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당일 광주 송정역에 내린 나는 까만 세단 옆에기대서 있는 윤주성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본게 윤주성의 결혼식 날이니(심지어 나는 결혼식 사회를 보기까지 했다) 족히 3년 만에 보는 것이었음에도 윤주성은 전혀달라지지 않았다.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에 구부정한 자세, 눈보다 턱이 먼저 마중 나오는, 내가 아는 윤주성의 모습그대로였다.
, 서로의 삶이 이토록 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 묘하게느껴졌다. 한때 우리의 삶은 같다고 봐도 좋을 만큼 완벽히 겹쳐 있었으니까.
겉보기에 윤주성은 멀쩡해 보였다. 언제나처럼 걸걸한목소리로 자주 웃었고, 쾌활하게 학교를 오갔으며, 때문에크게 낙담한 것 같지 않았으나 나는 윤주성이 매우 절망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낙원일 리 없었다. 한 학기라는 시간은 이상의 공간이라고 여겼던 ‘서울‘이 실은 내가 살던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다. 대학 생활 역시 아름답지 않았다. 당시 부쩍 어려워진 가정 형편 탓에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곧바로 등교를 했으며, 수업이 끝나면 분당이나 평촌, 강남의 아파트단지에 과외를 하러갔다. 유럽산 그릇이 장식되어 있고 좋은 향기가 나는 과외 학생의집에서 나와 쿰쿰한 냄새가 나고 벽지가 울어 있는 나의반지하 방에 도착하면 밤늦은 시간이었다. 지면보다 낮은곳에 위치한 반지하 창문을 열면 가로등 불빛이 내 방으로새어 들어왔다.
나는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고 충동적으로 대학을 그만뒀다. 그리고 아빠가 등록금 내라고 힘들게 마련해주신돈을 몰래 빼돌렸다. 알바에 과외를 하며번쌈짓돈을 모아 미국행 티켓을 샀다. 아무런 대책도 그럴듯한 계획도 없었다. 10대의 내가 서울이라는 낙원을 꿈꾸었듯, 스무 살의나는 뉴욕이라는 꿈의 도시를 그저 낙원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순전히 윤주성만을 믿은 채 말이다.
트리는 푸른 색조의전구가 둘러져 있었으며 자본주의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듯 온갖 휘황찬란한 오너먼트가 달려 있었다. 우리는돈이 없어 아이스링크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인파를뚫고 들어가 살면서 본 가장 큰 트리 앞에서 캐논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근처에 관광객이 너무 많아 내 얼굴이 어딨는지 분간하기도 힘든 사진이 찍혔다. 우리는 카메라 화면에 뜬 사진을 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힘겹게 닿은 몬토크의 바닷가.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고 눈은 한 톨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메마른 목초지에 해변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연실색할 만큼 파란 바다 앞에서, 세상의 온갖 빛이 다 비추고 있는 것 같은 선명한 빛깔 앞에서 스무 해를살며 앓아온 모든 시름이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같은 추위를 느꼈다.) 윤주성 역시 나와 마찬가지였는지 이전에 본 적 없던 환희에 찬 표정으로 ‘좋다‘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
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해 한국의 정권이 교체되었고, 그 유명한 월스트리트발 세계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층간 소음 때문에 자주 우리 방문을 두드렸던 컬럼비아대학 경제학과에 다니던 남자는 대공황에 맞먹을 만큼 세계경제가 휘청일 거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1달러당 950원이었던 환율이 1,400원까지 치솟았다. 결국, 나와 윤주성은 강제로 한국에 송환되었다.
연병장에 서서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걸어가고 있는내게 손을 흔들어주던 윤주성의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고개를 돌리면 언제고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그장난기 어린 얼굴을 말이다
우리는 각자 인생 주기에 맞춰 몇 번 마주치고 가끔은 절망하기도 하며 살아왔다. 윤주성은 대학을 졸업한뒤 서울과 경기도, 대구 등지의 여러 병원에서 일했고, 우리는 1년에 한두 번씩 만나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만날 때마다 매번 예열도 없이 바로 전투 수다에 돌입해, 어제 만난 것 같은 사이란 게 어떤 것인지 몸소 증명하고는 했다.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글을 써서 돈을 벌 수만 있으면 되는 삶. 그것이 스무 살의 내가 간절히 꿈꾸던 삶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꿈꿔왔던 미래에 당도해 있다는 것을, 윤주성의 말로 인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감정에 가슴이 울렁였다. 마치 오래전의 내가 오늘의 내게작고 반짝이는 돌멩이 하나를 던져놓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주성은 발톱을 깎아줄 고양이들과중성화를 시킬 강아지들이 수십 마리라며 퇴근 시간이 오기 전에 병원에 들러야 한다고 부지런을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떡갈비 중 가장 무거운 한 덩이를 내게 떠안기듯 건네고는, 홀연히 차를 몰고 사라졌다. 나는 고소한 떡갈비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봉지를 쥔 채 강연장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광주(光州)는 빛이 고이는 마을이라는 의미다. 빛이 고이는 마을이라. 그 말을 읽는 순간 처음으로 광주라는 도시가 윤주성과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터널 선샤인>을 좋아하는 사람, 때때로 마른 입술에 촉촉함을 더해주던 사람, 추억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잊고 있던 사소한 추억까지 간직해 반짝이는 모습 그대로 상대에게 전해주는 사람. 그러니까 언제나 밝은 빛을 뿜어내는 사람. 윤주성과 내가 보내온 그 찬란한 시절이 낯선도시에 찰방찰방 고여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을 멈추라니, 의사 선생님의 말이 마치 모르는 외국어처럼 들렸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못 하는 게 있다면생각을 멈추는 일일 거다. 나는 침대에 그저 가만히 누워있기를 곧잘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동안에도 무언가를 계속 생각한다. 대개는 오늘 저녁, 내일, 모레, 먼 미래에 내가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하다못해 저녁 메뉴라도 고민한다. 그런 내게 생각을 멈추고 완벽하게 휴식하라는 것은 마치 주식투자로 만 원을 100억으로 만들라는 것만큼이나아득하고 말도 안 되는 과제처럼 느껴졌다.
제주도에서도 배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 인구 300명이채 넘지 않는 외딴섬. 오후 4시면 배가 끊기고, 24시간 편의점도 마땅한 배달 음식도 없고, 노래방도, 밤늦게 운영하는 술집도 없는 그곳만큼 휴식에 적절한 곳이 있을까?
이후 보름가량의 기다림 끝에 가파도 레지던시로부터소식이 날아들었다. 다음 계절부터 레지던시에 기거할 수있다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두 달 뒤, 레지던시가 수리 및보수에 들어가 내년으로 입주 기간이 변경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쉬웠지만 그럴 수도 있지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의 다른 모든 계획처럼 출간 일정도 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늘어난 집필 기간과 출판사의 사정에의해 출간 일정은 한도 끝도 없이 밀려나버렸다.
못 가봤어, 못 가봤다고! 도대체 몇 번을 말해?" 나는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창밖으로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거짓말처럼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고, 이 모든 풍경이 왠지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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