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품을 다시 배낭에 챙겨 넣으면서 나는 이번 계제에내 단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는 것은 큰 단점이라고 급박한 상황에서는 쥘리처럼 몸을 떨고 비명을 지르며 우는 게 상식인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줄 리가 있나.
침낭에서 몸을 뺀 뒤 눈을 끔뻑이며 텐트 밖으로 나갔다. 친구들이 둘러서서 구경거리 대하듯 나를 쳐다봤다. 간밤에 일행 중 유일하게 나만 잠을 잤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자초지종을 들려주고 돌아가는 생명의 은인의 뒷모습을보며 생각했다. 죽음은 이렇게 불시에 찾아오는 거구나.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서 눈을 감았다. 삶의 매 순간을값어치 있게 쓰기로 결심했다.
엄마는 나를 데려가는 곳 어디에서든 종이와 크레용을갖다 달라고 했다. 내가 종이에 아무렇게나 끼적거려 놓으면 엄마는 대단한 벽화 작품이라도 되는 양 모아뒀다가 사람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솔직히 그림에 큰 소질은 없었지만, 매일같이 그리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규칙적으로 반복하다 보니 그림이 주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
나는 시를 암송할 줄도 세계 각국의 수도와 유명한 강의이름,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의 날짜를 기억할 줄도 모르는아이였다. 그때부터 이미 모자란 기억력을 상상력으로 대체하려 했던 것 같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무조건 그림으로 그려 놓거나 상세한 디테일까지 적어 놓곤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생각이 솟구치는 순간 사라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조립품에 화룡점정 격인 장치를 하나 추가했다.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던 폴사바티에 대학교 쓰레기장에서여전히 작동하는 레이저 빔 프로젝터를 주워 와 부착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레이저 불빛이 폴리스티렌에 닿으면서연기를 내는 광경은 또래 친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1
해변으로 휴가를 가면 가족 중 유일하게 아버지만 빨간색 부표들을 지나 멀리까지 헤엄쳐 나가곤 했다. 내 눈에아버지는 한계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바다를 헤엄쳐 다른 대륙으로 건너갈 기세였다. 아버지를 보면서 어린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멀리 나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우리가 속한 정상 세계를 비틀어 바라보는 『단추 전쟁』의 시각이 은연중에 ‘개미」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그 이야기 속 아이들은 어른의 눈높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낮은 세계, 일종의 평행 세계에 살았던 셈이니까.
벼룩의 추억은 인간의 발에서 출발해 머리 꼭대기에도달하는 대장정을 벼룩의 일인칭 시점으로 쓴 이야기다. 양말을 빠져나온 벼룩은 장딴지 털을 헤치고 기어오르면서바지 속 세상을 만난다. 배꼽 우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지만 가까스로 빠져나와 셔츠 속 세상을 주유한다. 길을 잃고헤매다 귓바퀴에 빠진 벼룩은 탈출하다가 거대한 새끼손가락의 공격을 받는다. 압사 직전 가까스로 살아남지만 손가락 부대에 추격당하고 만다. 적들은 주변을 긁어 대며 거리를 좁혀 온다. 천운으로 살아나 마침내 머리 꼭대기에 이른벼룩은 머리카락 정글 속에서 헤매다 야생 머릿니 부족과조우한다. 그는 환한 빛이 비치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군지,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
강직 척추염을 앓는 환자들이 몸을 수직으로 세운 채 잘수 있는 해먹 침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장에고리를 걸어 해먹을 고정해 놓고 머리는 위로, 발은 아래로향하게 한 상태에서 잠을 자는 침대라고 했다. 머리가 위로향하는 것만 다를 뿐 박쥐처럼 매달려 자는 것은 매일반인셈이었다. 물론 달가운 자세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악은 아니라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쓰기 시작한때가 바로 그 무렵이다. 나는 미셸 비달이 들려주는 얘기들을 두꺼운 노트 한 권에 빠짐없이 적었다. 꼭 기억하고 싶은 신기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고등학교를 과학 계열로 진학하기를 희망했던 내가 매우중요한 시험을 앞두자 걱정이 되었는지, 부모님이 수학 과외를 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험 준비를 위해 만난과외 선생님 덕분에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과목에 뜻밖의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과학자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것 같던 수학이 역설적이게도 개미와 천문학에 이어 새로운 열정의 대상이 되었다.
그사이 현실의 삶은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물에 빠졌을 때 밑바닥까지 가라앉아야 비로소 바닥을차고 위로 솟구칠 에너지가 생기는 걸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등학교 과학 계열 진학에 실패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직 척추염까지 재발해 몸이 마비되었던 그해에 내 삶의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준 인물을 만나게되었다.
가부좌를 튼 자크가 눈을 감았다. 어깨를 펴고 등을 꼿꼿이 세운 상태에서 배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호흡이 점차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모기가 눈꺼풀에 내려와 앉는데도 아무런 요동을 하지 않는걸 보고 나는 그가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고 확신했다. 그의 몸은 마치 물건 같아서 속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느껴졌다.
자크의 차분함은 전염성이 강했다. 그와 함께 있다 보니나 또한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크는 모든 동작을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가령음식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먼저 냄새 맡기. 오랫동안 천천히 씹으면서 맛을 음미하기. 소화 기관을 타고 내려가는음식의 움직임을 느껴 보기. 몸속으로 들어온 공기가 폐를부풀리고 콧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는 과정을 세심하게 지각하기. 발이 땅에 닿을 때의 감촉을 느끼며 걷기. 하나의 대상에 시선을 집중해 보기. 미술 작품을 감상하듯 주변 세계를 바라보기. 사물을 대할 때 경중과 가치를 따지거나 비교하지 말고 세계라는 작품의 구성 요소로 받아들이며 온전히 그것의 형태와 특징을 음미하기
정말로 그동안 갇혀 있던 육신의 껍데기에서 정신이 서서히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나비가 고치를 벗듯이〈바깥의 나〉는 가벼웠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았다. 나는 밖에서, 그리고 위에서 나를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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