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인문학 -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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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을 우리는 '삶의 인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삶의 인문학은 삶을 살아가는 기예이자

예술로서의 인문학을 의미한다.

내가 이 책에서 '시학'이란 말로 부르고자 한 것도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이다.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출처 입력




삶은 이야기처럼 짜여지고,

이야기처럼 진행된다.

삶의 시학은 '산다는 것의 예술'에 주목한다.

'산다는 것의 예술'은 예술을 하면서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 행복하고 아름다운 예술적인 삶뿐만 아니라,

아니 보다 고통스럽고 추한 비예술적인 삶까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한 인생살이 자체-를

예술로 보는 것은 의미한다.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라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생물학적 전기이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살았고, 무슨 고통을 겪었으며, 무엇을 행복으로 생각했는가라는 대목-

그의 삶의 자서전은 생물학적이 결정의 차원을 벗어난다.

우리는 그 삶의 자서전을 '문학적 자서전'이라 부를 수 있다.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감동이란 인간의 가슴에 이는 파도이고, 그 파도소리이다.

가슴속에 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특권을 자진해서 포기하고,

그 특권의 자진헌납 속에서 오히려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감동의 포기를 종용하고 강요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와 문명은 명백히 반인간적이다.

또 그 반인간적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처럼 '감동 죽이기'를 연습한다.

생존의 필연 앞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매일매일 살기 위해 죽고 있다.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의 반성적 능력이다.

우리가 플라톤처럼 철학자를 참사람으로 내세울 필요는 없지만,

반성은 인간의 삶을 인간다운 삶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송한의 철학적 능력이다.

이 능력을 포기하지 않는 자, 그가 사람이다.

참사람은 멀리 있지 않다.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지금 이 글, '만인의 시학'은

문학이 '문학하는' 사람들과 문학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이라는 관점에서 씌어지고 있다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문학은 삶의 진실과 결코 떨어질 수 없지만,

문학 자체가 어떤 객관적 진리 인식을 위한 지배적 수단인 것은 아니다.

문학이 포착하는 인간의 진실은 더 많은 경우 진/위 판단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진솔한 경험의 확장에 있다.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반전, 아이러니, 역설을 아는 사람은 관용의 인간일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지 않을까? 아일랜드 시인 세이머스 히니는 시를 "인간 상황의 복잡성에 대한 찬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히니가 말한 그 '인간 상황의 복잡성'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 문맥을 위해 인간 상황의 '역설적 반전의 가능성'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시는, 그리고 소설은 인간 실존의 반어적 상황에 대한 찬사이고 관용일 수 있다.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엿보기가 성립하는 것은 엿봄의 주체가 자기 혼자서만 대상을 보고 있다는 민음 위에서이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엿보는 순간 그 엿보기의 대상 자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로지 주체와 대상의 분리법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대상의 눈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소유하려는 대상은 그 소유욕망을 발동 순간에 욕망의 주체를 역으로 응시한다. 엿보기의 대상을 소유의 대상으로 만드는 순간 그는 대상이 반사하는 욕망의 시선에 나포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엿보기의 주체는 소유욕망의 질서 속에서 주체의 지위를 잃고 거대한 소유욕망의 포로로 전략한다. 그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가 소유한다고 생각한 대상 그 자체가 되고, 자신의 엿보기 시선에 의해 역으로 엿보기의 대상이 된다.

엿보기의 주체는 자시 시선이 자신의 것이라 환상 속에서 그 유혹에 걸려들지만,

그 유혹의 시선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다. 그는 봄으로써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패션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사람들을 '한 가지 모양'에 몰두하게 하는 집단순응주의와

'새 것'의 패티시즘을, 작은 차이에 목숨을 걸게 하는 사소성의 나르시시즘을,

그리고 이 나르시시즘을 무한히 착취하는 분별없는 소비문화를 조장한다.

"이게 요즘 유행입니다"라고 옷가게 주인은 말한다.

"이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당신은 앞으로 최소한 두 달 동안 촌놈을 면할 수 없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만인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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