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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 - 10년차 카피라이터가 붙잡은 삶의 순간들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 모든 독서는 기본적으로 오독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오독의 순간도 나에겐 소중할 수 밖에 없다. 그 순간 그 책은 나와 교감했다는 이야기니까. 그 순간 그 책은 나만의 책이 되었다는 이야기니까. 그때 나를 성장시켰든, 나를 위로했든,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든, 그 책의 임무는 그때 끝난 거다.
#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돌아오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 중국의 시
# 나는 카뮈의 `안과 겉` `이방인`. `시지프 신화`까지 달음박질쳤다. 그리고 마침내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 찾아왔다. 출근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라니. 출근은 내게 결코 화해불가능한 어떤 것이었는데. 믿을 수 없게도 6년을 매일 회사를 가면서, 그 6년을 매일같이 나는 회사에 가기 싫었다. 막상 도착하면 또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할 거면서, 심지어 열심히 일할 거면서, 나는 매일 아침 출근이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출근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 찾아온 것이다. 명백히 `시지프 신화` 때문이었다.
# 여행은 감각을 왜곡한다. 귀뿐만 아니라 눈과 입과 모든 감각을 왜곡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 왜곡에 열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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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라는 건
저절로 도착하는
정거장 같은 건데
나는 자꾸
빠른 열차를 타고 싶었다.
빠른 열차로
60이라는 나이에
도착해버리고 싶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마음을 뒤로하고,
정처 없이 상처받는 시간을 모른 척 하고.
더이상은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대신 해마다 도착하는
그 나이의 색깔을 기다린다.
모두가 지니고 있는
바로 지금의 색깔에 열광한다.
여리고 미숙하거나
닳고 바래거나
모든 나이에는
그 나름의 색깔이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색깔이 있다.
- 시간의 색깔
# ˝엄마, 친구가 오늘 학원 가지 말자고 그러는데, 학원 빠져도 괜찮나?˝
˝니 학원을 니가 알아서 해야지, 내한테 물어보면 우야노.˝
# 쓰면서 그 막연함을 약간이라도 구체화할 수 밖에 없다. 글을 쓰면 적어도 복기할 기회가 주어지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태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니까. 내 감정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니까.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아니, 이해해보려고 적어도 노력해볼 수 있으니까.
# 잘 쓰기 위해서는 좋은 토양을 가꿔야지, 라는 핑계로 수없이 읽고, 듣고, 보고, 돌아다녔다. 11년을 그랬다. 그 핑계 덕분에 삶은 더없이 풍성해졌다.
결국 잘 쓰기 위해 좋은 토양을 가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살아야 잘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음 이 책은 나에게 있어 오독된 책이다. 문장이 훌륭하지도, 수사학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다. 훌륭한 교훈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오독했고, 책 읽는 순간을 왜곡해서 너무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친구의 신혼집에서 술을 엄청 먹고 새벽 6시에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붙들고 읽고, 길에서도 읽고, 볼더링 대회 끝나고 녹초가 된 상태에서도 읽다가 잠들어 눈 뜨자마자 읽은 순간들) 아침에 책을 읽다가 심지어는 울기까지 했다. 책보다가 운 적은 정말 드문데, 뭔가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엄마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박웅현의 글과 이어지는 부분이 많은 책이다. 심지어 `생각수업`이었던가? 거기에 박웅현씨가 한 챕터를 썼는데, 김민철 이야기도 등장한다. 티비와 회사가 나오니 최근까지 가장 가까웠던 사람도 떠올랐다. 이래저래 나와 호흡이 잘 맞는 책인 것 같다. 그래서 가슴 속 울림을 혼자 조금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는데 휘발될 것 같아서 기록한다.
잘 살기 위해, 나이기 위해 노력하는 김민철씨의 에세이는 오독의 임무를 다한 책이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책 권수를 세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