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째로 봉헌되어버린 도시에서 나는 가난하고 고독했으나 모두가 가난하고 고독한 동네에서 쌀푸대 속의 쌀알 한톨처럼 눈에 띄지 않아서 그것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때 24시간 편의점 하나 없던 왕심리는 하나둘씩주상복합건물이 올라가고 또 뉴타운 광풍의 중심에 있다.
사람 사는 집이 하나하나 스러져 없어지고 호화로운 높은아파트들이 끝도 없이 들어서는 광경은 그 시절 고독을 건드리고 또 울린다.

친구들이 마카롱이어쩌고 레어치즈케이크가 어쩌고 할 때마다 나는 돼지곱창 생각만 했다.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하나를 켜면서 칠면조 통구이를 망상하듯 학자금 대출을 거칠게 갚아내면서곱창골목의 보도블록 한 개마다 곱창 한 점을 꿈꾸었다.

그냥 곧 죽어도 아쉬운 소리만은 입 밖으로 안 나오던 쓸데없이 생피만 선지처럼 철철 뜨거운 시절이었다고밖에 말 못하겠다. 그걸 자존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자존심은 아니었다. 그냥, 피가 끓었다.

형제슈퍼라고 해서 몇 사람의 형제가 있는 건 아니고 다리를 저는 아저씨 한 분이 밤이나낮이나 새벽이나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당시 내가 맘먹고사치하는 날 지르던 맥주 페트병과 ‘숏다리‘ 세 개 정도를어느 시간이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팔아주었다. 그 당시 새로 나온 맥주 페트병은 신기로운 사건이었다. 캔은 비싸고 병은 무거운 데다 다 마시고 난 후 처치곤란이라 괴로워하던 나에게 이 무슨 복음 같은 존재냐며 종종 집에 즐겨 모시곤 했다.

그리고 가끔 조용히 혼자 안부를 궁금해 할 따름이다. 복층에서 눈을 붙이다 맥주를 따라주던 들불사장님을, 비디오 고쳐준 다음 시크하게 천원!
이라고 말하던 한옥집 전파사 아저씨를, 기왓장에 나무대문 달려 있던 그 많은 집들에 살던 사람들을.

생각이 깊어서 직관과 이성을 적절히 사용해 그런 거 사들인다고 위안이 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현명한 사람도 있겠지만나는 항상 뭐든 어마 뜨거라, 하고 다쳐봐야 아는 사람이었다. 남자든 술이든 옷이든 구두든, 다 그랬다. 어쨌거나.

자본주의에 대한 그 불타는 욕망이, 사고 싶다는 욕심이, 예쁜 옷을 사서 예쁘게 입고 싶다는 그불타는 속물스러움이 나를 등 떠밀어 어찌어찌 살아서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 그 예쁜 블라우스가, 원피스가, 스커트가, 코트가, 그것들이 뿌리는 휘황찬란한 광채가 내등을 떠밀고 또 떠밀어 앞으로 계속 나가게 했다. 그렇게해서 소비자본주의는 나를 전진시켰다.

물론 다 덤벼, 하고 기세등등하게 굴어봤자 늘 얻어맞고 지면서살아왔지만, 그래도 살았으니까. 졌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지다 보면 이기고 이기다 보면 지는 거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뚝배기는 잘도 끓고 내 속도 끓고, 어쨌거나.

냉장고 박스만 한 지하 셋방에 앉아 깻잎과 상추에 양념장을 바른마늘 한쪽을 올려놓고 냠냠 씹으면 아아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하는 희망이 야만적으로 솟구쳐올랐다. 왜 그렇게맛있나 했더니, 돼지곱창은 야만의 맛이었던 거였다.

세상은 참고 참고 또 참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것. 왕십리가 결국 내게 가르친 것은 입 다물고 버티는 연습이었다. 다들 그렇게 참고 버티고 견디면서 살고 있었다. 버텨라, 살아라, 그렇게. 그래, 계속 가는 거야. 어디가 됐든 닿긴 닿겠지, 가라.

처음부터 그 동네를 좋아해서 간 것은 아니고 고작해야몇 백만원의 보증금밖에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옥수동 첫 집에는 제대로 된 문도 없어서 미닫이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다녀야 했다. 누군가 가택 침입해 어떤 여자를강간 살해라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집이야말로 그 범죄의 가장 적당한 표적일 거였다.

가을이란게 참 그렇다. 원래 불쌍하기 짝이 없는 계절이었다. 소주를안 좋아하는데도 가을에는 꼭 소주였다. 가을 타는 건 남자라는데 아무래도 내 안에 내장되어 계신 아저씨 한 분이가을을 몹시 타는 모양이었다.

그것밖에 희망이 없었다. 언젠가 기운이 빠져서 이 미친 짓도 못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렇게중얼거렸다. 손에 꽉 쥔 소주병의 녹색 빛은 가끔 에메랄드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아, 내가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그때 뭐라고 대답했어야 했을까. 전혀 모르겠다. 사람이란 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싶은 짓을 당하기도 하고 저지르기도 하고 서로 그런 짓 하는 종자인 것을. 여기서 상처를 주고, 저기서상처를 받고, 그러면서 상처 받은 건 기억하고 내가 준 건잊어버리고, 뭔가 손톱만큼 베푼 건 기억하고 남한테 얻은건 순식간에 까먹고………….

외로워서 미칠 것 같은 밤에 안방에서 창문을 열면한강과 동호대교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던 우리 집.
미칠 것 같은 밤에도 고독을 내려놓을 공간만은 충분했던 우리 집.
그때 나는 젊었고, 피는 지글지글 뜨겁고종종 토할 만큼 외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늘과 극히 가까운 이 집의 높이와 탁월한 일조랑 덕에 허브는 정글처럼 무서운 속도로 자라났다. 밭이아니라 숲을 이룬 그 무시무시한 생장을 바라보며 허브가 원래 화초가 아니라 잡초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심지도 않은 이상한 싹들이 마구 자라났다. 딸이 어떻게 살고 있나 보러 오신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그건내가 씨를 뿌린 적도 없는 나팔꽃이었다. 내 밭에 무단 주거하는 이 망할 놈들은 뭔가 싶어 약이 올라 처음에는 싹보는 대로 마구 뽑아냈지만 나팔꽃은 저년이 왜 저래,
하는 듯 아무리 뽑아대도 끄떡도 안 하고 여기서 싹을 틔우고 또 저기서 싹을 틔웠고 결국 나는 두 손 들고 말았다.
너희가 이겼어, 내가 졌다. 실컷 자라라.

나는 그때까지 검둥이가 짓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워낙 성격이 소탈한 개라 내가 집에 붙어 있을 때 짖었던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근처에 심심할 때마다 짖어대는게를 키우는 집이 있어서 저 개 참 시끄럽네. 하고 생각하고있었기 때문에 분명히 이 아저씨가 우리 검둥이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있다고 확신했다. 마침 회사에서유독 고달픈 시간을 보냈던 날이라 누구든 덤벼라 싸우자다투자 잘 걸렸다. 싶은 날이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뒤돌아 나는아저씨를 향해 꼬리를 흔들고 있는 이를 든 제 말하니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은 어떤지 잘 스산했다.
문을 닫고 아무것도 모른 채 꼬리흔드는 검둥이를 끌어안고 깔아놓은 요 위에 누웠는데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날따라 사는게 잘 쓸쓸했다.

저 집마다 얼마나 많은 개가 짖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화를 내고, 얼마나많은 사람이 싸우거나 사과하고 사과받고 있을까.

미안하다고 한 아저씨는 산더미 같은 잡지 무더기를 끌어안고 몇 번 왔다갔다했고, 나는 1톤 트럭에 타고 그토록많은 고독을 내려놓았던 내 집을 떠났다. 그뒤로 다시는그 집을 볼 수 없었다. 다시 서울에 그런 집 보기 힘들 것이다. 죄다 지나갔다.

날에눈 오거나 날이 추우면 이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죄다 나다니지 않고 집 안에 몇 날이고 틀어박힌다. 혹시나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노인들의 연약한 뼈는 부서지기상이고, 여기서 안 넘어질 수 있는 노인은 없었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경로증 있는 사람들만 죄다 데려가버린 것처럼 추운 날이면 그렇게 동네에 어르신 한 명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얼음이 꽁꽁 얼었던 날, 회사에 출근하는데 높은 계단 위에 할머니 한 분이곧 부러질 것 같은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난간을 꽉 쥔 채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