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므린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월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넘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이 뚝뚝 거리에서 이겨지는데 그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한 잔 비우면서 휘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국의 거리는작은 술잔처럼 둥글어지면서 아프다

박쥐는 가을의 잠에 들어와 꿈을 베꼈고
꿈은 빛을 베껴서 가을 장미의 말들을 가둬두었다
그 안에 서서 너를 자꾸 베끼던 사랑은 누구인가
그 안에 서서 나를 자꾸 베끼는 불가능은 누구인가

당신이 오는 계절,
딸기들은 당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영영 오지 않을 꿈의 입구를 그리워하는 계절

SHP5B 9 S# P# 9*숨죽인 밤구름 바깥으로 상쾌한 달빛이 나들이를나온다 그 빛은 당신이 나에게 보내는 휘파람 같다그때면 춤추던 마을 아가씨들이 얼굴을 멈추고 레몬의 아린 살을 입안에서 굴리며 잠잘 방으로 들어온다

마음속을 걸어가던 달이었을까, 구름 속에 마음을
다 내주던 새의 한 철을 보내던 달이었을까. 대답하지 않는 달은 더 빛난다 즐겁다

익은 속살에 어린 단맛은 꿈을 꾼다 어제 나는 너의 마음에 다녀왔다 너는 울다가 벽에 기대면서 어두운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너의 얼굴에는 여름이 무참하게 익고 있었다 이렇게 사라져갈 여름은 해독할수 없는 손금만큼 아렸다 쓰고도 아린 것들이 익어가면서 나오는 저 가루는 눈처럼 자두 속에서 내린다 자두 속에서 단 빙하기가 시작된다 한입 깨물었을 때 빙하기 한가운데에 꿈꾸는 여름이 잇속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말 이전에 시작된 여름이었다 여름의영혼이었다 설탕으로 이루어진 영혼이라는 거울, 혹은 이름이었다 너를 실핏줄의 메일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다시 자두나무를 바라보았다 여름 저녁은 상형문자처럼 컴컴해졌다 울었다. 나는 너의 무덤이 내가슴속에 돋아나는 걸 보며 어둑해졌다 그 뒤의 울음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자두뿐이었다

오렌지 나무는 아무 말 없이 녹빛 그늘의 눈을 우리에게 주었다 단단한 잎은 번쩍거렸다 나는 너에게둥글게, 임신 말기의 여름에 열리던 아주 둥근 열매처럼 단 한 번만 더 와달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내 혀는 가을의 살빛을 모두어 들이면서 말하네,
꼭 그대를 만나려고 호두 속을 들여다본 건 아니었다고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해요, 얼굴 없는 타락들로 가득 찬 계절이 오고 있어요, 라고

잎사귀 모양을 한 깃털을 떨구고 날아간 문득,
숱이 두터운 눈바람 속, 새이던 당신에게날개의 탄생을 붉게 알려준그 나무 열매의 이름이 알고 싶었다

넝마 같은 세월을 햇빛에 말리며
라디오 속 노래들이 기절한다면
난 무얼 할까
바짝 마른 빨래 없는 계절이 지나가는데
울었던 흔적을 지워줄 내일은 없는데
나는 무얼 할까

낚시꾼들은 가까운 바다로 나간다 우럭을 잡아서그 자리에서 회 친다 우리의 가장 다정한 조상 네안데르탈인들이 헬무트 씨의 고기를 구울 때, 그 표정으로 낚시꾼들은 우럭의 투명한 살을 저민다 인간의문명에서 시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양념이다 그때에는 빨간 초장 푸른 와사비는 없었다 시간을 달이며 고독해지던 간장도

아이는 소를 제 품에 안았다
둘은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간다
빛의 섬이 되어간다
파리 떼가 몰려온다
파리의 날개들이 빛의 섬 위에서
은철빛 폭풍으로 좌상을 파먹는다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가 널린 황무지
자연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뿐이다.

틀에 갇혀버린 옆 마을의 나치 할아버지,
사각의두줄무늬 늙은 나비, 지던 페르시아 퀸 장미, 위대한가을의 국화, 휠체어에 앉아 있던 아이패드 5의 햇살욕설, 오던 구급차와 가던 장의차, 토해놓은 사랑과죽음으로도 돌이킬 수 없던 나날들, 고양이가 마시던 오후의 커피, 고요히 돌아와 창백한 별의 심장을안아주던 어둠조차 사각의 관 속에 든 정물화가 되어가던 시간을 함께 보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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