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것이 꼭꼭 숨어 있을수록 그의 허기도 고조됐다. 마침내 허기혼자서 새빨갛게 밤눈을 밝히고 온 집안을 횡행했다. 아내는 자는척을 계속했다. 아내의 자는 척은 고문처럼 비참했다. 아내는 깨어난 욕망 때문에 깨어난 게 부끄러웠고, 남편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깨어난 걸 감춰야 했다. 그러나 허기밖에 안 남은 그에겐 아내의 이런 불쌍한 자는 척조차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복수처럼 간교하게 비쳤다.
다음 날 아침이면 시험테이프는 영락없이 음산한 사신의 미소를보내왔다. 그의 몸뚱이는 그렇게 빤했다. 투명한 시험관처럼 속이들여다보였고 융통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소량인 데다 변화없이 단조로운 식단에도마침내는 길들여져 거의 싫증을 못 느끼게 된 몸뚱이건만 주사 맞는 아픔에 길들여질 줄 몰랐다. 맞을 때마다 매번 새롭게 아팠다. 아픔뿐만이 아니었다. 남의 살이 아닌 자기 살에 손수 주사 바늘을꽂는 일이 매일 아침 되풀이되건만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공포였다. 매번 새롭게 진저리가 쳐졌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아내한테 시키지 않았다. 말이야 식이요법때문에 허구한 날 신경 쓰는 것도 미안한데 그것까지 해달랄 염치가 없다는 거였지만 실은 아내로 하여금 그의 살의 징그러운 감촉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종의 자애였다.
그러니까 큰 뿌리라고 해도 통속적인 백하곤 인연이 먼 거였다. 양반에게 있어서 핏줄 같은 것처럼 남이 믿거나 말거나 자기 속에있다고 믿고 싶고,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서병식의 천박한 호기심은 더더욱 그에게 환멸과도 같은 비애를 안겨줬다.
서병식이 다시 그에게 등을 보였다. 회색빛 제비초리와 홈이 깊은 앙상한 목덜미와 빛 바랜 헐렁한 윗도리 속의 마르고 굽은 어깨와 가뜩이나 헐렁하고 꾸깃꾸깃한 핫바지를 더욱 희극적으로 만드는 심한 안짱다리 걸음을 바라보면서 그는 갑자기 술 생각이 났고 시장기를 느꼈다.
서병식도 싸구려 음식점이 즐비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비로소늙은 친구의 뒷모습을 호젓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그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는 친구의 늙고 고달픈 뒷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슬퍼서 아름다운지 아름다워서 슬픈지 가슴이찐하면서 눈시울마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 끊긴 필름을 잇기 위해선 그 늙은 친구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같았다. 서병식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 친구의 얼굴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 대신 작고 구부정한뒷모습과 꼬리가 왼쪽으로 꼬부라진 회색빛 제비초리만이 여실하게 떠올랐다. 그가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고삐를 놓친 건 어쩌면 서병식을 만나자마자인지도 몰랐다. 그 친구를 보면서 컬컬하고 헛헛해져서 술집으로 갈 때까지 당뇨병에 대한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으니까.
전생에 본 풍경도 이승에서 다시 만나면 짚이는 게 있다는데, 그녀석이 그의 속에 갇혔던 놈이라면 그의 눈을 빌어서 보았을 테니뭔가 짚이는 게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차창 밖의 풍경을 하나도 안놓치고 유심히 내다보았다.
그런 그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서울 변두리 풍경을 빨아들이듯이열심히 내다보면서 그 하나하나에 뭔가를 감시하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그를 깜쪽같이 따돌리고 하룻밤의 자유를 즐기다가돌아와 시치미 딱 떼고 마치 없는 것처럼 구는 녀석에게 이것 보렴. 이것을 보고도 시치밀 뗄래? 하고 들이댈 물적 증거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철문은 웬만한 집 대문에 달린 출입문처럼 외짝인 데다가 낮아서쇠꼬챙이 사이로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플라스틱 판대기로 하늘을 막아버린 이부자리만 한 마당을 향해 방문이 ㄱ자로 세개나 나 있었다. 그 세 개의 방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 열리고 잠옷만 입은 여자, 잠옷 위에 스웨터를 걸친 여자, 내복만 입은 여자가 내다봤다. 대낮인데도 그 꼴을 하고 있고, 아직도 어젯밤의 짙은화장이 더러운 더께가 되어 남아 있는 뻔뻔스러운 얼굴로 봐서 그들이 모두 조미숙이 아니더라도 조미숙과 같은 직업을 가진 여자들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큰 경대와 서랍장을 빼고는 방바닥을 온통 꽃무늬 있는 캐시밀론이불이 차지하고 있어 발 들여놓을 틈도 없었다. 먼저 들어간 여자가 이불을 들쓰다시피 하고 앉으니까 약간의 틈이 생겨 그 사이에그는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가죽방아가 무슨 뜻인지 알아듣자마자 가슴이 울렁거리고눈앞이 몽롱해졌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여자가 거짓말을 시키고 있을 거야. 저런 여자의 말을 어떻게 믿는다. 그렇지만 혹시또 모르지. 녀석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그는 아직도 그의 끊겨달아난 시간을 지배했을 어떤 녀석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가 나타나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만으로 조미숙에게 고문과 같은 고통을 준다는 걸 충분히 알면서도 그는 그런 가학을 즐기고 있었다.
그의 유실은 엄청났고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성남시 쪽을 돌아다보았다. 해태의 글씨는 "안녕히 가십시오" 로 바뀌어 있었다. 안녕, 앞으로 다시는 성남시를 찾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녀석은 탐색하는 일로부터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작은 시험관 속의 현상처럼 빤하지 않다는 게 갑자기 무서워졌다.
집값이 뛸때라 어물어물하다가 동생네 집 날리는 꼴 보게 될까 봐 나 혼자 후끈 달아서 옆 동에 마땅한 집이 나와 나는 즉시 계약을 했다. 동생은잔신경 쓰는 일은 질색인 반면 되레 이사처럼 큰일은 힘 안들이고휘딱 잘도 해치웠다. 한 단지 내에 붙어 살게 되고 동생네가 편해진건 말할 것도 없지만, 나는 더 자주 불려가거나 아이를 떠맡게 되어, 내가 자초한 일에 비명을 올린 적도 부지기수였다.
한참 바쁜 등교 시간에 빨아서 챙겨놓은 중학생 딸의 덧신이 안 보일 때도 그 증상이 왔다. 마치이 세상이 끝장나버릴 것처럼 눈앞의 사물뿐 아니라 머릿속의 생각까지 가물가물 무화돼가는 느낌은 아주 고약했다. 이 세상 마지막느낌이 고작 공포와 절망이라니. 이렇게 내가 뭘 못 찾아 우두망찰을 하고 있는 걸 남편한테 들키면 사정은 더 나빠졌다. 그는 매우 부드럽고 침착하게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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