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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콤플렉스 - 광기가 남긴 아홉개의 초상
강준만 외 / 삼인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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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레드 콤플렉스'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공포심과 그 공포심을 근거로 하여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는 사회적 심리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강준만, 머리말 중에서) 한국의 지배계급이 주입한 레드 콤플렉스는 분명 사회병리적 현상이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언론과 학교를 통해 반공주의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그들의 부족한 정통성을 만회해 왔다.

이 책에서 다루는 9명의 인물만 보아도 한국 사회에서 레드 콤플렉스가 가지는 의미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사회 구성원 누구도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박홍. 그는 과대망상을 지닌 연예인에 가깝다. 그의 망언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분명 사람이 살 만한 사회가 아니다.

이문열. 그는 정치적 허무주의자로 위장한 매우 영리한 보수주의자이다. 그가 가진 어린날의 상처는 더욱 그를 '변경론'에 머물도록 억압한다. 김영삼. 그가 보여주었던 대북정책의 이중성은 바로 우리가 가진 대북관의 이중성이다. 그가 최근에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과연 이 시대의 희극인가? 비극인가? 한완상. 냉전의 덫은 사회주의자만 걸려드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도 걸려드는 것이 바로 냉전의 올가미이다.

김대중. 그는 한국 현대사의 불가사의이다. 그토록 집요하게 빨갱이로 몰리면서 그렇게 끈질기게 다시 살아나는 인물은 유일무이할 것이다. 그가 집권한 현재에도 생명력이 무한한 레드 콤플렉스는 그를 짓누르고 있다. 리영희. 그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이다. '진실'이라는 두 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그는 이 시대의 광기의 우상을 고발한 진정한 지식인이다.

조정래. '태백산맥' 때문에 두 통의 유서를 남긴 그는 한국 사회에서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완성한 '태백산맥'은 이 시대 민족문학의 최고봉으로 추앙받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윤이상. 그의 심오한 음악세계는 '간첩'이라는 두 글자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철저히 유린당했다. '반공'이라는 주술은 인간의 위대한 영혼을 얼마나 유치하게 갉아먹는가?

서준식. 우리의 편협한 잣대는 인간의 사상을 자신의 틀에 끼워 맞춘다. 그가 가진 마르크스주의란 '인간에 대한 사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진정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해야 하는 이유는 '반공주의'라는 미명아래 사회의 다양한 요구가 묵살되고 사회의 불평등한 분배구조가 은폐되며 사회적 약자의 정당한 저항이 봉쇄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복추구란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할 때 비로소 가능해 질 것이다.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진보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자유 민주주의의 정신으로 충분하다. 자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우리의 '레드 콤플렉스' 체제는 이제 종언을 고할 때가 되었다. (강준만,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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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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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 은밀한 것, 차단당하거나 은폐된 것은 신화화되고 공개되고 대중화되지만 공유하는 탈신화화의 지혜를 나누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희생자는 〈노스탤지어〉로 다시 찾아온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다. (중략) 〈희생〉에 몰렸던 이상열기가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이 아니라 문화적 허영심의 거품이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이연호 기자, '모더니즘 영화와의 근접조우' 중에서, 키노 1997년 1월호)

1995년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시네마데끄에서 숭배받던 감독 중 한 명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이 극장에서 개봉되었고 예술영화로는 이변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여 세계적인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외신은 한국 영화 관객의 수준을 극찬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또 다른 걸작인 '노스탤지어'는 관객에게 철저히 외면받고 만다.

2000년 한국에는 이른바 '체 게바라 열풍'이 불었다. 어느 출판사에서 펴낸 '체 게바라 평전'이 열풍의 근원지였다. 그의 평전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의 포스터, 배지, 티셔츠까지 동원되어 열풍을 더욱 확산시켰다. 대학 서점 게시판에 붙은 그의 포스터에는 '떼어가지 마시오. 책을 사시면 포스터도 함께 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여느 인기연예인 못지 않았다. '체 게바라 열풍'은 과연 그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인가? 아니면 문화적 허영심의 거품인가? 결론은 의외로 자명한 것 같다.

'희생'과 '체 게바라'에 몰렸던 이상열기는 은폐되고 차단당했던 신화가 뿜어내던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신화화와 여기에 몰리는 이상열기는 오히려 진지하고 객관적인 접근을 가로막는다. 이 책은 이러한 신화화에 커다란 몫을 차지하고 있다. 상당수의 평전이 인물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체 게바라 평전' 역시 다르지 않다. 저자는 체 게바라의 완전성을 부각하려는 나머지 체 게바라의 주위인물들을 소극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체 게바라만 주위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 자신은 주위사람들에게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분명히 과장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는 분명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특히 내가 그에게서 배우고 싶은 점은 그의 아웃사이더 정신이다. 불가능한 혁명이 성공한 후 중심에 우뚝 선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주변으로 다시 뛰어드는 모습은 주변으로 밀려나기를 두려워하며 오직 중심을 향해 돌진하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열풍이 단순한 유행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내가 중심에 서는 그 날 아무 미련없이 다시 주변으로 향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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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의 시대 - 들뢰즈와 사건의 철학, 소운 이정우교수 강의록
이정우 지음 / 거름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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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는 인물과 사상 1999년 5월호에서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프랑스의 철학자들과 아무 관련이 없는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에 편승해서 그대로 수입되어 형성된 것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와 영·미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별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과 문학이라는 경계의 차이 이외에도 겹칠 수 있는 부분이 제한되어 있다. 한국에서 포스트구조주의가 진지하게 사유되지 못한 것은 이 둘의 구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강의를 그대로 녹취해서 기록한 글로 현장감이 많이 느껴지는 책이다. (특히 책의 뒷부분에 수록된 토론기록은 특히 그러하다.) 다만 제한된 시간에 이루어지는 강의의 특징 때문인지 핵심개념을 제외하고는 언급된 여러개념들에 대한 설명이 다소 거칠다. (아마도 나의 지적수준이 낮아서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다. 다만 이 책만으로 모든 개념을 이해하려는 것은 무모한 생각이다.) 내 생각으로는 이 책을 후기구조주의 입문서로 보기보다는 들뢰즈의 사건철학에 관한 입문서로 보는 것이 더 적확한 것 같다.

저자는 총 8번의 강의를 통해서 들뢰즈가 제시한 의미, 사건, 계열화, 특이성, 무의미와 역설 등의 개념을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후기구조주의가 가지는,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들뢰즈철학이 가지는 기존철학과의 차이점을 밝혀낸다. 토론기록은 이러한 개념을 내 수준에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은 저자가 강의의 끝무렵에 반인간중심적인 구조주의에서 인간중심적인 실존의 문제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결국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로 귀착했을 때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실존의 사유를 통해 자리-이름의 체계를 벗어나는 주체, 그런 체계의 격자를 가로지는 주체인 노마드적 주체(혹은 가로지르는 주체)를 제시한다.

저자는 기존 학계의 수구성 때문에 교수직을 그만두었던 아픈 경험이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경험이 노마드적 주체를 지향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글의 마지막은 이 책의 7강 끝부분에 적힌 글로 대신한다.

'삶에 대한 열정,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 같은 고전적인 개념을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설사 그것이 환상이라 할지라도, 그 환상이 우리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환상을 추구하다 보면, 때로 그 환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노마드적 주체, 가로지르는 주체는 영원히 젊은이로서 살아가는 그러한 주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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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노먼 베쑨 역사 인물 찾기 1
테드 알렌 지음, 천희상 옮김 / 실천문학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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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을 돌보되 사람을 돌보지 못하는 의사를 작은의사(小醫)라 하고, 사람을 돌보되 사회를 돌보지 못하는 의사를 보통의사(中醫)라 하며, 질병과 사람, 사회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그 모두를 고치는 의사를 큰의사(大醫)라 한다.'('추천사' 중에서)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막연하게 꿈꾸어 왔던 의사상은 슈바이처였다. 그러나 그가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백인우월주의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자신의 일생을 아프리카 원주민을 위해 봉사한 그의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그는 사회의 좀 더 근본적인 문제점을 인식하지는 못했던 의사였다.

그러나 나의 실망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사회의 문제점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는 힘없는 민중들을 자신의 일부처럼 느끼고 진정한 휴머니즘을 실천한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노먼 베쑨이다. 그는 뜨거운 인류애를 발휘하여 부조리한 착취의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힘없는 민중들을 위하여 자신의 의술을 몸바쳐 사용한다.

노먼 베쑨은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훌륭한 실력을 가진 의사였고 따라서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핵치료법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난한 민중들이 결핵으로 죽어가자 빈부에 따라 의료혜택의 차이가 나는 사회구조의 모순을 인식하게 되고 그 뒤로 공공의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의 뜨거운 인류애는 그의 사회적 인식과 맞물려 숭고한 가치를 형성한다. 그의 휴머니즘은 멀리서 파시즘으로 고통받는 타국의 민중들에까지 뻗쳐있었기에 그를 스페인으로 날아가게 만들었으며 더욱이 말도 안 통하고 피부색도 다른 생면부지의 땅, 중국까지 달려가게 만들었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중국의 인민들을 자신의 일부처럼 생각하고 부상병들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치료해주는 모습은 한없는 감동을 전해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에서의 적극적인 치료를 마다하지 않은 투철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살신성인의 소명의식은 실제로 전쟁수행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고 게릴라전 의료의 새 장을 열게했다.

요컨대 그가 인류에 길이 빛나는 업적을 이룬 원동력은 바로 올바른 사회인식과 뜨거운 인류애, 그리고 투철한 소명의식에 있다고 할 것이다. '노먼 베쑨'이야말로 진정한 '큰의사'라 할 수 있다. 앞으로도 그는 나에게 계속해서 '모범적인 의사상'으로, '실천의 스승'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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