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아버지는 된장 없이 단 한 끼도먹지 않았고, 해서 우리 집 밥상에는 사시사철 끼니마다 각양각색의 된장국이나 찌개가 올랐다. 말갛게 끓여 각자 입맛대로 매운고춧가루 팍팍 넣어 먹는 동탯국이나 무조림, 무생채, 상추겉절이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였다. 어머니를 모시기 전까지 나는 그게 우리 집안의 식성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는 짐짓 딴청을 부렸다. 내가 귀향한 뒤로 어머니는 늘 그랬다. 나를 고향으로 내려보낸 장본인은큰오빠였다. 어머니 빼닮은 큰오빠는 어머니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없는 집에서 허리도 안 좋은 어머니가 혼자 어찌사시겠냐며 날마다 전화를 걸어 걱정을 늘어놓는 바람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잔소리 많은 것까지 큰오빠는 어머니를 쏙빼닮았다. 오빠 등쌀에 나는 결국 생각지도 않았던 귀향을 하고만 것이었다.
그리 야멸차게 굴었으면서 어머니는 내가 남자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자식 키우고 사는 게 또 안타깝고 안쓰러워 눈물로 날을 지새웠다. 아버지 살아 있을 때는 두 노인네가 수시로 나를 찾아왔다. 온갖 먹을 게 담긴 라면 박스를 두세 개씩 들고. 내려가고 난뒤에는 반드시 전화가 왔다. 싱크대 오른쪽 맨 아래칸 반찬통 뒤져 보그라.
느그들 한창 클 때 잘 멕이도 못흐고 잘 입히도 못한 것이 느그아부시나 나나 평생 한이라 근다. 해준 것도 없음시로 자식들 등쳐 묵고 살아 쓰겄냐.
어머니는 내 앞에서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아들에게 속을 털어놓으며 산 모양이었다. 고슴도치처럼 늘 가시를 세우고 있는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득 내가 아니라 오빠가 내려왔다면 어머니가 사랑채로 옮긴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채와 본채의 거리가 나와 어머니의거리였다. 내가 만든 거리였다.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에게 음식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겨울이면 어머니는 두 시간을 걸어 읍내 장에갔다. 자식들에게 비린 것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동태 한 궤짝을머리에 이고 온 어머니는 펌프가 설치된 수돗가에서 차디찬 물로반나절에 걸쳐 동태를 손질했다. 동지섣달 칼바람이 휘몰아쳐도어머니의 칼질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손질한 동태로 끓인 국은 콩나물국처럼 맑디맑았다. 어머니는 꼬막도 일일이 칫솔로 닦았다. 우리 식구 먹을 양을 하나하나 칫솔로 닦으려면 그 또한 한나절이었다. 어머니 손은 겨우내 발갛게 곱아 있었다.
나가 늘그막에 먼 복잉가 모리겠다. 니가 이리 잘해 먹여서 긍가 아픈 디가 한나도 없어야. 내 평상 첨이랑게. 내가 잘해 먹여서가 아니었다. 아버지 가고 내가 모신 뒤로 속병이 사라진 걸 보면 식성에 맞지 않은 음식이 문제였다. 남달리예민한 사람이 아버지 식성대로 맵고 짠 것만 먹고 살았으니 위장병을 달고 살 수밖에. 나는 어머니 모신 지 몇 달 만에 내 반찬을따로 만들기 시작했다. 엄마 입맛에 맞게 한 음식들이 도무지 당기지 않아서였다.
자식들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분명했다. 심지어 자식들에게조차 그 허물을 애써 덮는 사람이었다. 둘째 고모와 통화하고 나면 어머니는 번번이 소화제를 먹었다. 말을 하지 않으니 알수 없지만 솔직한 둘째 고모가 분명 우리 남매 중 누군가의 흉을봐서일 터였다. 그래서 나는 둘째 고모의 전화가 반갑기도 했지만불안하기도 했다.
마을로 진입하는 길가에 며칠 전부터 벚꽃이 한창이었다. 햇빛화창한 날의 벚꽃도 일품이지만 가는 비에 젖은 벚꽃은 고적하니또 다른 맛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어머니는 비처럼 흩날리는벚꽃 아래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그때의 어머니는 어머니임을잠시 잊은 것처럼 보였다. 오늘도 어머니가 어머니임을 잠시 잊었으면 싶었다.
어머니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웃음이 번졌다. 어머니 머릿속에서 어떤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서울 사는 셋째고모는 부부 싸움만 하면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눌어붙어 어머니 속을 끓이던 셋째 고모는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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