 번개, 무지개, 나침반 바늘을 움직이게하는 자력(에너지)은 완전히 다른 것이지만, E=mc는 여러 번에 걸쳐맞다고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이로부터 뒤따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자연을 끝없이 변형되고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E=mc는 핵반응에서처럼 어떻게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되는가라는 질문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중력파는 현대 과학이 놓여 있는 더 큰 상황과는 관련이없다. 중력파는 우리가 현실을 보는 패러다임을 실제로 전환시킬 수도 있는 미제의 미스터리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역할을 할 뿐이다. 우선 첫째로 중력파의 확인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놀라운 것도 돌파구도 아니었다. 중력파는 거의 한 세기나 된 예측을 증명한 것이고,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중력파가 존재하리라고 충분히 예상했다. 우주가새로운 현상을 일으킨 게 아니다.

실험실의 원자는 이상한 것들이다. 무생물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활성채active agent처럼 행동한다. 이들은 양자역학의 법칙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둘 중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인다는 점에서 모든 원자에는 어느 정도 마음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연chanc과학계에서는 우연이라는 개념이 매우 지배적이어서 물리적 사물과 관련해서 선택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지구를 예로 들어보자. 지구에 존재하는 철처럼 무거운 원소 및 보다 무거운 모든 원소(보통 금속과 우라늄, 플루토늄 같은 방사성 원소들)는초신성supernova 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별이 폭발할 때 생성되었다.

타고르: 우리의 우주가 인간과 조화를 이룰 때, 영원한 존재theeternal, 우리는 이것이 진실임을 알게 되고, 우리는 이를아름다움으로 느끼게 됩니다.

아인슈타인: 그건 우주에 대한 순전히 인간적인 이해입니다.
타고르: 그 외에 다른 이해는 있을 수 없습니다.

타고르: 이 세계는 인간의 세계입니다. .… 우리와 별개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우리의 의식에 따라 그 현실이 달라지는 상대적 세계입니다.

두 위대한 정신이 나눈 유명한 대화는 이제 거의 잊혔다. 그러나 이대회는 놀라울 정도로 예언적이었다. 우리 인간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인간적 우주가 요즘 크게 다가오니 말이다. 우리가 현실의 창조자라는, 전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더는 공상이 아니다. 결국 믿거나 믿지 않거나 역시 인간의 창조물이다.

가상의 타임머신은 아닐지 몰라도, 창조의 바로 문턱에서 일어나는이 붕괴는 진짜다. 시간을 아무리 잘게 쪼개도 일상적인 방법으로는빅뱅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다.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빅뱅은 우리가 비행하여 도착할 수 있는 어떤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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