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12월, "바다의 노래, 대답 없는 아카펠라"라는 제목을단 레브킨의 기사가 나오자 우즈홀로 더 많은 편지가 쏟아졌다.
이 기사에서 인용한 해양포유류 연구자 케이트 스태퍼드의 말이의도치 않게 불 난 데 부채질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말하고있어요. ‘이봐, 나 여기 있어‘ 그런데 응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거죠." 편지를 보내온 이들은 사랑을 잃은 이들과 청력을 잃은 이들, 버림받은 이들과 혼자인 이들, 한번 거절당하고는 다음을 머뭇거리는 이들, 다음번에 거절당하고서는 영영 머뭇거리고 마는이들이었다. 고래에게서 자신을 보거나 고래를 안타까워하는 이들, 투사한 감정에 아파하는 이들이었다.

리어노라는 힘겨운 성장기를 보냈다. 150센티미터 작은 키에당뇨로 눈이 보이지 않는 완강하고 영리한 할머니 손에 자랐다.
첸나이 출신 이민자로 트리니다드를 거쳐 미국에 온 할머니는 고향 인도에서 미국에 가면 길에 황금이 깔려 있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했다. 그러나 리어노라가 자란 할렘 브래드허스트는 리어노라가 고등학생이던 1970년대, 하늘을 찌를 듯한 살인 건수로 자체 경찰기동대까지 보유했던 우범지대였다. 어느 해여름엔가 사진 찍는 취미가 생긴 리어노라에게 "죽음의 사진사"
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의 사진에 등장한 인물 다수가 폭력의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리어노라는 고래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언어도 표류하고 있다고 느꼈다. 자아감을 되찾는 것만으로도 고군분투였으니, 하물며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말을 찾을 리 없었다. 세상이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던 그때, 그는 고래에게서 같은 곤경을 읽어냈다. 당시에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고래 말을 할줄 알면 좋을 텐데. 그는 52 블루가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알 수도있다는 가능성에서 묘한 희망을 느꼈다. "전 생각했어요. 여기 그가 있어. 말을 하고 있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어. 노래하고 있어. 이해하는 사람은 없지만, 듣는 사람이 있어. 듣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그도 알 거야. 반드시 느낄 거야."

저는 사랑에 흠뻑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에겐 내가 그만큼 중요하지 않았죠・・・・・・ 저는 그에게 제가 가진 모든 걸 주었고, 그도 그렇게 해줄 줄 알았기 때문에로 상처받았죠. 그 때문에 가까운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어요. 낭비한 세월을 떠올리면 슬퍼져요………… 52 헤르츠 고래초 이야기를 접하고 전 기뻤어요. 저에게 52 블루는 긍정적인 혼자를 상징해요……… 그 고래는 혼자이지만 꿋꿋이 살아가겠다는 선언 같아요.

자연계는 언제나 인간의 투사를 위한 스크린으로 존재해왔다.
낭만주의자들은 여기에 감상적 허위라는 이름을 붙였다. 랠프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천국과 대지의 교제"라고 불렀다. 우리는 우리의 공포와 갈망을 동물이나 산처럼 우리가 아닌 것에 투사하고 이로써 그들을 어느 정도 우리와 동류로만든다. 이는 굴복시키는 행위인 동시에 갈망하고 요구하는 행위다. 그런 행위를 하고 있음을 자각조차 못 하는 때도 종종 있다. 아마추어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화성에서 운하를 관측했으며 금성에서는 어렴풋한 "빗살"을 관측했다 주장하며 이를 외계 생명체의 흔적이라 주장한 이래 수십 년이 지나고서야. 한 검안사가 로웰이 사용했던 망원경의 배율과 조리개 때문에 관측하던 행성의 표면에 그의 안구 내부가 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로웰은 외계의 생명체를 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시선이남긴 흔적을 보았다.

이 이야기 역시 겸허함에 관한 교훈을 준다. 포착할 수 없던동물이 어느 순간 더는 신호를 보내지 않을 수 있다는, 실제 생물이 자신에 대한 신화적 투사를 전면적으로 무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신호에 매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찾는 그 고래를 찾을방법은 없고, 기껏해야 아마도 예전에 그 고래였으나 지금은 달라진 존재를 찾을 방법이 있을 뿐이리라.

전생에 대한 믿음 자체는 드물지 않다. 우리 모두 죽고 나서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궁금해해왔으니까. 2018년 퓨 연구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3퍼센트가 환생을 믿으며, 2013년해리스폴 조사에 따르면 64퍼센트가 느슨한 정의인 "영혼이 사후에도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믿는다. 내가 사는 뉴욕에서는 지하철만 타면 그해 10월 실종된 자폐가 있는 열세 살 남자아이 사진이 보였다. 아이는 퀸스 출신이었다. 퀸스를 지나가는 열차마다 아이 사진이 붙어 있었다. 비논리적이지만, 나는 그 아이를분명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아니면 그 아이가 어디에 있든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믿음이 바보 같다면 기꺼이 바보가 되고 싶었다.

부모와 아이 둘 다에게 가해지는 강화라는 역학 작용이 내가 이런 사례들에 사로잡힌 이유의 하나다. 우리는 어째서 우리가 외로운지, 무엇이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부재의 이야기들은 실재하는 현실만큼이나 충만하게 우리를 정의한다. 아이들은 유령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엄마는 아들이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이유가 아이의몸속에 어느 노인의 영혼이 들어 있어서라고 믿는다. 전생에 관한 이야기가 이번 삶을 설명해준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가진 평범한 토양보다 깊은 곳까지 뻗어 있는 특별한 뿌리를 약속하는이야기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현실, 즉 우리 삶의 리듬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않는 힘이 빚어낸 것임을 인정한다. 짜릿하면서도 공포스럽다. 확장이며 항복이다.

자신의 제임스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위로가 된 건지도 모른다. 브루스는 앤에게서 온 편지 한 통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게 아직도 받아들이기 벅차요. 책이나신문에서는 나와도, 실제 자기한테 일어날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이야기잖아요." 그 뒤 앤의 단정하고 질서 정연한 글씨체로 이어지는 명쾌한 긍정 "하지만 저는 믿어요."

그리고 환생이 어떤 사람들이 위안을 찾고자 하는 이야기에불과하다면, 우리 각자에게 깃든 필수적이면서도 단일한 자아로서의 영혼이라는 개념 역시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것도 사실이다. 환생은 영혼에 대한 이런 믿음을 보호하는 동시에 분열시킨다.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그것은 죽지 않지만 어쩌면 애초 우리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내가 환생 이야기에매혹되는 것은 이 이야기가 굳건한 경계 없는 자아, 나 이전에도 살아 있었으며 이후로도 그러할 자아를 믿게끔 하기 때문이다.

어떤 개자식이 대머리독수리를 화살로 봤다. 그 때문에한쪽 날개 대부분을 잃은 독수리는 날지 못하게 됐다. 며칠전 방문한 이곳 보호소에서 독수리는 안전하게 지내고있었다. 때로 남편과 나는 그 독수리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꼼짝달싹할 수 없는 기분. 크게 잘못된 것은 없다. 먹을 것이 있고 살 집이 있고 필요한 것이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자폐 때문에 남은 평생을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됐다. 영영 해방되지 못할 거다.

세컨드라이프는 환상이라기보다는 실제 삶의 연애보다 서로를더 잘 이해시키는 통로다. 요나스는 세컨드라이프가 실제 삶의피상적인 대용물이 아닌, 희석된 버전의 현실이라 묘사한다. 뮤지션으로서, 그는 세컨드라이프가 그의 음악을 변화시킨 것이아니라 청중과 더 직접적인 관계를 맺도록 확장했다고 느끼고,
팬들이 노래 가사를 타자로 입력하는 걸 좋아한다. 크래시 테스트 더미스의 「음음음음(Mmm Mmm Mmm Mmm)」 커버 무대를 할 때 수많은 이들이 가사를 입력해 "떼창을 하느라 화면을
‘음‘이라는 글자로 가득 메우던 일을 기억한다. 요나스에게 현실그리고 그의 창조물(노래와 아기)이 가진 아름다움은 가상적 구축의 자취를 초월하고 압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