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로부터 받은 참고서가 가득 든 쇼핑백을 품에 안고 있었다. 눈에 젖지 않게 복층 아줌마가쇼핑백 위에 신문지를 덮어주었는데, 눈에 젖은 신문의 기름냄새를 맡을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력감과 패배감을 느꼈다. 나는 내가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지만 누구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엄마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나는 입을 꽉 다물고 있었고, 평소와 달리 엄마는 그런 나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불과 며칠 후, 결국 새로운 과외 선생님이 집으로 왔다. 그는 두꺼운 모직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안에 코르덴 재킷과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자리에 앉기 전에 그는 코트와 재킷을 차례로 벗었고 엉거주춤하게 선 채로 물었다. "이걸 걸어둘 곳이 없을까?"
"네, 미국에서 같이 살았었다고요." ‘같이 살았다‘라는 표현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나 역시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때는 동거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전이었다. 그건 엄마가 경멸하는 가출한 청소년들이 저지르는 잘못 불순하고 불온한 일로만 여겨졌다.
그 질문은 내 본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를 당황시키거나 곤란하게 만들려고 계획적으로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왜? 내게 왜 그전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단 말인가? 나는 정말로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그 생강과자 냄새를 풍기고, 자신의 코트와 재킷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신을 물 먹는 하마라고 소개하는가 그것에대해 설명해주기를 절실하게 바랐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설명할 기회를 얻게 되기를 바랐다.
이사 후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편함을 뒤지곤 했다. 그전에살던 동네에서 나를 돌봐줬던 언니가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아파트 현관의 낡은 우편함을 뒤질때마다 어머니는 팔짱을 끼고 뒤에 서서 나를 지켜보았다. 두어달쯤 지났을 때,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기겠다는 듯이, 그녀가 편지를 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진짜로 끈이 달려 있진 않은데, 뭘로 언니가 나를 조종해요?" 처음 그녀가 그 놀이를 제안했을 때, 나는 그렇게 물었다. 사실나는 기꺼이 그녀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이었다. 아니, 그러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질문이 필요하다고도 느꼈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는 것에 약간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우리 어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런 식의 단어를 사용해 (몇 번 마주치지도 않은) 어른을 평가 내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판단을진실인 양 선포해버리는 그 자신만만함 때문에 그녀는 종이의 맨아래에 날짜와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고, 이름 옆에 빨간색 펜으로도장을 그려넣었다. 상장은 아주 그럴싸해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던 건 그날 딱 한 번이었다. 나는 요즘도 그날 밤을 종종 떠올려보곤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장면 속에서 어머니는이제 막 물속에서 나온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머리카락이젖어 있거나 옷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느낌의 문제였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꿈을 꾼 게 아닐까, 무엇인가를 착각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아니었을것이다. 꿈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울방학을 이 주 정도 앞둔 그날은 성급하게 우편함 안으로 손을 집어넣지 않았다. 어떤 예감이 있었던 걸까? 아니었다. 그저 정말로 추웠을 뿐이었다. 손이 꽁꽁 얼어서 약간 고통스러울지경이었다. 손을 녹인다 한들 별 효과도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손을 녹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곤 덜덜 떨면서 손에입김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었기 때문에외투 소매로 손을 감싼 후에 우편함 안으로 집어넣었다.
"우리 엄마가 입원해 있는데, 아빠는 내가 거기에 가면 안 된대요. 하지만 나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특별히 머리를 쓴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이 입에서 잘도 나왔다. 병원은 거대했고 건물도 여러 개였으며 통로가 많았다. 그런 병원에는 그날 처음 가본 것이었다. 병원이 너무 크고 그곳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내게 용기를 주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사람들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그녀의 병실이 있는 층에 내렸다. 그런 후 별 고민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느라 병실 복도로 이어지는 커다란 유리문이열렸을 때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성인이 된 후 이 병원을 다시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나는 계속 헤맸다).
"맞아, 내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어. 선물을 돌려달라고 말이야." 그녀는 딴청을 피우듯이 블라인드가 쳐진 창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물을 주었다는 뜻일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는 말일까? 다른 사람들도 포옹해준 적이 있다는 걸까? 다른 사람에게도・・・・・・ 내안에서 이런저런 궁금증이 흘러넘쳤지만, 어째서인지 그때 내 입에서 나온 질문은 이것이었다. "선물을………… 돌려준 사람이 있어요?"
"언니가 외고에 떨어져서 내 마음이 너무 아파요.‘ 그 말에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녀의 눈물이 볼을타고 내려와 머리카락을 적셨고, 목덜미로 흘러들어가 베개에 흔적을 남겼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때, 그녀가 손으로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정성을 들여서 잠시 후 그녀는 상체를일으켜 앉고서 나를 바라보다가 입술 끝을 올려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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