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가에게 정색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것인지 그것조차 나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내겐 사랑에 꼭 필요한 맹목(盲目)이란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막 맹목적이지 못한 사랑이 하나 시작되려 하고 있다. 그러나탐색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선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맹목적이지 못한 사랑의 대가일 것이므로.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비비추 때문에 우리가 ‘그날 오후‘에 도착한 시각은 서산으로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바람은 서늘했고, 노을은 아름다웠다. 가장아름다운 오후 시간에 우리는 제대로 ‘그날 오후‘에 도착한 것이었다. 몇 시 몇 분까지 시내로 들어가 몇 시 몇 분에 시작하는 영화를 봐야 하고 몇 시에 저녁을 먹어야 하는 시간표를 상비하고 다니는 사람들한테는 찾아오기 어려운 우연이었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무더웠던 7월이 지나고 8월이 되자 더위가 한고비 꺾였다. 아직 그럴 때도 아닌데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하기까지 했다. 이상저온 현상이라고 했다. 지난번 폭염도 대단했는데 그때도 기상대는이상고온이라고 설명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다 이상한 것이라는 뜻일 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모처럼 갈치를 탐하는 식성이 아닌 탓에 내가 이모부에게 관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제 설움에 겨운 어머니도 이야기의 처음에는 맹렬히 아버지를비난하고 나섰다. 말하자면 눈물 콧물 닦아가며 아버지가 어떤 일들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설명하는 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이 도화선이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내 아버지의 성토대회에서 가장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사람은 이모였다.

사랑의 배신자를 처벌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꿈속에서도 생각나지 않도록 완벽하게잊어주는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진모는 아마 진모라면 더욱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비둘기의 배신으로 보스에의 꿈이 조금 무의미해졌겠지만, 그 꿈을 충동질해줄 다른 여자가또 나타날 것이 틀림없으므로,

순식간에 벌어진 이 일에 어머니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말았다. 나의 실수였다. 뽀끌래 미장원이란 명칭에 대해 우리 식구는 이미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너무나 오래된 어머니의단골 미장원이어서 지금은 그냥 하나의 이름일 뿐이었는데………….

나는 조용히 이모가 떨어뜨린 숟가락을 주웠다. 이모도 굳었던얼굴을 풀고 새 숟가락을 가져오기 위해 잠시 식탁을 떠났다. 이모가 자리를 비운 사이 주리는 동생을 툭 치며 나무라는 시늉을했다. 주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익숙한 솜씨로 접시에 놓인 나물을 썰었다. 어머니도 더 이상은 주혁에게 젓가락질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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