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결론을 내리듯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쓰는 글을 다른 사람이 읽기 전에 맨 먼저 읽는 사람이 당신 자신이라는 걸 잊지 마시오. 당신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당신의 신이 맨 먼저 당신의 글을 읽는다는 것도 당신이 쓰는 글은 당신의 영혼에 맨 먼저 새겨질 것이고, 신은 언제나 당신의 영혼 속에 새겨진 것들을 읽고 있기 때문이오."

신은 그 거지 여인을 통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인간은 서로 만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시인이든 문둥병 여인이든 누구나 만져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아무도 만져 주지 않는다면 길에 버려진망고 열매처럼 영혼이 쪼그라들어 버린다는 것을………….
행복에 찬 거지 여인의 얼굴은 한 떠돌이 여행자의 영혼에도생기를 불러일으켰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그 거지 여인과 작별하고 히말라야를 향해 출발했다.

어디로 갈여행자가 가장 힘들 때는 길이 없을 때가 아니라 길이 너무 많을 때다.
넓은 운동장에서 혼자 제식 훈련을 하는 사람처럼 배낭을 멘채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바꿔 보았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곳에서 기차가 정차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한순간의 충동에 이끌려 기차를내린 것이 잘못이었다. 그때 나는 단조롭게 반복되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반쯤 졸음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기차가 이유 없이 들판 한가운데 멈춰 섰고, 그 틈을 타 충동적으로 배낭을 들고 기차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점점 무거워져 가는 배낭을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커다란 나무에다 걸어 놓았다.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도 뽑아서 배낭 속에 집어넣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아무리 가벼운 것도 무거운 법이다.
그렇게 반나절이 넘도록 걷고 또 걸었다. 이제는 너무 멀리 와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미 너무멀리 와버렸기 때문에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가 없게 된 사람.....….

그들은 내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중인지조차 묻지 않았다.
그렇다, 지친 여행자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아야 한다. 그는 이미 많은 여정을 지나왔을 테니까.
힌디어로 ‘손님‘은 약속 없이 찾아오는 사람이란 뜻이다. 나는그들에게 말 그대로 손님이었던 것이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차파티로 저녁을 먹고 나자, 지평선저쪽에서 휘영청 달이 떠올랐다. 달은 무대의 막을 올리듯 수많은 반짝이 별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모닥불에 끓인 짜이와 고독, 잠든 염소들과 별들, 그 모든 것들이 넘치도록 많은 밤이었다.

그 여행이 너무도 힘들어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순간이 올지라도 여행자에게는 그 여행을 이끌어 주는 소중한 빛이 있다. 내게끝없이 손을 흔들어 주던 그 집시들처럼.
나는 광막한 무인 지대를 지나, 태양의 볼록렌즈 속을 다시 통과하면서 철길이 있는 간이역으로 돌아왔다. 둥근 지구 저편으로 집시들의 천막도 아득히 멀어져 갔다.

‘당신, 이거 아시오? 사람 역시 잘 익은 파파야 같아야 하오.
익지 않았으면 신은 이틀을 더 기다릴 것이오. 그래도 안 익었으면 결국 소에게 먹이로 던져질 것이오."
인도는 과연 언제 어디서 영적 교사가 등장할지 예측할 수 없는 나라이다. 파파야 하나를 사면서도 큰 깨우침을 얻게 되는 나라 아닌가!

‘신이 창조한 날은 단지 오늘뿐이란 말이오 어제와 내일을 만드는 건 바로 우리 자신들이오, 안 그렇소?"

손을 들어 할아버지의 얼굴에 앉은 파리를 쫓아내며 잔티가내게 물었다.
"당신은 왜 해마다 인도에 오나요?"
내가 잡지를 덮으며 말했다.
"그만큼 인도를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러자 뜻밖에도 잔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인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가 당신을 사랑하는 거예요. 인도가 언제나 당신을 부르는거죠.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자꾸만 인도에 오게 되는 거예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는 무슨 대화를 나누었던가. 기억이란 참으로 이상한것이다. 어떤 것은 잊으려고 해도 계속 기억이 나는가 하면, 또어떤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아주 오래전 일처럼 잘 기억이 나지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고개를 돌리면 열여덟 살의 잔티 초베가바로 내 옆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그날 밤처럼 내게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게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온 한 고독한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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