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치 하늘이 무엇 하나 덮어주지 않음이 없듯이

마치 땅이 무엇 하나 실어주지 않음이 없듯이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첫 페이지를 넘기면서부터 마주하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제목을 보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문장이 섬세하고 어렵지 않은 에세이 였다.

고향에 대한 생각이나

자연에 대한 표현이 섬세하였다.

특히 안양천에 대한 글이 기억에 남는다.


고향은 없다. 고향은 다만 내 추억 속에만 있다.

지금 그곳에 있는 고향은 아버지의 헐벗은 무덤을 안고

늙은 어머니의 초점 잃은 퀭한 눈을 안고

오늘도 창백하게 낡아가고 있을 뿐이다.

푸른 숲 그늘을 노래하던 매미는 잠시 자신이 허물을 벗던 나무둥치,

그 메마른 허물 곁에 앉아 본다.

한때는 그의 세계였던 허물,

여름과 녹음을 향한 꿈, 끝없는 비상의 꿈이 배태되던 허물은

이제 하얗게 바랜 흔적만으로 매달려 있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158

봄부터 지금까지 나는 지칠 줄도 모르고 안양천과 놀고 있다.

나는 문명의 개숫물이 흘러 내려가는 이 거친 저지대에서 잠시 숨을 쉰다.

이런 휴식도 어쩌면 내 존재에 있어서는 불성실과 도피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만한 휴식도 없이 어떻게 이 곤고한 세월을 살아간단 말인가.

이제 초가을이다. 안양천의 뿌연 흙빛은 어느덧 다시 녹색의 풀빛들로 바뀌었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풀더미 아래에는 아직도 큰물의 상처가 뿌옇게 혹은 시커멓게 남아 있다. 그래도 안양천은 지난달보다 훨씬 더 차분해졌고 파란 하늘 아래에는 군데군데 코스모슥가 피어 그림처럼 고운 정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제 그 코스모스도 쓰러져 눕고 풀들도 누렇게 시들어 본격적인 가을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겨울이 오면 이 헐벗은 안양천에도 눈이 올 것이다.

나는 눈 덮인 안양천의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그때 자전거 바퀴 자국이 난, 하얀 길을 입김을 뿜으며 걸어가 보고 싶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158

하천은 생각보다 폭이 넓었고 시원하게 조성된 하천 부지에는

갈대와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뚝방 아래 농구코트를 가로질러 곧바로 물 가까이 접근하니

탁한 오수의 냄새가 풍겼다. 결코 좋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그 냄새는 조그마한 소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추억의 냄새이기도 했다. 잠자리채를 들고 종일 철다리 아래 개천가를 쏘다닐 때 시커먼 도랑에서 나던 그 잊혀졌던 냄새를 나는 모처럼 다시 맡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 검은 물 위로 야생 오리들이 줄을 지어 이 기슭에서 저 기슭으로 미끄러지듯 헤엄치고 있었다. 봄이라서 그런지 하천부지는 온통 연녹색이었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158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상처'에 대한 내용이다.

이렇게 사고하는 저자의 시선이 철학적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런 생각의 전환 가운데 상처를 극복해 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처를 상처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극복이라는 의미로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정초에 컵퓨터를 고치겠다고 연장을 다루다가 무심결에 손을 다쳤다.

작업에 너무 취해 있었던 탓인지 손이 좀 쓰리다는 것만 느꼈는데 나중에 보니 컴퓨터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놓았으나 움직임이 많은 부분이라 제대로 붙어 있지를 않았다. 아물다가 피가 나고 또 아물고, 딱지가 앉다가 떨어지고 또 딱지가 앉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 상처를 다스리면서 나는 마음에 난 상처를 생각해 보았다.

우연한 일상일 수도 있고 또 그 순간을 자극한 어떤 마음의 상처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더치고 하는 과정이 몸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167

컴퓨터를 고치다 다친 손의 상터를 통해 내면의 상처를 생각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나였다면 아마 자신의 실수를 탓하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이 작은 실수도

그럴수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무너질듯 자책을 했을 것 같다.

요증 더 힘들어서 그런지 그런 생각이 너무 쉽게 찾아오는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나보다 그런 내면의 상처를 인식하고 이겨내는 힘이 강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러한 과정에서도 저렇게 또 다른 시선의 생각을 할 수 있던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막연하게 인간에게는 얼마간의 상처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늘해왔다고 하다.

하지만 나는 할 수 만 있다면 그러한 상처 하나 받고 싶지 않다,

어쩌면 요즘 너무 지쳤기 때문일까.

내가 나를 돌보기도 지치는 날들이 많아서

그냥 편히 쉬고 싶고, 더 이상 상처로 아파하고 싶지도 않다,

나의 몸도 마음도 어디하나 상처 받지 않고 평안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상처를 바라보는 저자의 표현은 인상적이었고, 공감이 되었다.

아무런 상처 없이 고이자란 사람의 시선은 사물의 표면에만 머물기 쉬다.

인간사의 다양하고 미묘한 내정은 제가끔의 상처를 통해,

더 정확히 말한다면 상처를 다스리면서 형성된 경험세계를 통해 비로소 인지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기도 하다.

그러나 너무 심한 상처는 때로 그것을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의지 자체를 압살해버리기도 한다. 실제 세상에는 치유할 수 없는 상터를 안고 그 고통에 짓눌려 한평생을 불행히 살다 떠나는 사람이 많다. 할수 만 있다면 상처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상처는 우리가 임의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상처 그 자체는 대부분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불행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처를 극복하면 우리는 그 우연성과 개별성을 넘어 필연성과 보편성을 갖춘,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지닙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168

상처를 받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살아가는 과정에서

마음이 상처, 몸의 상처 한 번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상처는 받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 라는 생각도 든다.

상처라는 주제에 대해 저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상처라는 것이 의미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극복이라는 단어가 함께 존재할 때 일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그것에 눌리지 않기 위해 극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산북스의 사무사책방 시리즈를 읽으며

이렇게 우리나라에도 좋은 책들이 많이 있구나라는 생각이들었다.

주로 읽었던 책이 외국작가들 책이었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이야기가 다긴 책을 더 자주 찾아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혹시나 제목을 보고 어려울 것이라고 먼저 생각할 수 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고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