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찌지 않는 스모선수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여느 노숙자와 다름없는 행색으로 잡다한 물건을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녀석은 속이 뒤틀리고도 모자랄 만큼 잔뜩 성이 난 퍼그처럼 사람들을 쳐다본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왜소한 체격으로 인해 인상은 더욱 날카롭게 보이기 일쑤다. 부모도 없고 마땅히 거처할 곳도 없는지, 그저 누울 수 있는 공간이면 두 다리 뻗고 세상과의 접촉을 차단한 채 살아간다. 그러던 소년에게 이따금 나타나서 "네 안에 떡대가 보인다."라고 말을 거는 노인이 있었다. 볼품없는 말라깽이와 같은 자신에게 무슨 떡대가 보이느냐고 대뜸 콧방귀를 끼고 노인을 무시하는 소년이다. 그러나 연이어 "네 안에 떡대가 보여."라는 말로 소년의 심기를 건드는데……

 

<살찌지 않는 스모 선수>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프랑스 작가 중 한 명인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의 풍자와 철학이 오묘한 콩트처럼 조화를 이루는 성장소설이다. 정처 없이 떠도는 가출청소년을 연상시키는 '준', 그리고 스모선수를 양성하는 도장을 운영하는 노인 '쇼민주'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기까지 소년의 경계심은 극에 달했으나, 마치 소년의 일탈을 잡아주기라도 하듯 노인은 잊혀질 때쯤이면 소년을 찾아온다. 그리고 "네 안에 떡대가 보인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노인은 소년에게 스모경기 입장권을 주면서 자신을 찾아오도록 하는데…… 경기장을 찾아간 소년은 상대선수에 비해 왜소한 체격을 가졌음에도 우승을 차지하는 스모선수를 보면서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이 책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청소년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관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아픔을 보여준다. 그 아픔 속에는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 지적장애를 가진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유년시절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스모선수가 되고 싶어서 체중을 늘리고 할 수 있는 모든 운동에 집중했으나, 눈에 띄는 성과가 보이지 않자, 소년은 자꾸만 움츠러들고 그러한 현실이 자신에겐 별수 없는 것,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 너는 관찰하기 보다는 입을 놀리고 있어. 현상들을 파악하기보다는 선입관들을 투사하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이 코에 걸고 있는 색안경을 통해서 내다보는 거다. 파란 안경으로 보면 세상이 파랗고 노란 안경으로 보면 노란색 천지인 데다, 빨간 안경으로 보면 빨간색 때문에 다른 색이 모두 죽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너 스스로 너 자신의 인지능력을 떨어뜨리고 있단 얘기야, 스스로 덧칠해놓은 것만 눈에 들어오니까 그럴 수밖에.」- 본문 중에서

 

이 책은 짧은 분량임에도 많은 교훈을 함축시켜 놓았다. 유년시절의 상처를 치유하는 소년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꽁꽁 숨겨놓은 자화상과 같다. 노인이 소년에게 말한 '떡대'는 보통 몸집이 큰 사람을 일컫는 경우에도 쓰이나, 여기서는 '장성(壯盛)'의 의미로 해석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은 소년을 향해 '네 자신도 큰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가 소년을 스모선수로 키우기 위해서 자신의 도장으로 불렀을까? 나는 이러한 소설의 장치야말로 저자가 숨겨놓은 이 책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왜소한 체격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우람한 덩치의 스모선수가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울 것이다. 그래서 소년으로 하여금 자신의 단점을 과감히 인정하고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힘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처세임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계기였다. 우리는 우연찮은 계기를 통해서 무언가를 깨닫거나 큰 감명을 받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살 찌지 않는 스모 선수>는 그러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또한 저자는 선불교의 오묘한 세계, 즉 명상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에게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끔 한다. 소년은 자신이 떡대임을 깨닫는 순간까지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다. 이제는 우리도 그에 동참하여 내면의 나와 마주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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