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고 반희는 여행에 대해서보다 자신이 전화로 한 말들을 먼저 돌아보았다. 너무 많은 말을 한 건 아닌지, 아니면 너무적게 하려고 애써서 채운을 서운하게 한 건 아닌지, 혹시 쓸데없는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반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점검을 하는 자신이 싫었고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채운과의 관계에서는 그러지 않았고 그러지 못했다. 자꾸 살피게 되었다. 채운이 알지 모르지만, 반희가 자신을 ‘엄마‘라고 칭하지 않고 채운을 ‘딸‘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도 그런 살핌의 일종이었다. 가끔 오늘처럼 실패하기는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을 닮는 게 싫었다. 둘 사이에 눈에 보이지않는 닮음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게 몇천 몇만 가닥이든 끊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둘 사이가 끊어진다 해도 반희는 채운이 자신과 다르게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너는 ‘너‘, 나는 ‘나‘여야 했다.
올라올 때만 해도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해가 비쳤는데 어느새 산그늘이 졌다. 산길을 내려가면서 채운은 반희가 말한 그날이 자신이 기억하는 그날일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운 기억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기억하는 날은 실제가 아니라 상상인지도 몰랐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초에서 고2까지, 채운은 늘어뜨린 손가락을 천천히 꼽아보았다. 팔 년이었다. 엄마가 버틴 시간, 그리고 고2에서 지금까지 손가락을 꼽아보니칠 년이었다. 세상에, 엄마가 집 나간 지 칠 년밖에 안 됐다고? 채운은 어이가 없었다. 엄마는 팔 년이고 자신은 칠 년이라니, 뭔가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 겨우 잠들었던 반희는 테라스 커튼 사이로 새어드는 빛과 새소리에 잠을 깼다. 옆에 채운이 누워 있었다. 자는 얼굴은 아기 같은데 잔뜩 술냄새를 풍기고 얕게 코까지골며 자고 있었다. 반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앉아 채운의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채운의 오른쪽 어깨에 타투를 했다가 지운 자국이 손바닥만한 크기의 흉터로 남아 있었다. 흔적으로는 아마 애초에 장미 모양의 타투를 하지 않았을까싶었다. 타투를 한 것도 지운 것도 오로지 채운의 의지였을까. 혹시라도..….…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반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베르타는 이건 바로 내 얘기가 아닌가 싶어 잠시 어리둥절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일을 다녔던 한 달 남짓 동안 베르타가 느꼈던 바로 그 감정, 그 대화를 데레사가 고스란히 복기하고 있는듯했다. 베르타는 먼 하늘을 바라보는 또래 친구 데레사에게 깊은친밀감을 느꼈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하고 사비나가 말했다. 저도 베르타 자매님과 같은 생각이에요. 덩달아 데레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올가도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수산나는 긴 이야기를 할 수있게 되어 다소 흥분된 기색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마리아는 장례를 부탁하면서 장례미사를 위한 헌금도 냈는데그때만 해도 안셀모 신부는 마리아가 이렇게까지 빨리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 뜻을 잘 알았다고 답하고 감사히 헌금을받았다. 그때부터 마리아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성당 사택으로 반찬과 국을 날라왔고 죽기 바로 전주까지도 역시 반찬과 국을 만들어날라주었는데, 그날 아침에 우리 신부님이 마리아가 만들어준 그반찬과 국을 먹고 바로 당사자의 장례를 준비하러 나갔다고 수산나가 말하자, 올가가 그 참 기가 막히구만, 기가 막혀 했다.
소미가 페북의 그 집사님을 잘 아느냐고 묻자 현수는 잘 모른다고, 그 여자가 집사냐고 되물었다. 근처 지리에 밝은 사람답게 현수는 국도를 달리다 좁은 골목으로 꺾어 들더니 이리저리 우회전좌회전을 하며 달렸고 심지어 포장도 안 된 논둑길을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기도 했다. 논둑길 중간쯤에서 현수가 소미를 돌아보며뭐라고 말했다. 차가 빨리 달리지 않는데도 엔진소리가 시끄러워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안 들린다고 소미가 소리치자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미와 현수가 시킨 만둣국이 나왔다. 알이 굵으니까 여기 놓고 꺼먹어, 하고 현수가 앞접시를 들어 보였다. 소미가 굵은 만두한 알을 앞접시에 덜어놓는데 옆자리 남자가 얘는 또 왜 이래 이거 왜 이래 이거, 하고 소리쳤다. 돌아보니 남자의 시선은 옆자리유아차에 앉혀둔 앉혀두었다기보다 담요로 칭칭 감아 묶어둔 듯보이는 작은애를 향해 있었다. 돌쯤 되었나 싶은 작은애가 입가에흰 국물을 흘리며 토하고 있었다.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를바라보는 동안 남자가 말했다.
언젠가 한번 소미는 그 땅을 싸게라도 팔아치우려고 한 적이있었다. 묘지로 둘러싸일 땅을 붙들고 있으면 뭐하나 던져버리자 싶어 충동적으로 땅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업자 말로는 산 값의 반도 받기 어려울 거라고 했지만 소미는 어떻게든 팔아달라고했다. 얼마 뒤 업자가 연락을 해서 마침 사겠다는 외지인이 나섰는데 손해를 보더라도 이 기회에 처분하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소미는 매매계약을 하러 전철과 기차를 갈아타고 U시 역으로갔다. 시간이 일렀고 배도 고파서 소미는 택시를 잡아타고 만둣국을 파는 식당에 갔다.
소미는 그렇다고, 혼자서, 매일, 기차 타고, 소풍 가듯이, 하더니 남편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편은 속으로 소풍이라니 이 여자참 철없는 소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소미는 처음에 누구 만나는 사람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처럼 갑자기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소미는 현수인지 뭔지 하는 친구 이야기를 시작할 때도 웃고 끝낼 때도 웃은 것인데 남편으로서는 아내가 이렇게 잘 웃는 여자였던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수와 웃음, 이 조합은 한동안 남편 뇌리에 납득하기 어려운 모양으로 깊이 박혀 있었는데, 땅의 존재를 안 뒤부터는 U시와 웃음, 이라는 새로운 조합으로 간단히 교체되었다. 이번에는 참으로납득이 되는 조합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현수와 연락할 방법을 찾자면 없지는 않을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현수가 그 땅의 현재 가치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안다면 자기의 혜안이 맞았다고 기뻐하기만 하고 끝낼까. 사람은 절대 그렇게 무구하지 않다. 또 현수가 얼마나 거칠게 변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때 마흔다섯 살의현수도 소미의 상상과는 너무도 달랐지 않은가.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인문대 깃발을 흔들며 행진하던 늘씬한 아가씨가 이혼하고 혼자 딸 둘을 키우는 뚱뚱한 중년 여자가 되어 피곤에 전 모습으로 부동산사무실에 앉아 있지 않았던가.
사거리에서 혜영은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좌회전 차선에 접어들며 왼쪽 방향지시등을 켰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자매는 규칙적인 점멸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담배를 피웠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 시간이 그날 하루 중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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