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헛된 듯 보이던 오랜 세월 동안 하찮은 것들을 ‘귀중하게‘ 벼려낸 그 각오란 실상 그가 지닌 힘의비결이었다. 습관이 사람을 만들듯 작가의 문체를만든다. 자신의 생각을 거의 만족스럽게 표현하는 데여러 번 흡족함을 느낀 작가라면 단번에 자신의 재능에 경계를 그으며, 결코 그것을 넘어서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주제는 그 자체로 우리의 도덕적경험을 비추는 무언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 만약그 확장성, 그 필수적인 반향이 없다면 그 주제는아무리 표면이 화려해 보여도 그저 지엽적인 해프닝, 맥락에서 찢겨 나온 무의미한 사실의 조각에 지나지않는다. 그러나 상상력을 통해 충분히 깊이 탐구했다고해서,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모든 해프닝으로부터잠재력을 발견해 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절반의진실일 뿐이다. 그 반대 역시 진실이다. 즉, 상상력이제한되면 위대한 주제도 협소해진다. 그러나 폭넓은창조적 시각이 있다면, 비록 인간 경험의 어떠한단면도 온전히 공허하게 보일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본능적으로 우리가 공통으로 겪는 괴로움의 면면이극적이고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들을 모색할 수있다. 그 자체로서 삶 안에 흩어져 있으며 결정적이지 :않은 사건들의 일종의 요약 혹은 축약본이 되는 주제들말이다.
정말로 좋은 주제를 잡았다면 작가는눈물이 날 정도로 깊이 파고들기만 하면 되는데, 러시아인들은 거의 항상 그 깊이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와 러시아의 예술이 함께 빚어낸 결과, 단편소설은 형식의 심오함과 더불어 그 감각의 굉장한엄밀성을 얻게 되었다. 삶의 표면에 느슨하게 걸친거미줄 대신, 그들은 인간 경험의 본질로 곧장 향하는최적의 통로를 만들어 냈다.
독자의 신뢰를 얻고 나면, 다음 원칙은 독자의주의를 산만하게 하거나 흩뜨리는 일을 피하기다. 공포 이야기가 되고자 하는 많은 소설들은 공포를늘어놓거나 다채롭게 만듦으로써 더 무섭지 않게된다. 무엇보다도, 공포 요소를 늘어놓는다면 그것들이 분산되는 게 아니라 누적되어야 한다.
특수한 경우에는 이 원칙을 옹호할 수 있다. 그러나어떠한 일반 이론을 세우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모든 ‘주제‘는 (소설가의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자체적인차원을 내포해야 한다. 그리고 소설가의 본질적 재능 중하나는 그 주제가 현현을 요청하며 소설가에게 스스로를내보이는지를, 그리고 그 분량이 단편에 적절할지장편에 적절할지를 식별하는 일이다. 만약 둘 모두에적용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면 둘 다에 부적절할 수도 있다.
실제로 단편소설이 절정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도덕적 드라마를 활용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만약 해당사건이 한 번의 불현듯 떠오르는 회고를 통해 충분히다뤄질 수 있는 경우라면 단편소설의 자격이 주어진다. 그러나 만약 주제가 무척 복잡하고 연속적인 단계들이매우 흥미로워 정교하게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경우, 시간의 경과가 반드시 암시되어야 하므로 소설의 형식이 적절하다.
작가가 자신의 뒤엉킨 ‘재료‘를 더듬거리기 시작하는순간, 즉 어떠한 실제 사건이 어수선하게 넘쳐나는지점들 사이에서 망설이기 시작하는 순간, 독자는 곧장머뭇거리게 되고, 그러면 현실의 환상은 사라지고 만다. 인쇄된 페이지 위의 문장들을 주시하지 않으면 연극에서무대 위의 시각 장치들에 유념하지 않아 주제가‘진행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실패를 낳는다. 단편소설작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술적 묘기를 최소한으로줄여야 한다. 가장 영리한 여배우가 화장을 가장 옅게하듯이 말이다. 다만 그가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종이위에 살아남은 그 최소한의 묘기가 독자의 상상력과 자신의 상상력 사이를 잇는 유일한 다리라는 점이다.
관부적절하거나 비현실적인 결말은 소설에선 그효과가 미미할지 몰라도 단편소설에선 그 가치를 매우떨어뜨린다. 서술된 이야기가 무엇이든 4,500번째단어에서 끝맺도록 자동 설정한 여섯 개 정도의 ‘표준화된‘ 결말을 보여 주는, 기계적으로 찍어 낸 듯한암울한 규칙성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모든 주제가고유한 차원을 지니고 있으므로 명백히 그 결론도처음부터 지어지게 마련이니, 가장 깊은 층위의 의미에부합하게끔 이야기를 끝맺지 못하면 그 작품의 의미는 없어진다.
이는 또 다른 요점으로 이어진다. 보여 줄 도롱뇽이없다면, 독자의 귀를 막아 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지핀 작은 불꽃의 중심부가 살아 움직이지않는다면, 그래서 다른 무언가를 움직이지 않는다면, 소리를 지르거나 흔들더라도 독자의 기억 속에 일화를각인시킬 방법은 없다. 이야기를 말할 가치가 있는것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의미를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도롱뇽이다.
단서가 주어지면 작가는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손길은 확고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싶은 것, 혹은 그 이야기가 말해질 가치가 있는 이유를단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주제에 대한 이러한확고한 지배력을 갖기 위해선 아무리 단편소설이라도쓰기 전부터 깊이 숙고해야 한다. 자신이 택한 형식이지니는 한계로 인해 캐릭터를 정교하게 만들어 현실과의유사성을 연출할 수 없기에, 단편소설 작가는 모험자체를 더욱더 생생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언젠가 뉴욕의 한 유명한 프랑스 제과점 주인은 그가만든 초콜릿이 맛있긴 한데 왜 파리의 초콜릿과는다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여기선비용 때문에 프랑스 제과업자들만큼이나 여러 번 작업할수 없기 때문이죠." 또 다른 가정적인 비유도 이 교훈을확실히 일러 준다. 가장 단순해 보이는 소스는 가장절묘하게 배합해 섞은 소스이며, 가장 단순해 보이는드레스는 디자인하는 데 가장 많은 연구가 필요한 법이다.
선택이라는 귀중한 본능은 오랜 인내로 제련된다. 우리가 천재는 아닐지라도, 천재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전달하고자 가장 의존하는 것은 틀림없이그 인내심이다. 이 점에서 반복과 고집은 허용된다. 이야기가 짧을수록 ‘행동을 강조하기 위해 세부사항이 더 많이 탈락되고, 불필요한 것을 버렸을 때도무엇을 유지할지 선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중요한요소들이 배치되는 순서가 지니는 효과에 더 의존하기 마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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