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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미치광이 ㅣ 펭귄클래식 54
로베르토 아를트 지음, 엄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내가 꾸는 꿈을, 내가 하는 망상들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본다. 늘 나는 내 현실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실현 가능한, 누구나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의 평범한 일들만 머릿속에 담아두고 그 일을 이뤘다고 생각하곤 한다. 아마도 나는 겁이 아주 많거나 포부가 작거나 아님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아니, 세상은 적당히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사는게 편하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인간인 것 같다. 독서 모임에서 내게 돌아온 질문. 내가 꾸는 꿈, 망상은? 갑자기 온 질문이라 우물쭈물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1주일이 지난 지금도 그 대답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원하게 할말이 없는 것 같다.
책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대단한 망상가들이다. 돈이라는 물질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그들의 존재는 깃털처럼 가볍다. 그들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공금횡령으로 회사에서 쫒겨날 위기에 처한 에르도사인, 그를 밀고하고 늘 자신을 무시하는 바르수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매춘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혁명을 꿈꾸는 점성술사, 여자를 동정할 가치가 없는 열등한 존재로 믿는 우울한 기둥서방, 별 쓸모없는 남자들만 있는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남자를 기다리는 절름발이 창녀 이폴리타 등. 그들을 설명하는 짧은 단어들 속에 그들은 단지 현실 부적응자들로 느껴진다. 그런데 왜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응원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의 망상들, 광기가 단순히 미칫짓들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배고픔, 욕망, 그리고 돈 이 세가지 뿐이다. 삶이란 그런것이다.
p.319
아마도 삶의 여러 모습들이 이 세가지-배고픔, 욕망,돈 -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 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려 검은집을 찾는 에르도사인도, 깨끗하지 않은 돈과 거짓말로 세우는 사회를 꿈꾸는 점성술사도 내겐 지금을 사는 나와 같은 약한 존재로 여겨 동정했던 것이다. 20세기 초 혼란스러운 아르헨티나와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돈이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사회일테니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책 속에 7인이나 되는 미치광이가 나오는 것인가,하는 물음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도대체 7인의 미치광이는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치광이는 없다. 다만 혼란스럽고 냉혹한 현실에서 그들이 비상구로 찾아낸 것은 망상속의 새로운 세계 건설이 아닐까 한다. 그 세계는 아직 건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망상이 광기로 우리들에게 인식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에르도사인의 자존심 회복을 위한 살해계획과 허무맹랑한 그들의 망상들은 작은 꿈들만을 꾸고 살아가는 내게 일종의 각성효과를 준 것 같다. 그들의 망상은 어쩌면 실현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며 남들의 생각 속에 우유부단하게 묻혀 사는 내가 어떻게 그들의 생각을 단순한 미친 생각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