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맞은편 의자에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서 안부도건너뛴 채 그와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내 목소릴 몇분쯤 듣노라면 그의 얼굴, 몸, 손짓에 다시 생기가 돌기시작했다. 우리는 이내 책과 뉴스 헤드라인과 지인들에관한 대화를 언제나처럼 신나게 나누었지만, 언쟁을벌이는 일은 없었다. 그 기적 같은 변환의 광경을 영영잊지 못할 것 같다. 고도의 지성이 작동하자, 반송장 같던사람이 생생한 활기를 되찾는 모습을 본다는 건 그야말로마법이나 다름없는 변신을 목격하는 기분이 드는일이었다.
7월의 어느 저녁, 사람들로 붐비는 40번가 9번애비뉴를 따라 걷다가 그 군중 속에서 미동도 없이서 있는 남자와 여자를 보았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뚫어져라 보며 한 손으로는 여자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러자 여자는 남자에게서 얼굴을 돌린 채 두 눈을질끈 감았고 말 없는 입으로 싫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계속 흘끔거리며 걷다가 우연히 눈을들었는데 비상계단에 한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여자는 충혈된 눈으로 거리에 있던 남자와 여자를 빤히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낯빛엔 고통이 완연했다. 나는잠시나마 헬스키친Hell‘s Kitchen" 에서의 삶에 질투를 느꼈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 원피스절단 사건을 끄집어낼 때마다, 엄마도 매번 그 이야기의진실성을 부정했다. 쭉 그 상태로, 나는 계속 엄마를 믿지않고, 믿지 않고, 또 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별안간믿게 됐다. 오십대 후반이 된 나는 어느 쌀쌀한 봄날오후에 23번가 시내 횡단 버스를 타고 가다 9번 애비뉴정류장에서 내렸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반백여 년 전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든 내가 기억하는 그런 식은 절대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생각했다. 나는내 울분을 제조해내려고 태어난 사람이구나. 하지만 왜? 하물며 소중한 인생에 내처 그걸 붙들고 있었다니. 대체왜? 이마에서 손을 뗀 나는 상상 속에서 모자를 벗어레너드에게 인사를 건네며 나도 그렇네, 하고 나직이중얼거렸다. "이 나이를 먹고도 이렇게 아는 게 없어."
물건들이 누군가의 주변에 온기와 색채를 더하고거기에 비중, 맥락, 특색 따위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그순간 불현듯 깨닫기라도 한 것 같았다. 물건들을 치워버린세상에 남는 건 삭막한 공기다. 검은색, 흰색, 사람 사는것 같지 않은 분위기 매니와 내가 그러듯이 물건에 대한소유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앞으로도자신의 음울한 자아를 기꺼이 그 자리에 계속 세워둘만큼 확고한 주변인의 감각으로 살아가겠다는 뜻일수밖에 없을 것이다.
책임1893년 봄, 콘스턴스는 대운하를 면한 건물에 집을얻어 살기 시작한다. 헨리는 기뻐하며 겨울엔 베네치아에들르겠다고 약속했다. 콘스턴스는 그가 올 날을 기다리며기운을 내겠다는 편지를 쓴다. 편지를 받자마자 헨리는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한여름이 되자 그는 새책 집필을 시작하게 돼 겨울 일정을 아직 계획하지 못한상태라 아무래도 베네치아에 아예 못 갈 가능성이 크다고답장한다. 콘스턴스는 묵묵부답이다. 그해 여름이 지나고또 가을이 오는 동안 둘 사이에는 사실상 연락이 없었다. 이후 콘스턴스는 작업 중이던 소설을 탈고했다는 소식을전하는 간단한 편지 한 통을 보낸다. 헨리는 콘스턴스가작업을 끝내고 다음 집필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과도기에급격히 쇠약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려나
1950년대 초 시모어 크림이라는 뉴욕의 저널리스트는반체제 작가가 되기를 염원하면서도 동시에 전국적인명성을 누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 스스로는 이도저도실패라고 여겼다. 실패했다는 그 감각을 바탕으로 크림은당대에 말을 거는 주제와 목소리를 찾아냈다. 조울증이있었고, 야망과 신경증과 자조 사이를 오가던 크림의페르소나는 잉크를 흥건히 쏟아내며 좌절과 허기에 관해, 경멸의 대상인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성공을쟁취한 이들을 향한 어마어마한 질투에 관해 끊임없이설명했다. 그 목소리는 철저히 도회적이기도 했다. 시모어크림 같은 사람을 낳을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 뉴욕밖에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