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 - 90년대생이 말하는 90년대생 이야기
이묵돌 지음 / 메가스터디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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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90년대 생이 말하는 90년대생 이야기’이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마카롱 사 먹는데 이유 같은게 어딨어요?’ 이다. 처음에는 ‘마카롱이 왜 여기서 나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마카롱’을 사 먹는 것은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 중 하나였다. 기성세대가 마카롱을 보고 ‘요즘 젊은것들의 사치스러운 입맛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돈 벌어먹기도 힘든 상황에서 티끌을 모아도 부족한 판에 하나에 몇천원씩 하는 (990원도 있지만) 마카롱이나 사 먹고 있기 때문이다.

맞는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아, 그래 우리가 사치스러웠어’라고 생각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아 기성세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이해하는 정도 그런데 나는 여전히 마카롱이 좋고 그게 사치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치라는 단어를 이럴 때 써야 할 까 고작 작은 디저트가 몇천원씩이나 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몇천원에 내가 만족하고 즐거운 시간을 즐길 수 있다면 그 순간 내가 기쁠 수 있다면 몇천원 보다 값진 것 아닐까. (마카롱을 엄청 좋아한다.) 나는 나를 돌아보고 돌볼 수 있는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작은 소소한 기쁨을 좋아한다. 작고 소소한 기쁨, 마치 옷은 못사고 예쁜 양말을 고르며 즐거워하는 기쁨, 여행은 못가도 엽서를 구매하며 즐거워하는 기쁨 나는 이런 것들을 사치라고 하기보다 나를 위한 작은 돌봄이라고 말하고 싶다.

밋밋하고 추레한 삶에서 아주 작은 특별함이나마 부여해주는 것 같아서,

어쩌면 우리가 그 조그만 달달함 한 조각을 위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패션도 교육도 문화도 교육도 달라지고 변화되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변화된다고 말하며 끊임없이 달라지지만 마치 원을 도는 듯한 변화일 것 같다. 완벽한 변화, 완벽한 차이라기보다는 분명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은 공유하며 변화되는 것 같다. 원은 원인데 어떤 세대는 좀 더 큰 원을 그리고 어떤 세대는 타원을 그리고 어떤 세대는 한쪽으로 원을 그리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서로 달라 갈등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왜 그런지 이해하기 어려운 세대 간의 차이라고 하지만, 결국 그 이해를 못 받는 세대는 기성세대의 아이들이지 어디 별나라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 우리는 노력하고 있다. 당신들이 늘 해왔던 것처럼. 또 나름의 다른 방향으로.”

한 세대의 아이들은 그 시대에서 나름으로 고민하고 나름으로 노력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키우고 지원해주시느라 고생하시는 부모님 세대. 즉, 기성세대도 그 시대 가운데 그들의 직장에서 자신들의 방법으로 싸우고 노력한다.

이렇게 각 세대는 서로에게 주어진 상황과 방향에 따라 그 시대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노력하며 지내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세대’라는 말이 따로 주어지며 서로 다른 방향과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다름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기에 그리고 이런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에 이렇게 세대를 언급하는 책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성장과정으로 자라난 다음에 어른이 된 세대를 이해하려고 하면 잘 이해할 수 있을깨?

어쩌면 세대 간의 이해는 다 커서 성인이 되어온 세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줄어드는 게 아니라 이전에 아이와 부모로 있을 때 그 관계에서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그 아이들의 문화를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이를 키울 때는 미래를 바라보며 요즘 학원은 예전 학원은 고등학교, 대학 등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건 결국 우리 아이가 살아갈 이전 세대의 시선으로 나오는 말이다. 그런 정보를 알아가는 것도 준비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 이전에 지금 우리 아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요즘 애들은 어떤 것을 주로 하며 왜 그런 것을 좋아하는지 요즘 보는 매체 등은 무엇인지 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울면 핸드폰을 보여주고 폰과 함께 큰 아이에게 넌 왜 핸드폰만 보냐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모순이 아닐까. 실제로 적용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을 알지만 어릴 때는 우는 것을 달래려고 핸드폰을 자주 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폰 과 함께 크는 아이들에게 너는 왜 책은 안보고 폰 만 보냐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된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그런 과정과 문화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 같이 사는데 이해가 안 된다고 어른이 된 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이 된 다음에 특정 세대의 특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세대가 자라나는 어린 시절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그 아이들의 부모님 세대들이 만든 문화가 가운데 아이들은 자라난다. 아이들이 이상한 특징이나 문화를 만들며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을 받아 나타난 특징들이 서로 다른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애들이 이상하거나 다음 세대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빠르게 발전되는 사회와 매체만큼 아이들도 그 빠름에 빠르게 적응하고있고 어른들이 무심코 하는 그 한마디가 한마디가 아이들이 커 가는 데 영향을 준다. 그러니 그 빠른 변화와 문화를 그저 바라보고 있다가 요즘 애들은 참 이상한 애들이야 하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닐까. 같은 시대라고 해도 자신의 가치관과 적응된 삶 가운데 살아가기에 아이들이 어떤 가치관과 생각과 문화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못 보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문제에 자신의 고민에 집중하여 생각하기도 바쁘기에 오히려 그런 노력이 한 ‘ **세대가 온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방향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세대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알아가기 위해서는 어른과 아이가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며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우선시 되고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나는 당신들이 억지로 힘들어가며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어떤 세대가 아니라

어떤 시대가 지닌 감정, 좀 더 구체적으로는 슬픔이다.

우리의 슬픔이 곧 당신들의 슬픔이 되고, 당신들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 된다.

책을 펼치기 전, ‘왜 자꾸 90년대생 빼고 90년대생 이야기하세요?’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90년대생이 없는 90년대생 이야기는 결국 오해와 잘못된 이해, 편견만 불러올 뿐이다. 90년대생을 알고 싶다면 그 세대와 소통을 하고 알아가야 한다. 즉 90년생이 없이 90년대생 이야기를 하고 90년대생과 소통하기는 싫어하면서 90년대생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단팥빵을 먹어 본적도 만들어 본적도 없지만 나는 단팥빵에 대해 엄청 잘 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지만 ‘90년생 ~~’ ‘90년대생 ~~’ 이렇게 ‘90’이라는 숫자가 앞에 오는 책이나 카드 뉴스, 이야기들이 모든 90년대생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런 이야기들을 읽고 모든 90년대생들이 공감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세대 간의 차이도 크지만 개인 간의 차이, 지역 간의 차이, 환경과 성장과정의 차이도 매우 크기 때문이다. 저자도 이 책으로 모든 90년대생들은 이렇다라고 단정하며 정의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기성세대가 이 책을 통해 90년대생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오히려 나는 당신들이 억지로 힘들어가며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어떤 세대가 아니라 어떤 시대가 지닌 감정, 좀 더 구체적으로는 슬픔이다. 우리의 슬픔이 곧 당신들의 슬픔이 되고, 당신들의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 된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어떤 세대가 아니라 어떤 시대가 지닌 감정, 좀 더 구체적으로는 슬픔이다. 라는 표현이 이해가 되어 좀 슬펐다. 어느 세대라고 슬픔이 없고 어려움이 없겠는가. 그렇지만 각 세대마다 가지고 있는 슬픔의 유형이 다른 것 같다. 우리는 경제적 보릿고개는 겪은 적이 없겠지만 한 편으로 ‘정서적 보릿고개’를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세대라고 선을 긋고 모두 공감하는 부분은 아니고 세대 이전에 각 개인 마다의 슬픔도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세대’라고 말하며 서로 공감하고 서로 이해하는 부분이 있고, 세대라는 구분 가운데 ‘세대 간의 갈등’ 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그만큼 비슷한 시대를 비슷한 나이로 살아온 ‘세대’가 가지는 공통점과 문화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같은 세대의 저자가 우리 세대를 다루고 있는 글이기에 읽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외로워도 슬펴도 울 수 없는 캔디 증후군’,‘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 했으면서’,‘우리는 부모님의 부캐가 아니에요’,‘우리에게 말걸지 않는 택시가 필요한 이유’ 등은 제목부터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읽는 과정에서 ‘잘모르겠다’는 말이 우리 세대의 유행어라는 표현에 ‘이게 유행어였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이나 개그프로그램에서 나오지 않아도 우리도 모르게 자주 사용하는 말이었다. 누군가가 유행시키거나 알리지 않아도 자연스레 많이 사용하는 ‘잘 모르겠다’ 는 유행어. 생각이 없는게 아니라 정말 잘 모르는 상황인 경우도 있고, ‘못하겠다, 싫다’는 표현을 애둘러서 좋게 표현한 긍정어 일수도 있다. 이 말을 직접한 다면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다는 이야기가 직구로든 변화구로든 다시 돌아올 테니까 이를 피하기 위한 언어적 표현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혹은 이유가 없어서 (이유가 필요할까?) ‘잘 모르겠다’는 말을 정말 많이 사용하는 세대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납득이 되는게 90년대생들은 기성세대처럼 발전의 시작에 있지도 않았고 지금 ‘z세대’처럼 아주 빠른 문화에 있지도 않았다. 즉 ‘어정쩡한 속도와 변화’를 경험하는 세대인 것 같다. 그런 어정쩡함 가운데 초등학교 때 배운것과 중고등학교 때 배우는 내용의 초점이 달라지고 혼동을 겪기도 했다. 중간에 갑자기 다른 시험체계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도 했다. 우리가 지나온 과정도 사회도 명확치 않은데 우리들이 무언가 명확하게 표현하고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모든 부분에서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다. 성교육에 관한 부분이나 노력에 대한 부분, 연애에 대한 부분, 개인적인 경험의 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고 서로 엇갈린 의견일 때도 있고 모르겟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완벽히 똑같을 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는 없다. 이렇게 세대를 다루는 책을 같은 세대가 읽는 것은 서로 같은 세대라고 해도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간의 노력도 내가 모르는 내 세대의 이야기도 있으니, 서로 다른 세대간의 이해 뿐 아니라 서로 같은 세대들도 알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그렇지만 애쓰며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가지며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통하고 공감하는 정도 였으면 좋겠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 했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 했으면서’이다.

이 부분은 정말 공감이 가면서도 이 세대가 가지고 있는 아픔 중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해라’ 안 듣고 산 사람이 어디있겠느냐 마는 ‘네 꿈을 찾으라.’,‘뭘 좋아하느냐’,‘하고 싶은 것을 해라’ 라는 말이 아닌 ‘공부만이 먹고 살 길이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으면 자란 아이들이 90년대 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것’은 신경을 안 쓰다 보니 정작 그 먹고 사는 인생을 살아가는 ‘나’도 신경을 안 쓰며 지내왔다. 청소년 시기, 초등학교 시기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삶을 또는 내가 원해서 한 선택이 있었는지 묻는다면 요즘 그런 생각이 더 들지만 잘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이 세대가 ‘공부만 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고 더 느끼는 것 이 아닐까.

그렇다고 공부를 엄청 잘하느냐 좋은 대학을 갔느냐 라는 질문이 온다면, ‘97점 맞았어도 나머지가 100점이면 꼴등 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모두 나름으로 자신의 상황에서 그 여건 가운데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모두가 열심히 했기에 모두가 같은 결과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열심히 한 정도로 평가되고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시험 결과니까. 아니, 그 결과에 따라 세워지는 등급이니까. 그렇지만 이 세대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열심히 한 것은 사실이다. 구체적인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돈은 못버는 똑똑한 세대’라는 표현을 들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라는 것에 나름으로 각자 매달리며 지내왔었기에 이 표현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정확한 방향성도 모르고 답답해하면서도 이상하게 무조건 노력만 하는 열정 없는 노력중독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더 아파온다.

책에 있는 내용이, 내가 배운 기하벡터, 미적분이, 그렇게 읽고 쓰며 외운 영어 문장이 내 삶의 다른 일들을 직장에서 살아가는 과정을 나를 알아가고 삶을 준비해가는 과정을 알려주지 않는 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정확히 말해 알아갈 돌아볼 틈이 없었다. 고작 ‘공부’ 혹은 고작 ‘시험’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고작’이 삶의 전부처럼 열심히 한 과정이 있기에 그것을 그렇게 말하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더 미어진다. ‘공부한다,’‘성공한다’ 이런 것을 앞에두고 앞으로 달리는 법만 배우고 그렇지 않으면 혼나고 실망하니 그 실망감이 싫어서 혹은 앞으로 가는 법만 배워서 앞만보고 가도 왜 앞만보고 왔냐고 그동안 뭐하고 온거냐고 혼내는 일은 그만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성공이 아닌 행복은 남이 아닌 나를 바라 볼 수 있도록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위대한 성공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네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누구에게는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조차 거대한 성공이라고,

반드시 남들만큼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그런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 수능을 마치고 보면 결국 대학도 네가 선택했고 네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해야지가 다가온다. 음 그래 그런데 그때는 이미 다른 것이 없다.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그래서 막막하고 그때부터 삐걱대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 삐걱대기 시작하면 뭐 먹고 살려는지 결혼은 하겠는지 등의 화살들이 날아오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리는 언제쯤 ’나‘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까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니 그 이전에 내가 무엇이 하고 싶은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언제가 행복한지 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상황인지 시간이 주어진 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도전해보고 싶은 것은 있는지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해소하는지 등. 사소한 것 같지만, 내가 나를 잘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정작 나는 그런 사소한 질문을 생각해볼 시간도 내 마음이 힘든지 아픈지 돌아볼 시간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강박감에 나도 모르게 나를 매이고 있었고 그렇게 아픈 마음을 아프다 말도 못하고 사회적 분위기로서 받아들이면서 크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에는 인성교육, 정서교육 등이 교육에서 중요시 되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기에, 어쩌면 이제 성인이 되었다는 90년대생들에게는 ’나‘를 돌아보고 ’나‘를 찾아가고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기 위한 시간이 이전과 이후 세대보다 더욱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제 좀 나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행복할 수 있게. 뭐 먹고 살려그러냐 그걸로는 돈 도 못벌고 라는 말은 많이 나오겠지만, 물론 모두 맞는 말이지만, 그런 측면과 함께 지쳐 있는 이 세대를 좀 봐주었으면 좋겠다.

행복이란 돈으로 정의되지도 않고 돈이 행복을 정의해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노력이라고 해서 모두 만족할 만큼 먹고 살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많이 들은 말들이 가치관에 영향을 주듯 아무렇게나 라고 말하며 경제적 여건을 등한시 할 세대도 아닐 것 같다. 그러기에 경제적 여건 기반도 필요하되, 좀더 나를 돌아보고 하고 싶은 일도 하며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면 좋을 것 같다. 나중에 마음에 한이 되지 않게 앞을 보고 달려야 한다고만 말하지 않고 옆의 풍경도 보고 가끔은 앉아서 쉬어도 되고 꽃향기도 맡아도 된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바람을 이길정도로 열심히 달리다보면 바람처럼 빨라지겠냐는 이야기 보다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여유를 주었으면 좋겠다. 바람은 바람의 속도로 가고 나는 나의 속도로 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길이 힘들고 지치지 않도록 서로 위로해주고 응원해주는 격려자로 함께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세대는 이러니까 우리 좀 이해하세요’라고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90년대생은 부모님 세대인 기성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아 여기는 또 신세계네’ 라는 생각이 드는 ‘00년대생’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만 이 샌드위치 세대가 꽉 눌린 납작한 샌드위치가 아닌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로 있으려면 90년대 생 뿐만 아니라 다른 세대들이 90년대 생을 이해하는 과정이, 세대 간에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이해의 과정이 성인이 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어린 시절 지금의 아이들이 만들어 가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서도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유명한 사람이나 돈 많이 버는 사람 말고 자신의 부모님을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모든 세대가 서로 좀 돌보면서 이제는 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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