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루에 적어도 네 개의 즐거움 - 즐거움의 치유력을 통찰한 신개념 심리학
에블린 비손 죄프루아 지음, 허봉금 옮김 / 초록나무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즐겁게 사는 것은 죄악인가? 기쁨조차 사치로운 감정이라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무언가에 세뇌당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금은 너무 이르고 빠르다는 것인데, 행복을 누리는 것도 일정한 시기가 있는 듯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굶주린 사람처럼 퀭한 눈으로 세상을 삐딱하게 인식한다. 스스로 불행을 끌어들이고 있음을 왜 모르는가. 자기애착이 강한 사람은 승부욕도 강하고 자존심도 세다. 그들은 절대로 포기와 실패를 인정할 수 없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주어진 삶을 향한 책임감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바쁘게 살아가는 삶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지나친 열정이 심신을 도리어 허약하게 만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남들이 배꼽 잡고 웃으면서 행복에 겨운 소리를 하고 있을 때, '저도 행복해요! 행복하다고요!'라며 발만 동동 구르면서 가식적인 웃음을 짓지는 않았는가?
즐거움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최고조로 달하는 순간에 포착할 수 있는 신비로운 체험인가. 거기서 더 나아가 욕구 충족의 정점에 다다랐을 무렵에 온몸의 신경을 타고 흐르는 전율과도 같은 것인가. 사실 <즐거움>을 읽으면서 심리학의 통상적인 범주와 정의에 근거한 인간의 성격과 행동을 분석하여 '즐거움'을 논하는 것과 거기서 '치유력'을 접목하여 일명 '즐거움의 치유 효과'의 신빙성과 실현 가능성을 말한다는 것이 애매하게 느껴졌다. 저자는 자신의 이론적 지식과 실제 심리치료자와 소통하며 느꼈던 몇몇 사람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정적인 치유의 놀라운 성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보이지 않는 치유' 자체가 제삼자로서는 하나의 독특한 사례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http://cfile208.uf.daum.net/image/1174013D4E3B886B1015FB)
「장 디디에 벵상은 쓰고 있다. "우리 영혼이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잠재적 즐거움의 목록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풍부해서 툭하고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 그것들을 손에 넣고 싶은 생각이 난다. 길가에 피어있는 꽃들, 카페의 테라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미소 등 그 리스트는 끝이 없다."」- 본문 중에서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점에 태어났고, 그다음은 유전과 환경에 의해서 새롭게 탈바꿈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무(無)와 유(有)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성을 지니고 있다. 언제고 서로 위치를 바꾸어도 상관없으되, 그 본질은 변함없는 대등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이 느끼는 즐거운 감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를 심리학적 측면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일단 감정을 논하는 거라서 '심리학'을 밑바탕에 깔고 시작했는지 몰라도 특정 인물의 내면에서 시작된 행동의 결과를 두고 다양한 치유가능성을 말한다는 것은 조금 성급한 판단이라 생각된다. 물론 저자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나, <즐거움>은 책 제목에 의한 '즐거움이 주는 치유력'이라는 대주제를 걸었음에도 뭔가 번복되는 내용이 많았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책을 읽다 보면 '우리를 제약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생각'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두 가지 요소에 우선순위를 두고 싶지는 않다. 저자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결과나 생각에 근거한 결과는 결국, 사실이든 생각이든지 간에 두 요소가 일정한 기대수준을 성립해야지 만이 결론이 도출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사실의 사실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고, 그로 하여금 우리의 감정 자체에 영향을 주어 이 책의 핵심인 '즐거운 감정'을 쥐고 흔들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또한 '즐거움을 발견한 후 자아에 눈을 뜨다' 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앞서 언급한 '우리를 제약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생각'이라는 부분과 접목해보면, 사실로 규정된 것은 '즐거움'이고 생각은 곧 '자아'가 될 수도 있는 거라 보여진다. 즐거움을 알되 더 나아가 잠재된 자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과 생각은 대등한 관계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를 제약하는 것은 머리로 행하는 '생각'만이 아니다.
![](http://cfile235.uf.daum.net/image/111A353E4E3B888E2C7CAA)
「즐거움은 뭔가를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지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누릴 줄 아는 방법에 대한 메아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즐거움은 우리의 '존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본문 중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는 여정이 이토록 험난할 줄이야. 좀 쉽게 접근할 순 없는 걸까.
저자는 "즐거움은 자유로운 행위이다."라고 말한다. 일부러 의식하고 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은 죄악인가?'라고 말했다. 그럼 '즐겁지 않은 것도 죄악인가?'라는 말로서 글을 마쳐야만 하는 걸까. 의식하지 말자고 했다. 감정에 의존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감정이 마음이라면 행동은 몸이라고 생각하자. 그래서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관리한다면 틀림없이 무(無)와 유(有)를 통해서 창조된 즐거움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을 것이다. 아마 저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집필하지 않았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맹목적인 열정, 헌신,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과감히 포기하고 버려라. 그게 무아의 본질에 이르는 길이며, 책이 말하는 '영성'을 향한 즐거움을 누리는 길이다. 저자는 왜 '즐거움'을 말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