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대개 인생의 쇠퇴가 물질적인 재화에대한 숭배를 조장하고, 물질적 재화에 대한 숭배는 다시 인생의 쇠퇴를 촉진하고, 인생의 쇠퇴 위에서 물질적 재화에대한 숭배가 번창한다. (・・・) 배금주의는 (・・・) 아무런 활력이 없는 획일적인 인격과 의도를 조장하고, 삶의 기쁨을 축소시키고, 공동체 전체를 피로감, 좌절감, 환멸감으로 몰아넣는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조성한다."

사마천은 『사기』 화식전貨殖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가 많으면 그에게 자기를 낮추고, 백 배가 많으면그를 무서워해 꺼리며, 천 배가 많으면 그에게 부림을 받고, 만 배가 많으면 그의 노복이 된다." 사마천이 기원전에 지적했던 현상이21세기 대한민국에도 재현되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가 재벌앞에서 위축되고, 심지어 재벌을 숭배하기까지 하고 있다. 부가 ‘유능‘과 ‘도덕‘의 징표가 되었고, 가난은 ‘무능‘과 ‘게으름‘의 결과로 인식된다.

1987년 6월 항쟁이 이룬 정치적 민주주의는 다시 위기에 처했다. 나는 정치사상가 샹탈 무페Chantal Mouffe가 민주주의에 대한경고로 남긴 글의 진짜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됐다.
"민주주의는 불확실하고 일어날 법하지 않은 어떤 것이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항상 허약한 정복이며, 심화시키는 만큼 방어도 중요하다. 일단 도달하면 그 지속성을 보증할 민주주의의 문턱 같은 것은 없다."

이상과 같은 현상 앞에서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쓴 『유토피아』의 다음과 같은 문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번영을 구가하는 여러 공화국commonwealth에서 내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공화국이라는 이름 아래자신의 이익만을 불려나가는 부자들의 음모뿐입니다. 그들은 사악하게 얻은 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를 가능한 한 헐값에사들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 것을 두고 부자들이 공화국의이름으로 지켜야 하는 것인 양 주장하면 곧 법이 됩니다.

어려운 시절이기에 안토니오 그람시 Antonio Gramsci의 유명한 말을 되새긴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꼽추라는 장애를 가진 채 성장했고, 이후 이탈리아의 대표적 공산주의자로 반파시즘 투쟁에 앞장섰다가 2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약 11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성적 비관"과 "의지적 낙관", 이는 재벌공화국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성이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당한 수의 어용 문사와 말주변 좋은 교수들이 사회주의가 약탈적 동기를 그대로 놓아둔 계획적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쁘다. (…)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사상에 있다. "20

리영희 선생이 공언한 다음과 같은 말씀의 무게는 묵직하다.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 시장경제의 비인간성, 사회적 다윈이즘의 극단 형태인 사회·경제적 약육강식과 그 무자비성, 윤리성을 상실한 과학·기술 만능주의, 자본의 과학·기술 지배구조로 말미암은 인간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공포 등사회주의에 대해서 21세기가 거는 요구와 기대는 19세기나20세기의 소수 국가들에서 보였던 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못지않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어요."

한자로 ‘사회‘와 ‘회사‘는 어순만 다르다. 그러나 두 단어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 ‘사회‘는 민주의 원리가 작동되지만, ‘회사‘는 이윤의 논리가 작동되는 곳이다. ‘회사‘가
‘사회‘ 위에 서면 민주주의는 죽는다. 『대한민국 정의론』이라는 책의 저자 고원 교수의 정확한 지적처럼, 선진국에서 민주주의가 깊이 뿌리내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민주주의가 "정치적 자유의 수준을 넘어서 그 사회 구성원의 실질적 삶에 직결되는 ‘사회권socialright‘의 실현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시켰기 때문"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목수로 평생 일하다가 실직 후 장애급여와 실업급여를 신청하려는데 계속 거절당하는 이야기를 다룬 켄 로치 감독의 2016년 영화「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주인공 블레이크는 법원에 가서 할말을 적어놓는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신대지 않았고 이웃이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독일의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위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는 「말의 권리와 사람의 권리」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19세기 말 노동자의 처지가 동물인 말의 처지보다도 못함을맹렬히 야유한 바 있다. 그는 기득권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진보‘와 ‘문명‘은 임금노동자에게는 가혹하게 굴지 모르지만 두 발 달린 어리석은 족속이 ‘하등‘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준 동물에게는 어머니처럼 인자하기 그지없다."

"사랑과 지식은 나름대로의 범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줬다. 그러나 늘 연민이 날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고통스러운 절규의 메아리들이 내 가슴을 울렸다. 굶주리는아이들, 압제자에게 핍박받는 희생자들, 자식들에게 미운 짐이 되어버린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 외로움과 궁핍과 고통가득한 이 세계 전체가 인간의 삶이 지향해야 할 바를 비웃고 있다. 고통이 덜어지기를 갈망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나 역시 고통받고 있다."
가슴이 답답해질 때마다 버트런드 러셀의 이 글을 찾는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이 세상을 일회용 물품들, 한번쓰고 버리는 물품들-다른 인간들을 포함한 전체 세상까지- 이 가득 담긴 용기처럼 보는 훈련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의해 억압된 ‘호모 엠파티쿠스‘와 ‘호모 심비우스‘를 되살려야 한다. 세상은 공감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타인과 나를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그 고리가 늘어나고 튼튼해지면 세상은 변화한다. 새삼 2002년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주인공이 내뱉은 말이 떠오른다.
"우리, 사람 되기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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