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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독서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현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 ˝나는 <마담 보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플로베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담 보바리>는 위대한 작품이다.˝ 집안의 천치가 어떻게 이런 위대한 작품을 썼는지 너무 궁금해서 방대한 분량의 작가론을 쓴 겁니다. 작가가 마음에는 안 들어도 작품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해명을 해야했던 거죠. 사르트르도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마담 보바리>를 읽어 `버리는` 바람에, 플로베르에 대해 많은 시간을 몰입하게 됩니다. 인생이 좀 바뀐거죠. 그러니까 책을 함부로 `읽어버리면` 곤란합니다. 대충 읽다가 위험하다 싶으시면 덮어버리세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만약 정말 신이 있다면, 내가 신이 아니고 어떻게 견디겠는가?˝ 정말 대단한 작품이 있고 작가가 있다는 걸 `알아버린다면` 내가 그렇게 안 되고 어떻게 버틸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출퇴근 도합 1시간 정도는 책을 읽고, 자기 전에 30분은 책을 읽고 있다. 게다가 책에 대한 집착이 늘어나서 이것저것 찾아보고 읽으려고 사고 있는데, 어떤 순간에 책을 `읽어버리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 같다.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책을 만나고 나서부터 생각하며 곱씹어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로 고전에 대한 집요함이 시작되었는데 <안나 카레니나>에서 다시 좌절됐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가 토마시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티켓으로 묘사되었고,<책은 도끼다>에서 만나 읽어봐야겠다 다짐을 했는데 여전히 침대 옆 책상에 우두커니 버려져 있다. 그런데 <아주 사적인 독서>에서 다시 만났다. 물론 주요 서평은 아니었지만, 이성과 정신의 결합으로 묘사된 부분이 박웅현씨와는 또다른 관점으로 해석이 되어 다시 읽어야겠단 마음을! 먹었다.
# 톨스토이의 과제는 육체적 자아와 정신적 자아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거였어요. 하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이 둘 사이의 조화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는 이런 서두로 시작하죠. 행복한 가정은 정신과 육체가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불행한 가정은 이게 조화를 이루지 않는 거예요. 안나의 오빠는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가정이 불행해집니다. 이유는 욕망이 적절한 이성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중략)결국 육체를 선택한 안나는 죽고 레빈만 살아남게 됩니다. 이러한 결말은 상징적입니다. 톨스토이는 육체적 자아를 완전히 부정하고 정신적 자아만을 선택한 것이죠.
<아주 사적인 독서>는 <마담 보바리>, <주홍글씨>, <햄릿>, <채털리 부인의 연인>,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손님>의 서평으로 구성되어있다. 제일 읽어보고 싶은 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었는데 로렌스의 생각이 마음에 들기때문이다. 외설서라고 난리가 났던 책이라는데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이현우씨의 해설을 보니 전혀 외설서라고 느껴지진 않지만.
# [ 그녀는 이제, 자기 본성의 진정한 근본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본질적으로 아무 부끄러움이 없는 존재가 됐다. 그녀는 자신의 관능적 자아, 부끄러움 없이 벌거벗은 자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어떤 승리감을, 거의 허세를 부리고 싶기까지 한 승리감을 느꼈다. 그랬다! 바로 이거였다! 이게 바로 삶이었다! 이게 바로 자신의 진정한 존재방식이었다.]
로렌스가 생각한 진정한 삶은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이 조화로운 결합 관계에 놓인 삶입니다. 여자가 없으면 못 산다거나 남자가 없으면 못 산다는게 아니라, 서로에게 맞는 짝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관계에 대한 예찬을 담은 소설이 바로 이 소설입니다.
20대 중반에 고전 읽기 모임에서 <파우스트>를 읽었다. 읽다가 대체 난 모르겠다 싶어서 집어던졌는데, 모임에 나가서 헛소리를 잠깐 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대에서 저녁을 먹고 노는 것에 더 집중했다 돌아온 기억이 난다. 이현우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중년을 위한 고전이기에 저는 <파우스트>가 청소년 권장도서로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어렵기도 하지만 공감하기도 어려울 듯해서요. 그건 이십대도 마찬가지고요. 이대로 늙기엔 뭔가 억울하고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엔 좀 늦은 듯 싶은 나이가 <파우스트>를 읽기에 딱 좋은 나이입니다.
다행이다, 하며 안도감을 내쉰건 대체 뭐였을까 ㅋㅋ 파우스트의 욕망에 대해서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했다. 보통의 서평은 예찬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고 언제나 갈망하면서 애쓰는 것에 구원의 열쇠가 있다고 하는데, 이 구원이 과연 맞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던진다. 도덕적인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다.
서평은 길잡이다. 좋은 책이지만 역시나 원래의 책부터(고전)부터 읽는 것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