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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열화요수 01 [BL] 열화요수 1
Priest / 서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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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불현듯 아무 이유도 없이 이대로 이별일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설핏 떠올랐다.

언제나 그의 얼굴에 덮여 있던 가면 같은 평온함이 찢어졌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것은 뜻밖에도 후련함과 광기였다.

평범한 사람이 보내는 일생은 일순간이다. 고통도 기쁨도 기껏해야 몇십 년이다. 몸뚱이가 겪어낼 수 있는 고통에는 항상 한계가 있기 마련이므로, 인간은 종종 고통이란 걸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해탈해 버리곤 했다.

잠깐 기다려. 안돼…. 가지 마.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나지 않았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창가에 홀연 한 줄기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미풍이 창가에 기댄 그 뒷모습의 옷자락을 가볍게 스쳐 지나가자 옷소매가 한들한들 흔들렸다. 이렇게 움직임이 생긴 순간, 조각상 같던 남자는 갑자기 ‘살아난’ 듯했다.

쉬엔지의 심장이 별안간 쿵 하고 떨렸다. 다른 차원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었다. 꿈속에서 이런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정말 무서운 건 관 속에 시체가 아닌 다른 것이 들어 있을 경우다.

그러나 개미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바람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얼음의 갈라진 틈은 금세 메워졌다

"소위 ‘제’라는 것은 일종의 매매 계약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제를 지낼 때는 네 가지 요소가 들어가는데, 각각 ‘제물’, ‘제사 책임자’, ‘중간다리’, ‘제문’입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은 마치 발톱 아래의 작은 새를 쳐다보는 늙은 고양이 같았다.

일반인에게 이공국을 맡아 하늘과 땅을 넘나드는 특능인 무리를 관리하라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아니겠는가?

"예를 거두고 일어나거라. 제문은 나를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게 했으니, 당연히 나를 구속하고 있을 것이다. 간신히 햇빛 속으로 나왔는데 구태여 내 손으로 일을 망칠 필요가 있겠느냐? 평범한 인간의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지."

제사에 바칠 ‘산 제물’은 반드시 비명횡사해야 한다. 배후의 살인자가 한 곳에만 계속 머무르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실행 가능성이 가장 높은 수단은 저주나 독극물, 혹은 기생(寄生)이다.

이토록 무력하게 천천히 죽어가는 일보다 훨씬 절망적인 건, 주변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어제 했던 일을 오늘도 하고, 저도 모르게 어제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학교, 직장, 사회에 녹아든다.

만약 정말로 이 나비가 원인이라면, 천 명이나 되는 산 제물 가운데 놀랍게도 어떤 엄마 한 사람만이 이상을 느낀 것이다.

다들 이제 아들이 철든 거라고, 그게 ‘정상’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불안했다. 그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은 삶의 일부를 아이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히스테릭한 어머니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나 말이냐? 나는 아마 인간들의 망념이겠지…. 생전의 일은 너무 까마득해서 기억나지 않는구나."
여기까지 말한 그는, 얼굴에 새겨진 것 같던 웃음기를 지웠다.

법진은 공간의 일부를 접어 더 높은 차원으로 만들고, 무한히 순환하고 확장하며 대마두를 그 안에 가둬 놓았다.

인마의 강림은 천재지변에 필적한다.
병원 주변을 지키던 현지 외근팀도, 이공국 비장의 카드인 특수부대도, 이 힘 앞에서는 그저 한낱 개미로 전락해 버렸다.

사람을 전율하게 만드는 살기와 함께 느껴지는 그 향은 의외로 깨끗하고, 온화하고, 또 고귀했다.

한순간, 한 명은 서 있고 한 명은 무릎을 꿇은 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둘은 서로 의아해하면서 동시에 어떤 묘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그들 사이에 무언가 은밀하고도… 거스를 수 없는 연결고리가 존재하는 것 같은.

"선후과의 그림자가 너무 짙구나."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샤오정은 미처 물어보지 못했다.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으로 발전했고, ‘가정을 위하는’ 마음이 ‘국가를 위하는’ 마음으로 발전했다. 이런 긍정 에너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

기이하게도, 전신이 제문에 뒤덮인 채 밤바람의 꼭대기에 냉랭하게 서 있는 비춘셩은 그런 보편적인 묘사와는 분명한 선을 그은 것처럼 보였다

오직 피를 뚝뚝 흘리며 자신을 찢어발기는 순간에만, 사람들은 비로소 깜짝 놀라 저 소도구 같은 겉가죽 안에도 애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그게 정말로 운이 좋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암암리에 그의 앞길을 지켜준 걸까?

그녀가 마음속으로 억누르기 힘든 생각 하나에 계속 얽매일 때, 이 특능이 그녀의 편집증과 착란 증세를 악화시키는 건 아닐까?

"나는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길 원해요!"

그리하여 수많은 환상이 깨지고, 피해자는 깨닫는다. 자신이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이렇게 발생한 거대한 원망이 음침제의 자양분이 된 것이다.

이 지하 불지옥은 대체 몇 층이나 있는 것일까? 몇 층까지 떨어져야 지하를 배회하는 악귀에게 그 목소리가 들릴까?

환몽과도 같은 덧없는 인생. 인간이든 나비든 어느 한쪽이 더 진실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쉬엔지는 당시의 ‘신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기령이 얼마나 비참한지는 알고 있었다.

비록 삶에 어떤 기쁨이 있고 어떤 미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령들은 뜻밖에도 계속 살아가기를 바랐

그들은 막다른 끝에 이르러서야 신중하게 자신의 종착점을 선택했고, 무척 정중한 태도로 인간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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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의 얼굴에 덮여 있던 가면 같은 평온함이 찢어졌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것은 뜻밖에도 후련함과 광기였다.

평범한 사람이 보내는 일생은 일순간이다. 고통도 기쁨도 기껏해야 몇십 년이다. 몸뚱이가 겪어낼 수 있는 고통에는 항상 한계가 있기 마련이므로, 인간은 종종 고통이란 걸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해탈해 버리곤 했다.

잠깐 기다려. 안돼…. 가지 마.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나지 않았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창가에 홀연 한 줄기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미풍이 창가에 기댄 그 뒷모습의 옷자락을 가볍게 스쳐 지나가자 옷소매가 한들한들 흔들렸다. 이렇게 움직임이 생긴 순간, 조각상 같던 남자는 갑자기 ‘살아난’ 듯했다.

쉬엔지의 심장이 별안간 쿵 하고 떨렸다. 다른 차원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었다. 꿈속에서 이런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정말 무서운 건 관 속에 시체가 아닌 다른 것이 들어 있을 경우다.

그러나 개미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바람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얼음의 갈라진 틈은 금세 메워졌다

"소위 ‘제’라는 것은 일종의 매매 계약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제를 지낼 때는 네 가지 요소가 들어가는데, 각각 ‘제물’, ‘제사 책임자’, ‘중간다리’, ‘제문’입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은 마치 발톱 아래의 작은 새를 쳐다보는 늙은 고양이 같았다.

일반인에게 이공국을 맡아 하늘과 땅을 넘나드는 특능인 무리를 관리하라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아니겠는가?

"예를 거두고 일어나거라. 제문은 나를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게 했으니, 당연히 나를 구속하고 있을 것이다. 간신히 햇빛 속으로 나왔는데 구태여 내 손으로 일을 망칠 필요가 있겠느냐? 평범한 인간의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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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불현듯 아무 이유도 없이 이대로 이별일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설핏 떠올랐다.

언제나 그의 얼굴에 덮여 있던 가면 같은 평온함이 찢어졌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것은 뜻밖에도 후련함과 광기였다.

평범한 사람이 보내는 일생은 일순간이다. 고통도 기쁨도 기껏해야 몇십 년이다. 몸뚱이가 겪어낼 수 있는 고통에는 항상 한계가 있기 마련이므로, 인간은 종종 고통이란 걸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해탈해 버리곤 했다.

잠깐 기다려. 안돼…. 가지 마.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나지 않았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창가에 홀연 한 줄기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미풍이 창가에 기댄 그 뒷모습의 옷자락을 가볍게 스쳐 지나가자 옷소매가 한들한들 흔들렸다. 이렇게 움직임이 생긴 순간, 조각상 같던 남자는 갑자기 ‘살아난’ 듯했다.

쉬엔지의 심장이 별안간 쿵 하고 떨렸다. 다른 차원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었다. 꿈속에서 이런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정말 무서운 건 관 속에 시체가 아닌 다른 것이 들어 있을 경우다.

그러나 개미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바람을 벗어날 수는 없다. 얼음의 갈라진 틈은 금세 메워졌다

"소위 ‘제’라는 것은 일종의 매매 계약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제를 지낼 때는 네 가지 요소가 들어가는데, 각각 ‘제물’, ‘제사 책임자’, ‘중간다리’, ‘제문’입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은 마치 발톱 아래의 작은 새를 쳐다보는 늙은 고양이 같았다.

일반인에게 이공국을 맡아 하늘과 땅을 넘나드는 특능인 무리를 관리하라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아니겠는가?

"예를 거두고 일어나거라. 제문은 나를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게 했으니, 당연히 나를 구속하고 있을 것이다. 간신히 햇빛 속으로 나왔는데 구태여 내 손으로 일을 망칠 필요가 있겠느냐? 평범한 인간의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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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더 할로우 페어리 테일 (The hollow Fairy Tale) 1 [BL] 더 할로우 페어리 테일 (The hollow Fairy Tale) 1
돌체 / 비하인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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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미지의 상황에 던져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 나 아마 영어 잘 못 할 텐데? 아니, 차라리 영어면 낫지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 말을 하거나 하면 어쩌지.

이상의 아들. 맹약의 군주. 가장 빛나는 왕.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세상에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화를 빌려와 말하자면 땅에서 금 절구를 발견한 농부의 경우가 그렇다. 고백하자면 어릴 때 읽었던 것이 아니라 다 커서 읽은 책이다.

이 세계엔 한번 결심한 일은 끝장을 보라는 법칙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두 번. 두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내가 그를 보자마자. 그건.
그가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단 뜻이었다.

불편하다. 이 화제는. 이 분위기는. 이담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싶기도 했지만 모르고 싶기도 했다

기억은 안 나도 촉이란 게 있거든. 그럴 것 같다고. 무엇을 하건 어설프고 못난 나와는 정반대였겠지, 이담 저 녀석은. 그래서 나는 항상 저 녀석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괜히 옆에 있으면 비교가 될까 싶어서 멀어지고 싶어하고.

헤이다르가 캐스터에게 맹세한 충성이 과연 순수한 것이었을까? 질투나 분노는 정말 없었을까?

나는 어째서 이렇게 못난 걸까. 내가 만든 이곳에서조차,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이담은 그런 헤이다르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담의 굳어진 옆얼굴을 보니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그러다 나는 이담의 손가락 끝이 창백하게 변한 것을 발견했다. 얼음장 같은 손. 심장이 쿵 작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만든 이야기는 정치극이라기 보다는 영웅담에 가깝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경받을 만한 캐스터라는 남자가 자신의 힘으로 악당을 쓰러뜨리고 동료를 얻고 이름을 알리고. 그러다 결국 모두의 축복 속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오르는.

그 말은 그가 그만큼 캐스터를 좋아한다는 걸까. 그렇다면 속 모를 헤이다르보다는 에닉 쪽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못을 박아도. 마치 열쇠를 잃어버린 잠긴 문처럼, 그는 완고하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도 저렇게 못 알아보게 변하고 이름까지 달라지면…. 다음에 나올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아니, 넌 절대로 몰라. 어설프게 아는 척하지 말고 위로하는 척도 하지 말고 그냥 꺼져줬으면. 그 애는 애꿎은 빨대만 꾹꾹 씹으면서 생각했다.

악한 것은, 나쁜 것은, 차가운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그 애는 괜히 찜찜해졌다. 말하지 말걸.

지금 눈을 마주치면 자신이 하는 생각을 소년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생각을 들키는 건 상관없었다. 그저 혹시나 소년의 눈에 그딴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보일까 봐 그게 싫었다.

"저는. …사람마다 제일의 가치는 다릅니다만, 아마 기사에게 있어 제일의 가치는 충성의 맹세일 것입니다. 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왕을 우선으로 하여 행동하며 왕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그것이 기사로서의 덕목이라 한다면 저는 끝의 끝까지, 적어도 마음으로는 충성의 맹세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흔한 일이다, 라는 말은 얼마나 황홀한 말인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말이니까.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다. 나는 헤이다르가 악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내 귀에 단 소리만 들려주는 이가 있다면 그는 천사가 아닌 악마일 거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불러도 그는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는 미안해졌고, 답답해졌고, …동시에 쓸쓸해졌다.

가시가 박힌 그 손가락의 모습이 그 애의 눈에도 또렷하게 박혔다. 그 애는 또 다른 손이 다가와 작은 아이의 손을 받쳐 드는 모습을, 그 손이 가시를 빼내는 모습을, 작은 상처에 약을 바르고 알록달록한 캐릭터 밴드를 붙여주는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 애는 얼굴을 들었다. 그 애로부터 작은 아이를 지키듯이 선 소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아이는 이전에 꿨던 꿈에 나왔던 얼굴이 흰 동급생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아이의 앞에 서서 그 애의, ‘자신’의 시선으로부터 아이를 가리고 있는 소년은.
이담이었다.
그래서, 사라지는 건 누구?

하지만 나는 정확히 ‘뭘’ 두려워하는 거지? 내가 이상해지는 거? 그럴 수도 있다. 그건 누구나 무서워할 만한 일이잖아.

어쩌면 더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입버릇처럼 똑똑하지 않다, 둔한 편이다, 멍하니 있는 것이 버릇이다 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진짜 바보인 건 아니다.

살이 얼어 있는데 갑자기 더운 것이 닿으면 아프구나. 나는 그걸 이제야 알았다.

그저 나는 내가 조금 혐오스러웠다. 얼어있던 살이 녹자 아픈 것 대신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혹시 나는 안기고 싶었나? 누군가 안아줬으면 했나? 내겐 아무도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럼 나는 누군가를 안아주고 싶었나? 누가 먼저건 따뜻해질 수 있으니까. 안아주고 싶었던 사람은 있었나? 있었을까? 있었으면 왜 해주지 않았지? 왜? 내 주위엔 누가 있었지?

어이없어할까. 저런 머저리는 처음 봤다고 할까. 숙맥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찌질하다고? 무엇이건 좋은 감정은 가지기 힘들겠지. 그가 나를 비웃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나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서 일어났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 대가로 받아야 하는 게 비웃음이라고 해도. 나는…

"어떤 일이 생긴다고 해도 한 번 일어났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헤이다르는 나를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대했었다는 사실을. 캐스터일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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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미지의 상황에 던져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 나 아마 영어 잘 못 할 텐데? 아니, 차라리 영어면 낫지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 말을 하거나 하면 어쩌지.

이상의 아들. 맹약의 군주. 가장 빛나는 왕.
그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세상에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화를 빌려와 말하자면 땅에서 금 절구를 발견한 농부의 경우가 그렇다. 고백하자면 어릴 때 읽었던 것이 아니라 다 커서 읽은 책이다.

이 세계엔 한번 결심한 일은 끝장을 보라는 법칙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두 번. 두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내가 그를 보자마자. 그건.
그가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단 뜻이었다.

불편하다. 이 화제는. 이 분위기는. 이담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싶기도 했지만 모르고 싶기도 했다

기억은 안 나도 촉이란 게 있거든. 그럴 것 같다고. 무엇을 하건 어설프고 못난 나와는 정반대였겠지, 이담 저 녀석은. 그래서 나는 항상 저 녀석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괜히 옆에 있으면 비교가 될까 싶어서 멀어지고 싶어하고.

헤이다르가 캐스터에게 맹세한 충성이 과연 순수한 것이었을까? 질투나 분노는 정말 없었을까?

나는 어째서 이렇게 못난 걸까. 내가 만든 이곳에서조차,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이담은 그런 헤이다르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담의 굳어진 옆얼굴을 보니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그러다 나는 이담의 손가락 끝이 창백하게 변한 것을 발견했다. 얼음장 같은 손. 심장이 쿵 작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만든 이야기는 정치극이라기 보다는 영웅담에 가깝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경받을 만한 캐스터라는 남자가 자신의 힘으로 악당을 쓰러뜨리고 동료를 얻고 이름을 알리고. 그러다 결국 모두의 축복 속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오르는.

그 말은 그가 그만큼 캐스터를 좋아한다는 걸까. 그렇다면 속 모를 헤이다르보다는 에닉 쪽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못을 박아도. 마치 열쇠를 잃어버린 잠긴 문처럼, 그는 완고하게 입을 열지 않았다.

얼굴도 저렇게 못 알아보게 변하고 이름까지 달라지면…. 다음에 나올 때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가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아니, 넌 절대로 몰라. 어설프게 아는 척하지 말고 위로하는 척도 하지 말고 그냥 꺼져줬으면. 그 애는 애꿎은 빨대만 꾹꾹 씹으면서 생각했다.

악한 것은, 나쁜 것은, 차가운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그 애는 괜히 찜찜해졌다. 말하지 말걸.

지금 눈을 마주치면 자신이 하는 생각을 소년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생각을 들키는 건 상관없었다. 그저 혹시나 소년의 눈에 그딴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보일까 봐 그게 싫었다.

"저는. …사람마다 제일의 가치는 다릅니다만, 아마 기사에게 있어 제일의 가치는 충성의 맹세일 것입니다. 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왕을 우선으로 하여 행동하며 왕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그것이 기사로서의 덕목이라 한다면 저는 끝의 끝까지, 적어도 마음으로는 충성의 맹세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흔한 일이다, 라는 말은 얼마나 황홀한 말인가.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말이니까.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다. 나는 헤이다르가 악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내 귀에 단 소리만 들려주는 이가 있다면 그는 천사가 아닌 악마일 거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불러도 그는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는 미안해졌고, 답답해졌고, …동시에 쓸쓸해졌다.

가시가 박힌 그 손가락의 모습이 그 애의 눈에도 또렷하게 박혔다. 그 애는 또 다른 손이 다가와 작은 아이의 손을 받쳐 드는 모습을, 그 손이 가시를 빼내는 모습을, 작은 상처에 약을 바르고 알록달록한 캐릭터 밴드를 붙여주는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 애는 얼굴을 들었다. 그 애로부터 작은 아이를 지키듯이 선 소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아이는 이전에 꿨던 꿈에 나왔던 얼굴이 흰 동급생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아이의 앞에 서서 그 애의, ‘자신’의 시선으로부터 아이를 가리고 있는 소년은.
이담이었다.
그래서, 사라지는 건 누구?

하지만 나는 정확히 ‘뭘’ 두려워하는 거지? 내가 이상해지는 거? 그럴 수도 있다. 그건 누구나 무서워할 만한 일이잖아.

어쩌면 더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입버릇처럼 똑똑하지 않다, 둔한 편이다, 멍하니 있는 것이 버릇이다 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진짜 바보인 건 아니다.

살이 얼어 있는데 갑자기 더운 것이 닿으면 아프구나. 나는 그걸 이제야 알았다.

그저 나는 내가 조금 혐오스러웠다. 얼어있던 살이 녹자 아픈 것 대신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혹시 나는 안기고 싶었나? 누군가 안아줬으면 했나? 내겐 아무도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럼 나는 누군가를 안아주고 싶었나? 누가 먼저건 따뜻해질 수 있으니까. 안아주고 싶었던 사람은 있었나? 있었을까? 있었으면 왜 해주지 않았지? 왜? 내 주위엔 누가 있었지?

어이없어할까. 저런 머저리는 처음 봤다고 할까. 숙맥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찌질하다고? 무엇이건 좋은 감정은 가지기 힘들겠지. 그가 나를 비웃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나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서 일어났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 대가로 받아야 하는 게 비웃음이라고 해도. 나는…

"어떤 일이 생긴다고 해도 한 번 일어났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헤이다르는 나를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대했었다는 사실을. 캐스터일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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