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다가오자 우리를 속박하던 질서의 일부분이 힘없이허물어졌다. 담임선생은 자주 자율 학습을 시켰고, 종례 시간이 되면 청소를 다 하고 가라는 말만 남기고 제일 먼저 교실을 떠났다.
체육 선생은 우리에게 피구 경기나 줄넘기를 시키고 교무실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가끔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스탠드에 가만히 앉아서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보곤 했다. 교복을 입은 중학생 오빠들이 정문을 지나 운동장을 어슬렁거리며 가로지르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숙직실은 일층 중앙 로비 뒤편, 후문으로 이어지는 통로 구석에 있었다. 나는 상상 속에서, 신발을 신은 채 중앙 로비로 저벅저벅 들어가는 중학생 오빠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상상속에서 나는 양우정의 무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침내 판결이 내려졌고, 나는 순순히 따랐다. 방안의 다른 애들에게서 나를 향한 놀라움과 적대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엉거주춤 안으로 들어간 나는 구석의 장롱 옆에 붙어섰다. 그제야 방의좁은 쪽 벽에 커다란 전신 거울이 걸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대체 이런 게 왜 여기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걸 누구에게 물어본단말인가? 그애들조차 이곳의 주인이 아닌데. 양우정은 내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쾌하게 박수를 한 번 쳤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하루종일 비가 와서 옥상에 올라갈 수 없었던 날, 나는 침대 위에 누워서 그녀가 외출하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 아버지의 무신경함의 흔적을 찾아서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볼 계획이었다. 또다른 라이터를 찾으면 다시 한번 더 아버지를 원망할생각이었다(한 번 그런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두 번은 왜 못하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노크도 하지 않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분통을 터뜨리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직장에서 친구를 사귀었고, 자주 누군가의 집에서 모였다. 열 명 정도 되는 여자들이 보름이나 한 달 간격으로 한집에 모여 저녁을 먹고(보통 중국 음식을 시켜 먹었다. 요리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맥주를 마시는 모임이었다. 모임에는 결혼한 여자도있었고 안 한 여자도 있었다. 남자들은 없었다. 아이가 있는 여자들의 남편은 다른 날짜를 정해서 자기들끼리 만났다. "놀기 위해서 번갈아가며 아이를 돌보는 거죠. 합리적으로 말이에요." 그녀는 돈을 조금 주는 조건으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중년 여자에게 딸을 맡겼다.

나는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갑자기 왜 세상에 종말이 온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하나도 창피하지 않다는 듯 초연하게 굴었고, 심지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나는 나중에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내 외부에서 벌어지는그 어떤 일도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의 핵심에는 허영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영원히 휴식을 취한다, 는 말은 무슨 의미인지 알아?"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마치 이런 식의 주제로 넘어오는 게 정해진 수순이라는 듯이 할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어쩐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구겨진 반팔 티, 헝클어진 머리카락, 번들거리는 이마, 그리고 턱 아래에 남아 있는 옅은 수염 자국 그에게서 술냄새와 땀냄새,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체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시선을 떼고 대답했다.

피크닉을 가던 그날은 그해 여름 들어 가장 기온이 높은 날이었다. 할머니와 나는 바다로 떠날 준비를 했다. 맛있는 음식이 잔뜩든 피크닉 박스가 있었고, 나는 헐렁한 거즈 원피스 안에 수영복을 입고 있었으며 새 샌들을 신고 있었다. 차에 올라타기 전, 삼층끝에 있는 삼촌 방을 올려다보았다. 그토록 더운 날이었는데도 창문은 꼭 닫혀 있었고 커튼까지 쳐져 있었다.

새아빠는 퇴근 후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채 한동안 머물다가 아기를 데리고 나오곤 했다.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분유를 먹이는건 잘했지만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어쩔 줄을 몰라하며 쩔쩔맸고, 결국 아기는 엄마 품으로 돌아갔다. 만삭이었던 엄마의 배를향해 그가 보여줬던 위엄은 자취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같았다. 그때의 위엄이 예외적인 것이었고, 주춤거리고 멈칫거리는게 그의 보편적인 특성이었던 걸까? 집안에는 갈피를 잡을 수없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단조로운 활력, 만성적인 고단함, 수용되어야만 하는 체념, 그리고 그 틈새를 흐릿하게나마 감싸고 있는 애정의 조각들.

그가 과외를 그만둔 후, 가끔 새벽에 깨어날 때가 있었다. 어둠속에서 내가 간절하게 바란 건 몇 달 전 새벽에 들었던 목소리를다시 듣게 되는 것이었다. 혹독하고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던 그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누구의 죽음에 대해이야기하고 있었던 걸까? 사실, 그 대답은 자명했다. 너저분하고 짐스러운 신체의 죽음. 그런 생각을 하면 나 자신을 관통하고있는 모든 요소가 하잘것없게 느껴졌고, 오로지 벗어나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을 끝도 없이 흘려보내는 중인 것만 같았다.

복층 아줌마는 화장을 하지 않았고, 감색 모직 스웨터에 검은색슬랙스를 입은 채 우리를 맞이했다. 키가 작고 말랐는데 태어나서 한 번도 살이 쪄본 적 없을 것 같은 몸이었다. 짧게 잘라서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은 완전히 새까맸고, 피부는 어두운 편이었다. 그 집 벽에는 (우리집처럼) 무언가가 걸려 있지 않았고 커튼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었다. 있어야 할 어떤 것을 일부러 비워둔 듯한 인상을 주는 집이었다. 화병은 딱 하나였다. 커다란 크리스털화병. 그 안에 신선한 생화가 가득 꽂혀 있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초록색 투피스를 입고 이 집에 있었을 엄마를 떠올려보았다. 실수로 떨어져나온 얼룩처럼 보였을까? 아니면 벽에 간 실금처럼 보였을까?

나는 침대 위에 앉았다. 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내 앞으로 화장대 의자를 끌고 와 그 위에 간식 쟁반을 올려두고 자신은 바닥에 앉았다. 의자의 높이가 어정쩡해서 내가 간식을 먹으려면 상체를 조금 숙여야 했고, 그녀가 먹으려면 팔을조금 높게 들어야 했다. 그녀는 복층 아줌마와 그리 닮지 않은 것같았다.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 편이었으며, 등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머리카락은 갈색빛을 띠었다. 말을 할 때마다 왼쪽 볼에 보조개가 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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