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감정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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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 나는 거의 이십오 년 동안 살고 있던, 항상 짙은 회색 구름으로 덮여 있는 영국의 한 지방을 떠나 빈으로 갔다. 삶의 장소를 바꿈으로써 인생의 불운한 시기를 극복해보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빈에 도착하자마자, 그동안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글쓰기와 정원 가꾸기에만 몰두하면서 살아온 나머지 그런 일상의 습관에서 갑자기 풀려나버리면 당장 무슨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난 나는 레오폴트슈타트와 요제프슈타트를 비롯하여 이름 모를 작은 거리들을 목적도 방향도 모른 채 한없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나중에 지도에서 확인하고 놀란 일이지만, 정처 없는 산책중에 내 발길은 특정한 지역 테두리 안에만 머물러, 프라터슈테른 뒤편의 베네디거 아우 공원과 알저그룬트 종합병원을 기점으로 하는 초승달 내지 반달 모양 구역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때 내가 돌아다녔던 경로를 종이 위에 그려본다면, 이성과 상상력, 그리고 의지력의 경계에 가서 부딪힌 다음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무수한 삼각과 사각, 그리고 대각선들을 그어놓았다는 인상을 풍길 것이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도시를 종으로 횡으로 가로지르던 방랑은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명백한 경계를 긋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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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5-12-29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우님의 요 글 때문에, 저도 현기증 어제 주문해서 받았습니다..일요일은 스키야끼였나? 배수아의 그 책도 참 좋았습니다. 배수아..저도 이 분에게 끌렸습니다...부럽기도 하고..

boooo 2016-01-04 09:42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저도 좀 더 알고 싶습니다. 배수아의 글은 요즘 악스트에서 조금씩 읽게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