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갑자기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아무리 집중하려고 노력해도 1분이상 집중을 할 수 없었다. 3개월이 지나 조금은 나아졌지만 나의 집중력을 예전 수준으로 되돌릴 수 없었다. 도대체 나의 집중력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나는 내 자신을 탓하면서 해결책을 찾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스마트 폰, 유투브, SNS 등 나의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것들을 멀리하기 시작하자 서서히 집중력이 돌아왔다. 이 책을 읽고 ‘집중력 저하‘가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집중력 저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환경에서 파생된 문제로, 복잡한 환경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어 좀더 거시적인 접근이 필요한 문제이다. 심각한 것은 미래세대이다. 거대 테크 기업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한 세대들은 이미 우리 곁에서 집중력이 망가진 상태로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개인적으로 교육현장에서 강의에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왜 집중하지 못할까?˝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내 자신도 답답했었다. 이제 집중력 문제가 구조적이고 다면적인 것을 알았다. 식습관, 수면, 스트레스(교육시스템, 경제) 등 다양한 요소들을 살펴봐야 한다. 개인적 노력도 이런 여러 요소들을 개선해 나아가는 노력이 필요함을 알았다.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흐릿하다. 중, 고등학교 때에는 집에 한국단편소설집이 있어 수시로 읽곤하였다. 학교의 시험보는 기간에도 소설책들을 읽곤 했는데, 책을 읽다 잠이들면 아버지가 치워주시긴 해도 혼내시는 법은 없었다. 그런 내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소설책은 철저히 읽지 않았다. 그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때 읽었던 소설의 느낌들이 아직도 나의 내면 깊숙히 살아 있었나 보다. 40년이 지나 읽은 이 소설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읽는동안 가슴 아래에서 수많은 감정의 스펙트럼이 꿈틀대고 올라와 읽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나이가 든 지금은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가 힘들다. 글로써 표현되는 것들이 썸뜩하다. 인간 내면 의식과 감정의 결들을 마치 해부용 칼로 도려내는 느낌이다.
우리는 과체중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상 ‘다이어트‘를 한다. 절식을 해보면 일주일을 가지 못한다. 운동을 해서 체중 감량에 성공해도 요요로 다시 몸무게가 늘어난다. 이런 악순화에 빠지면 자기의 의지력을 탓하고, 신체에 대한 혐오감으로 우울증을 느끼게 된다.이책은 최근 기적의 비만 치로제(오젬픽, 위고비)에 대해 궁금해서 읽게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과체중의 원인에 대한 언급이다. 즉 현대의 과체중 문제를 일으킨 생태계를 말하고 있다.비만에 원인으로 건겅식을 대체하는 식품업계의 초가공식품이 우리에 식단을 점령하고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과체중 문제를 약물에 의존해서 해결하려고 하는데서 오는 부작용과 한계에 대해서 말한다. 환경적으로 과체중을 건강식과 운동으로 바꾸기에는 너무나 힘든점이 많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먹는 습과부터 의식적으로 바꾸어 나가고, 건강을 위한 운동습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체중감량을 위한 다이어트보다 건강한 식단과 운동 습관을 만드는데 더 집중해야겠다.
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 뇌구조의 변화를 뇌의 신경가소성 이론에 근거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인터넷의 발달에 따른 풍부한 정보에 대한 접근에 용이성 이라는 이점 대신에 사고의 피상성이나 집중력의 상실로 인한 산만함이라는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도저히 집중이 안돼서 읽지 못한 경험이 있다. 이같은 상태가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몇 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래서 유투브와 SNS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서서히 회복을 했다. <재능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라는 책에서 뉴런과 미엘린의 변화를 통한 뇌의 구조적 변화에 따른 재능의 발전과정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개인적차원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에 기저에는 신경가소성의 원리가 중요하다. 이어서 <산만함의 탄생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읽어 보고자 한다.
생각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책이다. 정신적 깊이라는 것은 없고 즉흥적인 마음뿐이라는 주장이 층격적이다. 책을 읽으며 공감이 되기도 하지만 의문도 든다.저자는 ˝우리는 누구도 사람과 사물로 이뤄진 일상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이 세상에 의식적인 생각과 무의식적인 생각이라는 것도 없다. 그리고 의식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생각 같은 것은 없다. 단 한 가지 유형의 생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생각에는 각각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의식적인 판독과 그 판독을 만들어내는 무의식적인 과정아다.˝우리에 의식은 단절적이다. 즉 수면과 비수면 상태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 경계를 허물고 다른 각성에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불가의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불교의 오온과 유식사상과는 어떠한 충돌과 이해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이 더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