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물었다. 어떤 말은, 특정 음식이 인체에 계속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키듯, 정신에 그렇게 반복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고오익은 생각했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그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빛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오익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지만 또렷한 어떤 소리가 들려온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했다.

오익에게 증상이 나타난 건 그러고 얼마 뒤였다. 오랜만에 학교때 선배들을 만나기 위해 전철역을 향해 가던 중에 어머니에게서전화가 걸려왔다. 대꾸를 하면 통화가 더 길어질 테니 아무 말도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지만 어머니가 다짜고짜 나는 요양원같은 데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듯 말하는 바람에 누가 요양원에 가시라고 한 적이 있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궤헤그르르궤에 그릇이 들었다는 뜻인가.
………궤헤그르르 오익의 두 눈이 슬슬 감겼다. 졸음이 쏟아졌………다. 오익은 낮잠에 빠져들면서 자신이 결국 박사논문을 쓰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고 지금 당장은궤헤그르르……… 그 의미를 알아내는 일이 훨씬 중요한 것 같았다. 잠들면 악몽 속에서나마 알아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뜻밖에도 숲속 식당은 운치 있는 오두막 이런 게 아니라 둥근유리 천장에 사방이 개폐 가능한 유리문으로 된 현대식 건물이었다. 식당 앞에서 제부가 내게 좋지요 뭐 어쩌고 했다. 청력이 좋지않은데다 마스크 때문에 뒷말을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나는 좋네요. 했다. 식당의 평평한 마당 끝에 도로가 있고, 도로 너머로 논과 밭이 펼쳐졌고, 그 뒤로 노랗고 빨갛게 단풍이 든 낮은 언덕과높은 산들의 능선이 빙 둘러쳐져 있었다. 식당은 알록달록한 그릇한가운데 놓인 유리구슬처럼 사방으로 단풍 든 산에 둘러싸인 야트막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그런 모호하고 어두운 기운을 가만히 품고 있기만했던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있는 그대로 때로는 1과장해서 드러내곤 했다. 스물넷이었으니까, 위험한 무엇을 가만히 갖고 있는 것으로는 안 되고 그걸 어떻게든 뱉어내거나 발산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나이였으니까, 그 내용이나 표현이 기괴하고 언짢아서 누구에게도 제대로 가닿지 못하리란 걸 알 수도 없고 신경도 못 쓰는 나이였으니까.

아무 일도 아니다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게 되는 듯했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듯 어제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내 손에 쥔 확실한 패는 오늘밖에 없고 그 하루를 땔감 삼아 시간을 활활 태워버리면 그만이라고생각했다.

나도 어느새 경서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가사를 모르는 부분에선 혼자 부르기도 했다. 노래가 3절까지 완벽하게 끝났을 때 구선배가 뭐 이런 빌어먹을 노래를 끝까지 다부르고 난리냐며 술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승희가 좋아요, 하고 일어났다. 경서도 좋죠. 하고 일어나더니, 같이 가도 되는지 빠져줘야 하는지 몰라 멀뚱멀뚱 앉아 있는 내게 기묘한 손짓을 했다. 다리가 불편한 숙녀에게 춤이라도 권하는 듯한, 우아하고 장난스런 초대의 손짓을.

자다 가끔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날 때가 있다. 누구나 자기가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경서와 내가 멀어지게 된 데 특별한이유나 계기는 없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당시내상황이 안 좋게 흘러갔고 대학원이라는 접점이 없어지면서 우리는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면서, 그것들이 뜻밖의 별자리를 만들면서 내 정신은 깊은 어둠과무지에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났다.

나는 여자의 말투를 흉내낸 게 아니라 내 속에 오랫동안 고여있던 가래 같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학대의 사슬 속에는 죽여버릴까와 죽어버릴까밖에 없다. 학대당한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학대를 갚는 그 사슬을 끊으려면 단지 모음 하나만 바꾸면 된다. 비록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모음이라 해도.

나는 흰 종이를 꺼내 큼지막하게 123이라고 써보았다.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세 숫자는 볼수록 춤을 추기 위해 준비하는사람처럼 보였다. 양력 음력이라는 두 겹의 차원이 123 이라는동일한 무늬로 만나,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우주의 왈츠를 추는 날. 내생애 한 번밖에 없었을 그날에 나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나. 어머니 앞에 엎드려 울며 다시 착한 딸이 되겠다고 빌고 있었나, 끝장을 보자고 대들다 오빠에게 머리를 펀칭볼처럼 두드려 맞고 쓰러져 있었나. 세상은 그날 왜 나를 원하지 않는 장소에서 원하지 않는 짓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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