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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짓,말 - 결코 시시하지 않은
유세윤 지음 / 김영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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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진실 사이,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결코 시시하지 않은 페이크 에세이 <겉짓말>을 만나다.

 

 

 

잘 지은 제목 하나 책을 먹여 살린다-

내게 좋은 제목이란 책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제목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또 작가의 의도가 무엇일지 유추하다보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이름이 정말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책에 있어 그 중요도가 더 높은 것도 같다. 개인적으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참 좋아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훌륭한 제목은 단연 가장 큰 매력 포인트다. 서술 어디에도 달과 6펜스가 등장하지 않지만,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이 제목이 너무나도 절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제목에 집착하는 독자가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책을 출판할 때 제목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처음 <겉짓말>을 접했을 때 제목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겉짓말'이라는 단어는 1차적으로 거짓말을 연상케한다. 페이크 에세이라 소개한 이 책의 장르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책을 읽다 보면 거짓말 같지만 거짓말이 아닌, 혹은 진실 같지만 진실이 아닌 듯한 묘한 줄다리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제목을 구성하는 세 음절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겉'이 유세윤의 드러난 모습 뒤에 숨겨진 비밀들을 뜻하고, '짓'이 그의 행동들을 의미한다면 '말'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칭한다고 한다. 이렇듯 다의적인 제목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풍부한 감상을 가능하게 하고, 또 작가의 의도에 보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한다.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이 책에는 선뜻 손이 갔던 이유다.





"나… 눈물 나오는 약 좀 구해주라."

"급한 거냐?"

놀랍게도 눈물이 나오는 약은 존재했다.
그 약의 이름은 sochani-TR.
- <겉짓말> 74쪽






sochani-TR이라는 약 이름을 보자마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중 하나다. 처음에는 소찬휘의 Tears를 연상케하는 작명이 재기 넘친다는 정도에 생각이 미쳤지만, 에피소드를 읽어 나감에 따라 대중에게 SOS를 보내야만 했던 당시의 어려움이 피부로 다가오는 듯했다. 당시 라디오스타 본방을 보면서 목격했던 그의 눈물에 짐짓 당황하면서도 그러려니 넘어갔었는데, 문득 아픔마저 소비되는 그들의 일상에 숙연해졌다. 그러면서도, 이 책이 특별한 연예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느껴진 건 이 책을 관통하는 외로움의 정서 때문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혼자 느끼는 감정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다 같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사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연예인도 그 예외는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정체 모를 공감대가 형성된다.





나는 이렇게 우울감이 찾아올 때마다 혼잣말을 한다.

"그럼 그렇지,
한동안 많이 뜸하다 했네요~
어서 와요~"

"아이고~ 이번엔 왜 이렇게 또 금방 오셨대?"
- <겉짓말> 167쪽






한 번 집어든 책을 단숨에 마지막 장까지 읽어 내린 건 200쪽이 채 안 되는 얇은 두께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짧은 호흡으로 잘 엮어내 읽기에 편했고, 생동감 넘치는 서술 덕분에 흥미진진한 감정을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나를 집중시켰던 것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쿨하게 적어 내린 활자 속에서 발견한 유세윤이라는 사람이었다. '페이크 에세이'라는 낯선 장르를 택한 게 처음엔 의아했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 수 있었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적어내렸다면, 또 슬픈 사연이라 하여 눈물 젖은 톤으로 풀어냈다면 오히려 그저 읽고 지나쳤을 지 모른다. 그렇지만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익살 속에서 그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꺼내 놓았고, 그 과정에서 그의 삶에 한발짝 다가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코 시시하지 않은' 에세이를 표방했지만, 시시하지 않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꽤나 묵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삶의 굴곡을 담고 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끝없는 무게나 우울감과는 거리가 멀다. 최고의 개그맨 자리에 오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적절한 선을 지키며 책의 전체적 분위기를 몰랑몰랑하게 만든다. 화룡점정은 마지막에 등장한다. 아들 민하에게 쓴 에필로그로 글을 매듭짓는데, 이러한 배치는 모든 이야기의 끝에 아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밀을 공유하는 듯한 느낌의, 굉장히 인상적인 마무리였다.



나름 개그콘서트에 나와 "칼라파워!"를 외치던 시절부터 저자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이 책의 출판이 한편으론 믿기지 않는다. 처음 출판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꽤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것 같다. - 아니, 유세윤이 책을?! - 그렇지만 일단 첫 페이지를 펴면 궁금증이 생겨 끝장을 볼 수밖에 없다. 기분이 좋은 사람에게는 즐거운 익살이 되고, 우울한 이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며 무념무상인 이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완독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잠시 시간 내어 읽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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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ㅣ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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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가 된 과학이 지배하는 미래, 호모 사피엔스의 길을 찾다.






포털사이트를 이용하다 보면 신기하리만치 내 취향과 잘 맞는 컨텐츠들이 메인 화면에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관심 있는 분야의 기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쇼핑란에는 사고 싶었던 물건이 추천 상품으로 등장한다. 일찍이 네이버를 비롯한 각 포털사이트들은 이용자들의 활동 및 검색 내역을 수집한 후 내부의 알고리즘을 통해 패턴을 분석하여 개별 이용자의 취향에 맞는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편리성과 만족도를 제고하려는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때때로 '나'를 간파당한 것 같아 묘하게 불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빅데이터와 통계가 많은 이들의 관심사로 떠올랐고 그 중요도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이를 반영한듯 대형 서점에 가면 빅데이터에 대한 기초적 내용과 활용범위 등에 대한 책이 코너 한 켠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이처럼 데이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흐름 속에 <사피엔스>로 유명세를 탄 유발 하라리가 가세했다. 기술의 유망성을 조명한 여타의 책들과 달리, <호모데우스>는 기술 발전의 미래를 철학적 내지 인류적 관점에서 주목하였다. 지구의 주인으로 군림하며 진화를 거듭한 인간이 스스로를 속박할 기술 발전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인지 깊은 통찰에 특유의 위트를 가미하여 풀어낸다. 그저 '인류세'에 안주하다가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지배 받는 부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일종의 디스토피아가 <호모데우스>를 통해 펼쳐진다.




지난 세기 과학자들은 사피엔스의 블랙박스를 열어 그 안에 영혼, 자유의지, '자아'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호모데우스> 387쪽





오랜 시간 인류는 스스로를 타 생물종과 다른 존재로 인식해왔다. 과거 농업혁명 당시에는 유신론적 종교가 그 근거를 제시했고, 과학혁명이 도래하자 인본주의 종교가 인류의 우월성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발견들은 이러한 믿음이 절대적 진리가 아님을 시사한다.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적 주체로 여겨졌던 인간이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는 객체에 불과하다는 것, 저자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건강과 영생이라는 목표를 위해 생명공학 연구에 매진해왔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으며 오랜 목표를 달성하는 듯 보였지만 새로운 발견들은 예상치 못한 흐름을 유발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영혼이나 자아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뉴런의 반응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알고리즘일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현대 사회의 제도들과 평등한 개인이라는 기본 이념이 자유의지를 전제하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자유의지의 부정은 곧 개인의 몰락이자 사회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과학의 발전, 특히 생명공학의 발전은 존재론적 고민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공학'을 넘어선 '철학'의 영역으로 논의를 끌고 와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저자는 위와 같은 현실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은 '데이터'라 이야기한다. 페이스북 등의 SNS는 각 개인의 이용 패턴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행동 양상을 예측하고, 구글은 검색엔진을 통해 정부 기관보다 더 빨리 미래를 예견한다. 데이터의 활용 범위가 확대되고 그 기술이 보다 고도화될 경우 개인의 모든 행동은 예측 가능한 범위 내로 들어오게 된다. 그 결과 각 개인은 단순한 양적 존재로 치환되며 개인의 선택은 '의미'를 상실한다. 또한 알고리즘이 인간을 대체하는 상황에서 그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소수의 기술자들만이 독점적이고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고, 그에 따라 불평등이 고착화될 것이다.







<호모데우스>는 단순히 기술 발전으로 도래할 디스토피아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고민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그저 직업이 몇 백 개 사라지고 일자리 몇 만 개가 줄어든다는 등의 경제 논리만으로 거대한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잃을 게 너무나도 많다. 당장 '평등한 개인'이라는 전제가 무의미해지면서 계층이 공고해지고, 이너서클에 들어가지 못하는 개인은 그저 머릿수를 채우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남을 지 모른다. 그보다 심각한 건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 야기할 혼란이다. 인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또 무력화된 인간은 무엇으로부터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가.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지배 당하는 인류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최근 사회적 맥락에서 나타나는 해체주의적 흐름과 그 반동을 살펴보면 저자가 제시하는 미래상이 그리 허황되지 않게 느껴진다. 당장 미투운동만 하더라도 그렇다. 사회가 고수해 온 관성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 구성원 간의 대립은 극렬해지고 인류의 전유물인 '상호주관적 연결망'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전향적 태도로 '유연한 협력'을 추진할 때 해체의 작업이 이상적인 방향성을 지닐 수 있을 테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아 보인다. 내부적 충격만으로도 분열이 상당한 수준인데 외부적 충격으로 인해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유연한 협력이 가능하다고 보는 건 지나친 낙관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모든 시나리오는 예언이라기보다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이런 가능성들 가운데 어떤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 <호모데우스> 542쪽





저자의 디스토피아는 반작용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든 알고리즘의 작동 때문이든 욕망을 가진 인간이 과연 오랜 시간 향유해 온 권리와 생활 기반이 박탈당하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것인가? 산업혁명 당시 러다이트 운동이 대세를 바꾸지 못했던 건 수단이 강렬했음에도 그 세가 미약하여 결정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교훈 삼아 데이터에 의한 지배가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모든 인류가 결집을 이루어 강력한 반작용을 유발한다면 하라리식 디스토피아는 공상과학의 영역으로 남을 여지가 있다. 저자 역시 이를 의식한 듯 책의 말미에 자신의 논의가 '선언'이 아님을 언급한다.



물론 인류의 결집이라는 발상 역시 한계가 있다. 당장 같은 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도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게 쉽지 않은 상황에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들과 연대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이야기다. 그렇지만 지구 종말이나 외계 세력과의 전쟁을 그린 영화들이 협력을 통한 해결을 도모하는 건 그것이 적어도 하나의 옵션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대립과 반목을 이어가던 사람들도 최후의 순간에는 힘을 모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인류세의 종결을 목도하며 알고리즘에게 주도권을 내줄 것인가, 아니면 호모데우스로의 진화를 이룰 것인가. 혹자가 '특이점'이라 표현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오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보인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 몸을 맡겨야 할 현대인들에게 <호모데우스>는 유의미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전작 <사피엔스>로부터 이어지는 탄탄한 이론과 명쾌한 논증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소제목을 통해 논의의 방향성을 제시하여 이해하기도 쉽다. 열린 결말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인류학과 생명공학, 철학과 역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아우르는 엄청난 통찰을 엿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수확이다. 시간을 여유롭게 두고 긴 호흡으로 읽는다면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사회를 살아갈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인간의 모든 대규모 협력은 결국 상상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반한다. - <호모데우스> 203쪽


18세기에 인본주의는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신을 밀어냈다. 21세기에 데이터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인간을 밀어낼 것이다. - <호모데우스> 5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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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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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정원은 또 하나의 세계.
재독 철학자 한병철 씨가 전하는 '행복한 나날에 대한 시론',

<땅의 예찬>을 만나다.









어릴 적 베란다에서 강낭콩을 키웠다. 작은 우유팩을 화분 삼아 씨앗을 심은 게 시작이었다. 오래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어린 날의 비관을 뚫고 강낭콩은 계속 자랐다. 자라난 강낭콩을 옮기기 위해 화분을 구입했고 멀리서 흙을 구해왔다. 옮긴 자리가 좋았는지 강낭콩은 그 후로도 끝없이 자라서 그저 호기심만이 가득했던 철부지 주인에게 꽤 많은 열매를 남겨주었다.



강낭콩이 수명을 다할 무렵, 고추와 토마토가 우리집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씨앗이 아닌 모종이었다. 강낭콩을 위해 크고 긴 화분을 마련해두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씨앗이 떡잎이 되고, 떡잎이 줄기를 뻗어내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금세 자라나는 모종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또 다른 기쁨이었다. 이들 역시 쑥쑥 자라, 계절을 지나 겨울이 올 때까지 여러 번의 수확을 경험했더랬다. 이렇듯 식물을 통해 정적인 순간의 가치를 어렴풋이 배웠기에 한병철 씨의 정원 찬가를 읽는 내내 그가 전달하는 감정이 생경하지 않게 다가왔던 듯하다.

 

 

시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김춘수의 <꽃>이 떠올랐다. 꽃의 이름을 외우고 부르는 작가의 모습에서 김춘수 시인의 시를 읽을 때의 따스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각각의 꽃이 지닌 작은 차이들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하나하나 이름을 기억하는 건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애정을 가진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주곤 했다. 어릴 적 키웠던 강낭콩과 토마토, 고추에게는 물론이요, 지금도 침대에서 함께 잠을 청하는 몇몇 인형들에게 귀여운 이름들을 지어주었다. 니체는 이름 붙이기를 일종의 권력행사로 이해했다지만, 내게 그것은 특별한 관심을 상징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다가온다.


"누구든 정원에서 일하면 정원은 많은 것을 돌려준다. 내게는 존재와 시간을 준다.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이 특별한 시간감각을 불러온다." - <땅의 예찬> 24쪽




시간이 상대적이라고들 한다. 가령 10분이라는 시간이 아침 등교 시간에는 너무나도 짧게 느껴지지만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에 앉아 있는 순간에는 굉장히 길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정원에서의 10분은 어떨까. 느린 성장, 불확실한 기다림, 정원이라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참을성. 그 가운데 시간은 정원 밖의 그것과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다는 게 저자의 이야기다. 각기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식물들에게 획일적 시간 관념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간에 쫓기듯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 정원을 통한 가르침은 또 한 번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렇지만 정원의 시간을 상상하다보면 다른 한 편으로 묘한 기분이 든다. 풍년화의 시간과 버들강아지의 시간을 알게 되면 '특별한 시간 감각'을 배울 수 있을까. 저자는 <피로사회>를 통해 휴식의 가치를 역설한 바 있다. 정원의 시간과도 상통하는 그 가치를 보며 얄팍한 생각이 떠오른다. '과잉'을 야기한 책임을 비단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기에 여유를 찾으려는 개인의 노력이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답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위와 사색이 가능한 일일까.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도태되지는 않을까. 가야할 방향은 너무나도 명확하지만, 쉬이 그 방향을 좇을 수 없다는 건 아이러니다. 한병철 씨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나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내 시간은 여전히 노동시간에 국한되는 건 이 때문인 것도 같다.



"오늘날 우리가 꼭 더 행복해진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점점 더 행복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땅에서 멀어지고 있으니." - <땅의 예찬> 127쪽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 글 잘쓰기로 손꼽히는 분에게 '글 잘쓰는 법'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좋은 책을 골라 필사를 하라는 조언도 기억한다. 만약 한병철 씨에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묻는다면, 그는 어떤 대답을 줄지 궁금하다. 땅과 가까워지라고 할까, 아니면 식물을 키워보라고 할까. 지금 생각하기론 전자일 듯하다. 땅과 멀어진 인간은 식물과 달리 유한한 삶을 살고, 행복과 멀어진다고 그가 이야기했기에.



<땅의 예찬>을 읽어나가며 문득 저자가 부러워졌다. 애정 어린 어투로 '행복한 나날에 대한 시론'을 펴내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름 긴 시간동안 행복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행복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을 던졌지만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명확히 찾지 못했다. 도달할 수 없기에 아름다운 유토피아처럼, 행복도 늘 갈구하기에 아름다운 것인지. 그렇다고 하기엔 저자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달콤해 또다시 행복에 관한 고민에 천착하게 된다.



 




사실 <땅의 예찬>은 즐겨 읽는 류의 책이 아니다. 고전소설이나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찾는 편이기에, 처음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때 얕은 호흡으로 길고 잔잔히 이어가는 전개가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지막 장을 넘긴 후에도 얼마간 난감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여러 번 다시 보고, 인상적인 구절을 기록하면서 차츰 '비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생경하던 여러 꽃 이름들은 나름대로 정겹게 느껴졌고, 단호한 저자의 문투도 친근한 잔소리로 다가왔다. 이 책을 접하는 사람 중 적어도 몇 명은 나와 비슷한 감정을 경험할 것이다. 처음엔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거듭 곱씹다보면 그 안에 녹아 있는 저자의 감상과 철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정원의 풍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곳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면 더더욱 좋다.



180쪽 정도 되는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기에 앉은 자리에서 스르륵 읽어 내릴 수 있다. 정원에서 보고 느낀 것을 덤덤하게 풀어내어 무겁지도 않다. 그렇기에 야단스러운 일상에서 피로를 느끼는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지금은 땅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쁜 삶을 살지만, 이 책을 통해 먼 훗날 적당한 크기의 정원을 꾸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상의 애로를 녹여주는 책이자,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정신 없고 복잡한 어느 날 다시금 찾고 싶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우리는 땅을 보호해야 한다. 보호하는 태도로 대하고, 잔인하게 착취하는 대신 찬양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보호하라는 의무를 지운다. 나는 그것을 배웠고 경험했다." - <땅의 예찬>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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