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제 무르익은 가을의 한중간, 지상의 식물들은 그 둥근완성을 위하여 보이지 않게 땀흘릴 것이고, 이름 없는 무수한 풀과 나무도 머잖아 저마다의 크고 작은 그해의 열매들을 떨굴 것이고, 그리고 한 해의 시간 자체가 커다란 둥근열매로 익어 마악 떨어지려 하는 것 같다. (1985)
밤마다 그토록 울어대던 풀벌레 울음소리도 알지 못하는새 끊겨버리고, 아침 출근길에 느닷없이 낙엽들이 발목을휘감고, 바람소리가 차츰 드세지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무슨 깨달음처럼, 캘린더의 마지막 남은 한 장이 의식 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가을에서 겨울로, 그리고 한 해의 끝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해마다 그러하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죽음을 보고 겪게 되고, 그리고그때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점검하게 된다. 나 역시 앞으로 더 많은 죽음을 보면서 나 자신의 삶을 수시로 되돌아보게 되리라. 마침내 내가 나 자신의 죽음을 보게될 때까지. (1986)
또 한 해가 간다.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의 해, 누군가에게는 고통이었을지도 모를 한 해가 마침내 끝나려 하고 있다. 모든 이가 저 넉넉한 자연의 품에 안겨 대지의 핏줄과 하나로 얽혀 살았던 옛날에는 자연의 시간, 자연의 리듬이라는 게 있었다. 봄에는 만물이 소생하여 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힘껏 수액을 빨아올려 스스로를 푸르게 살찌우고, 가을이 되면 저마다의 행복한 열매를 맺고, 이윽고 이울기 시작한다.
잊어버리기에 지쳐, 마침내 몸과 마음이 쓰러져 누울 때, 그때 고요히 떠오르는 질문들이 있다. ‘나의 삶이 이래도 될까?‘ 하는 질문들이. 그때야말로 그 한 해의 삶의 의미를, 삶의 결실을 거둘 때이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그야말로 뿌린 대로 거둘 때이다. 한 해의 끝에서 녹초가 된 몸, 녹초가 된 정신과 더불어고요히 떠오를 그러한 질문에 합당한 만족스러운 대답을찾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나 또 한 해를 새로이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986)
그들은 확실하게 돌아오기 위해, 그것도 미래의 풍요로움을 갖고 돌아오기 위해 사막의 나라로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막의 신기루를 좇아 떠난 것이 아니라, 확실한꿈, 몇 년 뒤에는 자신의 손에 쥘 수 있는 실체가 되어 나타날 꿈을 좇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이 어느 날 우리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바로 그때,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더욱 어여쁘게 살아오른다. 마치 벽 그자체처럼익숙해져버린 벽에 걸린 그림이 어느 날 갑자기 치워졌을때 그 사라진 부재의 자리가 벽 그 자체보다 더욱 또렷하게드러나듯, 그렇게 잠시 멀리 떠난 이들은 비어서 더욱 또렷한 모습을, 비어서 더욱 빛나는 자취를 이룰 것이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날 문득, 그들이 돌아와 그 부재의 자리를 다시 채울 때까지. (1986)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내가 종래 읽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종류의 어떤 순수한 감동을 안겨주었고 또한 분명하게 말할수는 없지만 후일의 내게 모종의 영향을 주었음직한 한 책과 만나게 되었다. 그날 나는 다락에 올라가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낡은 책 한권이나왔다. 표지가 떨어져나가, 제목도 작가도 알 수 없는 책이었다(나중에 성인이 되어 어느 분과 이야기를 하다 그 책이정비석의 『산유화』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물론, 나 자신이 그것을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기에 정말 그런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현관은 도시를 향해 있고 베란다는 시골 자연을 향해 트여 있는 집이다. 전형적인 시골 풍경은 아니지만, 낮은 산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아래 논과 밭이다소곳하게 엎드려 있으며, 소나무 언덕이 있고, 그 풍경의한쪽 가장자리에 집들이 여유 있게 들어서 있다.
늘 푸른 소나무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모든 나무들이 헐벗은 상태이고 논과 밭도 여전히 맨땅을 드러내 보이고 있지만, 때가 되면 언제나 내 마음을 아늑하게 가라앉혀주는 푸르른 것들이 내 시야 안에서 활짝 피어나리라. 그러면 나는조금은 행복해질 수도 있으리라. (1987)
13년의 세월에 그 검은색은 많이 지워져 있었지만 내가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은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내 기억이 아주 정확하다고 맹세할 수는 없지만, 1212라는숫자, 그것은 그 청년의 죄수번호였다. 역시 『양철북』은 나로서는 못 읽을 책이라고 생각하며 후닥닥 일어나 책을 본래의 자리에 보이지 않게 처박아버렸다. (1988)
논리적인 정당성과 근거를 제시하는 수고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외치는 무반성적인 폭력적 비판 정신이란 근본적으로는, 그렇게 하도록까지 만든 외부적 압력 구조로부터 가해지는 폭력과 똑같이 강압적이고 일방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막말로 하자면 노상강도의 폭력과 다를 게 없다. 1980년대 전반은 그러한 잘못 겨냥된 논리적인 문화적 폭력들이 난무한 시기였다. 그것은 아마도 정치구조적 폭력이 보이지 않게 심화되어감을 반영하는 것일 수는 있겠으나, 그러나 잘못 겨냥된 폭력은 그것이 문화의 다른 갈래들에 해를 줄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그 논리성으로 인해 애초의 목적까지 이룰 수 없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한번쯤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1985)
시가 인간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쓰는, 시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될 수있을까. 시가 시를 쓰는, 시를 생산하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인내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 점에서 보자면 나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낭만주의적 사실주의자, 혹은 사실주의적 낭만주의자가될 수 있었다면, 어쩌면 나는 시를 쓰지 않을 수도 있었을것이다. 행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행복에 대한 믿음이있었다면, 그 믿음만으로도 나는 시를 물리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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