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해안도로는 깨끗하게 잘 포장되어 있었으며 왼쪽으로새파란 바다와 제주 본섬의 산방산과 한라산까지 보여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탁 트인 바다 풍경을 바라보고 걷는다면 킥보드까지도 필요 없고, 개미가 기어가는 속도로 걸어다녀도 하나도 답답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여름 더위가 채가시지 않은 9월의 뜨거운 뙤약볕이 오른쪽 귀와 어깨에내리꽂혀도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 청량하게만 느껴졌다.

상주 작가들의 자기소개가 모두 끝난 후, 제주문화재단 이사장님과 팀장님, 스태프분들의 환영 인사가 이어졌다. 이들 사이에서 3개월간 살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치 나역시 대단한 예술가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뿌듯한 마음을 한가득 품은 채로 방으로 돌아왔다. (나답지 않게) 청소기로 바닥을 한번 쓴 뒤, 한없이 나답게) 침대에 누웠다. 15킬로그램의 짐을 끌고 서울의 집에서 김포공항, 제주공항을 거쳐 유람선을 타고 가파도까지 오는 여정이 만만치 않았는지 온몸이 무거웠다. 세수를 하고 자야 할 텐데 생각하는 순간, 절로 잠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꿈 없이잔 깊은 잠이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하는두려움도 잠시, 나는 이내 다시 가파도의 파도 소리와 따뜻한 햇살이 주는 평화로움에 빠져들었다. 매일 밤 틀어놨던ASMR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면서도 평온한 파도 소리가 나의 모든 감각기관을 파고들었다. 창문을활짝 여니 9월임에도 더운 바닷바람이 옆구리에 감돌았다.
나는 잠옷으로 입고 있던 민소매 티와 반바지만을 걸친 채레지던시 밖으로 나섰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었고 지하에 지어진 레지던시건물에는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짧게 낮잠을자기로 마음먹었다. 자고 일어나 곧바로 나머지 원고를 고치리라 다짐하며.

가파도에 와서 나는 풍경 사진을 찍는 습관이 생겼다.
매일 아침 동이 트는 아침의 섬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막 피기 시작한 코스모스 꽃밭과 파도의 장관이 너무 절경이라, 도저히 그 아름다움을 기록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을 때의 내가 바깥 풍경에 전혀관심이 없고 언제나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사는 사람이었던 걸 떠올려보면 놀라운 변화였다.

친구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이미 호텔 주차장에 차를세워놓았으니 얼른 내려오라고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바지와 후드 집업을 챙겨 입었다. 무거웠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친구들이 창문을 내린 채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있었다. 스무 살 때부터 봐왔던 내가 잘 아는 그 얼굴들이었다. 대책 없이 긍정적이면서도 언제나 나를 응원해주던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차에 탔다.

"어! 반딧불이다."
숏컷의 여성분이 유리잔을 든 채 옥상을 누비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라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곧 빛나는 벌레를 컵 속에 가두었다. 야광별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반딧불이가 컵 속을 유유히 날아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반딧불이의 모습이었다. 김연수 작가님도 아주 오랜만에 반딧불이를 본다며어릴 적에 심심치 않게 동네에서 볼 수 있는 벌레였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나는 줄리아에게 반딧불이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줄리아는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김연수 작가님은 여느 때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셨다. 줄리아의 옆에 앉아 있던 숏컷 여성분이 자신을 이슬기라고 소개하며 나의 나이를 여쭈어보셨고 나는 (88년생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슬기 작가님의 성함과 인상이뭔가 익숙했다. 줄리아와 불어로 유려하게 대화를 나누는이슬기 작가님을 보다가 나는 문뜩 떠올리고 말았다.

내가 묘사한 작품의 정확히 반대편 전시실에 위치한,
정갈하고 단정했던 작품이 바로 떠올랐다. 엄청난 결례를저지른 것을 깨달은 나는 거듭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슬기 작가님은 괜찮다고, 한꺼번에 네 명이나 전시를 해서 충분히 헷갈릴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뒤통수에 넘실댔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들고 온 제주맥주를 원샷했다. 이슬기작가님께서는 부끄러워하는 나를 배려해서인지 계속 말을걸어주셨다

가파도 사람들은 태풍이 오면 일제히 짐을 싸서 섬 밖으로 나간다. 배가 뜨지 않으면 관광객들이 오지 않고 어업도 할 수 없어 섬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 중 상당수가 서귀포에 별장(?)을 두고 있어 태풍이 올때마다 그곳에 머무른다고 한다. 더불어 가파도의 필수 가전은 ‘노래방 기계‘라고 했다. 거의 모든 가구에 노래방 기계가 보급되어 있으며, 어업이 끝나고 휴농기가 되면 서로의 집에 모여 노래를 부르는 게 유일한 낙이란다. 코로나가오기 전에는 마을회관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윷놀이를 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가파도에 묵는 마지막 주, 나는 매일 산책을 했다.
며칠 만에 공기의 냄새가 바뀌어 있었다. 섬의 식생도바뀌었다. 모르는 꽃과 빛깔이 생겨났다. 억새가 흩날리는방향으로 바람이 불었다. 남쪽 섬이라 가을 겨울이 별로 춥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바람이 제법 찼다. 오히려 서울보다더 추운 것 같기도 해서 신기했다.
많이 쌀쌀하지만 걷기에 좋은 온도였다. 섬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마디도 안 하고 계속 길을 걸었다. 바다만보고 있어도, 사방을 바라보기만 해도 온갖 감정이 피어올랐다. 아쉽고도 후련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몇 번의 물이 더 마르고 또 차올라야 내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가파도에서의 생활이 나에게 자유와 휴식의 동의어가되어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상 어딘가에 이런 형태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가파도를 떠나야 하지만, 때때로 숨이 막히게 힘든일을 마주할 때마다 소란하고도 고독한 이 공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죽을 때까지 나는 이곳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그 밤, 여수 밤바다는 우리가 꿈꾼 풍경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졌음에, 또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오랜만에 감사했다.

그렇게 아련한 첫째 날 밤이 지나고, 나는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거실로 나가보니 조하나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부지런히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하나는 전날 형제상회에서 시켜 먹고 남은 밥과 문어, 삼겹살과 날치알을 소스로 제공된 참기름에볶아 그럴싸한 볶음밥을 만들어놓았다. 그것은 곡기를 끊은수도자마저도 돌아서게 만들 만큼 훌륭한 맛이었다(과장을조금 보태자면 여수에서 먹은 것들 중 가장 맛있었다). 먹다 남은재료로 이토록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M과김종미, 나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역시나 전주 출신조하나의 요리 공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이내 출출해진 우리는 바다김밥에서 사 온 김밥을 집어 먹기 시작했는데 그중 한 종류가 상상 이상으로 매웠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우리지만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타는 혀를 부여잡고 꾸역꾸역 김밥을 다 먹었다.
남해까지 가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산을 둘러만들어진 구불구불한 도로에 숙취를 앓고 있던 우리는 멀미를 호소하며 연신 창문을 열었다 닫고는 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만, 이런찰나의 노력들이 모여 결국 우리 인생을 구성하게 되는 게 아닐까? 나는 지금이 순간의 반짝임이 곧 인생이라고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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