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칭기스 칸의 남자 후손만 전세계에 걸쳐 1,600만명이라더니. 대단한 인물이다.


동서문화사에서 출판한 <동방견문록>에서는 '부카라'라고 쓰고 있는데, 보통 '부하라'로 많이 적는다. 부하라는 부하라 한국(부하라 칸국)의 수도였고,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부하라 주'의 주도이다. 이 도시는 칭기스 칸이 유일하게 정복 후 입성한 도시로 기록되고 있다.

역사는 몽골인이 정복한 수천 개의 도시들 가운데 칭기스 칸이 친히 입성한 도시는 하나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보통 승리가 확실해지면 그는 멀리 떨어진 안락한 야영지로 물러나고 나머지 일은 그의 전사들이 마무리했다. 용의 해인 1220년 3월의 어느 날, 몽골의 정복자는 자신의 이런 독특한 전통을 깼다. 칭기스 칸이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새로 정복한 도시 부하라 중심부로 진입한 것이다. 부하라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인 호라즘 제국에 속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부하라는 수도도 아니고 주요한 상업도시도 아니었지만, 무슬림 세계 전체에서 `고귀한 부하라`로 일컬어지며 정서적으로 아주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신앙의 중심은 `모든 이슬람의 훈장이요 기쁨`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칭기스 칸이 목표로 삼은 도시 부하라는 아무다리야의 한 지류에 걸터앉은 비옥한 오아시스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시대에 명멸하던 수많은 제국 가운데 하나인 신생 호라즘 제국의 주민은 대부분 타지크인이나 페르시아인이었지만, 통치 집단은 투르크 부족민이었다. 호라즘의 술탄은 몽골의 캐러밴을 약탈하고, 평화적인 교역 협상을 하러 온 몽골 사절단의 얼굴을 망가뜨렸다.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칭기스 칸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부하들이 공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규율이 엄하고 경험도 많은 군대를 주저 없이 다시 소집하여 전쟁의 길로 돌진했다.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칭기스 칸은 부하라의 중심부에 이르자 커다란 모스크까지 말을 타고 가 그곳이 술탄의 집이냐고 물었다. 아마 모스크가 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는 그곳이 술탄의 집이 아니라 신의 집이라는 말을 듣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몽골인에게 유일한 신은 지평선에서 지평선까지 사방을 가득 채운 `영원한 푸른 하늘` 뿐이었다.

칭기스 칸은 말에서 내려 커다란 모스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록으로 보면 그가 모스크에 들어간 것은 이때뿐이었다.

칭기스 칸이 입성했던 1220년 그날부터 1920년에 소비에트 군대가 진입할 때까지 꼭 700년 동안 칭기스 칸의 후손들은 칸과 아미르로서 부하라를 통치했는데, 이 통치자 가문은 역사상 가장 긴 가족 왕조로 손꼽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