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결론을 내보자. 문화 수업은 일반적으로 정규 교과 과정을 따른사람이 교양 많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한 나라와 시대가 정의하는) 사회성을 제대로 갖출 수 있도록, 즉 민족학적인 의미에서 문화에 잘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목적을 지닌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가르침은 근본적으로는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근본적으로 개방적이고 자유롭다. 왜냐하면 문화 변동은 기존의문화를 잘 알고 있고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작품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문화를 전달하기 때문에 이미지보다는 언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이미지보다 더 문화적이고 사회생활에서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심지어 말의 사회보다도 더 오늘날의 이미지 사회에서 그 역할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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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인 요소들은 각각 기표와 기의를 지니고, 촬영된 요소들 또한각각 기표와 기의를 지닌다. 두 종류의 기표와 기의는 영화 내부에서 공존하고 이때 영화는 거대 담화 단위에 해당한다. 그 동질성이라고 한다면 겨우 외형상 나타날 뿐이다. 영화 이외에 다른 표현수단(가령 책)으로이 요소들을 옮겨갈 때 촬영된 의미작용은 그 핵심이 그대로 보존되는 반면, 영화적인 기표와 기의는 다시 회복이 불가능하게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다른 표현수단에서 영화적 기표와 기의에 대응하는 것은단지 부정확하고 매우 느슨한 의미에서 비슷하다고 생각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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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영화 지각 과정에서 심리적 측면의 핵심의 주요 요소는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양 축이 아니라 ‘미완성된 재현‘인가(시각적으로 제공되는 움직임과 청각적인 요소들과 같이) ‘완전한 복제‘인가 하는 두 범주이다. 발라즈가 "소리는 이미지가 없다"라고 주장한그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려면 좀 전에 설명한 내용을 포함한 확장된 범주를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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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리는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적 주장보다는 영화에 더 주목하면서,
에이젠슈테인이 시네아스트로서 실제 작품에 도입한 연상 몽타주에 관한 훌륭한 분석을 제시한다. 몽타주의 요소들을 (가장 일반적인 방식처럼) 디제시스에서 가져오긴 하지만 에이젠슈테인의 경우 이 요소들을그 지각된 맥락에서 분리시켜 서사 전개와 별도로 전달하고자 의도된 의미를 위해 서로 연결한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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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운 개분명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관념이란 항상 실제 만들어진 현상보다한 발 늦는 법이다) 많은 새로운 세대의 시네아스트가 개인적인 창조성을 향한 낭만적인 이상을 품으면서 그들의 재능 덕분에 이미 결실을 맺기도 했다. 바로 영화적 진실다움의 점진적인 쇠락 혹은 쇠퇴 그리고 영화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의 점진적인 확장과 풍요로움(모두 말하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이다. 그들을 끔찍하게 만드는 (그들이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 적군은 진실다움이다. 분명하게 치욕적이라고 간주된 제도적 검열을 통해 그리고 그 검열을 넘어, 말하기와 말해진 것의 은밀한 훼손,
배제와 박탈의 소극적이지만 친숙한 얼굴, 진실다움. 진실다움의 제국은 지금까지 제작된 상당수 영화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다양한 이유에서) 젊은 영화인들이 사랑하는 장르영화까지는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 영화인들은 바로 그 장르영화들에서 영화의 신비한 비밀 무엇인가를 발견했고, 그들이 영감을 얻고 자양분을 얻었던과거 영화들처럼,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영화들처럼 그리고 가끔 그들이 만든 영화처럼 새로운 영화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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