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았던 커다란 궁을 떠올리며, 청와(靑蛙) 소리 가득한 자련전을 바라본다. 어쩌면, 이곳 역시 바깥의 궁과는 또 다른 세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의 화려한 자태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니, 그제야 향기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모양이 보이지 않으니, 향이 아름다운 꽃을 알아볼 수 있군요. 이 또한, 좋은 듯합니다."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잦아든 청와의 울음소리도, 조용하게 내려앉은 어둠도, 발밑을 스치는 풀 소리도, 그래, 어느 것 하나 나쁘지 않았다.

꽃놀이, 청우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멀거니 앉아서, 떨어지는 꽃잎을 헤아리기만 해도 하루해가 금세 지나리라.

거기에, 홍매화가 있었다. 이른 봄, 추위를 이겨내며 여문 꽃을 틔운 홍매화가 청우의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하얀 비단은 봄을 시샘하며 녹지 않는 설원(雪原)이 되었고, 검은 먹은 절개 있게 뻗어 나간 가지가 되었으며, 붉은 얼룩은 가지 속에 피어난 홍매화가 되었다.

잔잔한 강가에 미끼를 던졌으니, 물고기가 걸려들기를 기다릴 때였다. 그러나 아직은 낚싯줄에 딸려올 고기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물밑의 움직임을 충분히 헤아려야 했다. 물고기가 미끼를 무는 순간, 놓치지 않고 낚아챌 수 있도록.

심중(心中)의 근원, 그것은 분노가 아니다. 분노를 닮은 고독이었다. 이 세상에 오롯이 저 혼자라는 고독함. 저를 지켜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데에서 오는 사무치는 외로움. 청우는 그것을 체념으로 받아 들였고, 아이는 그것을 분노로 발현시켰다. 그러나 사실은, 체념과 분노 모두 같은 것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제가 지켜야 할 이들이 슬퍼진다면, 그것이 제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위한 행동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성한 심술궂음을 잘 파헤쳐 보면, 그 안에 작은 다정함 정도는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저를 둘러싼 공기가 안온하게 바뀌었다. 이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져도 상관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가지고 싶었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주체할 수 없는 탐욕(貪慾)이 저를 휘감았다. 가지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치솟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안정감 있게 흔들리는 걸음을 따라 사박사박, 졸음이 찾아왔다. 눈꺼풀이 나른했다.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사실은 다정하다. 말은 퉁명스럽지만, 실은 누구보다 다정했다.

오랜만에 저를 감싸는 봄바람과 눈을 즐겁게 하는 봄꽃, 그리고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건의 다정함에 청우가 벅찬 얼굴로 웃었다.

끓는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한없이 잠잠하던 물은, 그 순간을 넘어서고 나면 요란하게 들끓기 시작한다. 마치 그때부터 시작이라는 듯,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다 급기야 손쓸 새도 없이 넘쳐흐르고 만다. 하지만 사실은, 그 전부터 이미 물은 끓고 있었다. 조용히 쌓이던 열기가 어느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바뀔 뿐이다.

아무리 많은 목숨이 걸려 있다고 해도, 제가 지켜야 할 단 한 사람이 무너진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청우와 함께 있으면 흔해 빠진 벚꽃도 아름다웠고,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던 봄꽃이 향기로웠으며, 서툴기 짝이 없는 연서가 간질거렸다.

꽃이 피었다. 자그맣게 싹을 틔운 여린 꽃이 건의 다정함 속에서 팽팽하게 부풀더니, 이윽고 꽃봉오리를 터트렸다. 화려한 꽃은 아니었다. 커다란 꽃도 아니었다. 바라는 것이 적고, 기대하는 것이 적은, 아주 소박한 꽃이었다. 그러나 다른 어느 꽃보다 향기로운 꽃이었다. 자신의 향기로 사방을 물들이는, 진한 꽃이 피었다.

서툴다는 것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서로에게 처음인 것들이 많아 아직은 낯설고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이 길이 맞는지 주저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먼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

저밖에 없다, 그 말을 입속으로 굴려본다. 문득 가슴이 빠듯하게 저렸다. 그것은 이제까지 제가 알던 어떤 감정과도 다른 것이었다. 만족감과도 달랐고, 충만함과도 달랐으며, 포만감과도 달랐다. 아니, 어쩌면 그 셋을 모두 합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스레 황궁에서의 제 모습이 떠올랐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잠자코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것이 당연했다. 누구도 청우를 주목하지 않았고, 또 누구도 주목해서는 안 되었다. 남은 생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을 맞추어 걷고,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때로는 능청스러운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고, 또 때로는 은밀한 속삭임에 귓불을 붉혔다.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일상이 청우에게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바람이 멈춰 있을 때는…… 제가 바람을 만들면 되는 것이군요."

그러나, 제가 의지를 가져도 되는 것인가.

서글프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부당하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의로운 일을 하겠다는데 누가 나서서 만류할 것이오. 게다가 이런 날을 대비하여 그대의 사람도 조정에 심어두었으니, 그대는 아무 걱정 말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시오."

‘예.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전하를 뵈니, 기꺼운 마음이 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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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연(緣) 1 [BL] 연(緣) 1
이윽고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17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다상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우(靑宇)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달싹이던 입술이 조용히 벌어지며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른다.

천천히 눈을 뜬 청우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다. 쇠약한 얼굴이 강인하게 다물려 있었다. 꺼지기 직전,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황제의 얼굴에 낯선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자식을 살리려는 부정(父情)이다.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낮추고 살겠습니다."

건은 다시 한 번 청우를 일별했다. 담담한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것을 지켜본다. 난감함, 미안함, 자괴감, 그런 것들이 차례로 청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제국이든, 연국이든, 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연국 왕의 눈 밖에 난 듯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는 평범한 삶이, 왜 제게만 이리도 벅찬 것인지, 청우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살아낼 것이다. 청우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용히 살아지지 않는다면 시끄럽게라도 살아야겠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 여물게 마음을 먹는다.

상소를 훑어보던 건이 손에 든 상소문을 거칠게 던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일곱 개째 같은 내용의 상소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하루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내용의 상소

구실, 입속으로 그 말을 굴려보던 건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꽤나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건의 시선이 청우의 얼굴에 멎었다. 단정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화려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반듯해서 시선이 가는 얼굴이다. 이 자를 끌어 들여도 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
청우는 건이 한 말을 무심코 중얼거려 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설레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청우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술렁이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더 이상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저의 숙명이라 받아들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제가 의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이 난 것들을, 제 발로 걷어차는 천치가 여기 있구나.

그런데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문득 말갛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물색없는 동그란 눈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갈팡질팡 하는 생각 사이에서 청우의 속내를 가늠하던 건이 일순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하나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하다 생각했던 저울이, 실은 언젠가부터 ‘거짓이 아니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탓이다.

목숨 부지하는 것이 바빴을 뿐, 백성과 신료들의 힐난에서는 자유로웠던 황자로서의 삶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왕의 탓이오, 날이 가무는 것도 왕의 탓이다.

청우는 비의 자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연국의 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밤이었다.

어느새 뜰로 내려선 청우가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를 아이와 함께 걸었다. 바람이 따뜻합니다, 기분 좋은 혼잣말이 봄바람에 섞여 들었다. 아이의 작은 걸음에 맞추어 청우의 걸음도 작아졌다.

"먹을 수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하여도, 그냥 저 곳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꽃을 보며, 누군가는 아름답다 감탄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산도, 나무도, 풀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둠과 함께 내려앉은 무거운 적막 탓에 마치 소란스러운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양은 그대로 본뜰지언정, 고요한 외침만이 가득한 면경(面鏡) 속 세상처럼, 온 세상에 팽팽한 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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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연(緣) 1 [BL] 연(緣) 1
이윽고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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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상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우(靑宇)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달싹이던 입술이 조용히 벌어지며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른다.

천천히 눈을 뜬 청우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다. 쇠약한 얼굴이 강인하게 다물려 있었다. 꺼지기 직전,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황제의 얼굴에 낯선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자식을 살리려는 부정(父情)이다.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낮추고 살겠습니다."

건은 다시 한 번 청우를 일별했다. 담담한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것을 지켜본다. 난감함, 미안함, 자괴감, 그런 것들이 차례로 청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제국이든, 연국이든, 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연국 왕의 눈 밖에 난 듯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는 평범한 삶이, 왜 제게만 이리도 벅찬 것인지, 청우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살아낼 것이다. 청우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용히 살아지지 않는다면 시끄럽게라도 살아야겠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 여물게 마음을 먹는다.

상소를 훑어보던 건이 손에 든 상소문을 거칠게 던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일곱 개째 같은 내용의 상소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하루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내용의 상소

구실, 입속으로 그 말을 굴려보던 건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꽤나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건의 시선이 청우의 얼굴에 멎었다. 단정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화려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반듯해서 시선이 가는 얼굴이다. 이 자를 끌어 들여도 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
청우는 건이 한 말을 무심코 중얼거려 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설레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청우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술렁이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더 이상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저의 숙명이라 받아들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제가 의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이 난 것들을, 제 발로 걷어차는 천치가 여기 있구나.

그런데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문득 말갛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물색없는 동그란 눈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갈팡질팡 하는 생각 사이에서 청우의 속내를 가늠하던 건이 일순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하나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하다 생각했던 저울이, 실은 언젠가부터 ‘거짓이 아니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탓이다.

목숨 부지하는 것이 바빴을 뿐, 백성과 신료들의 힐난에서는 자유로웠던 황자로서의 삶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왕의 탓이오, 날이 가무는 것도 왕의 탓이다.

청우는 비의 자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연국의 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밤이었다.

어느새 뜰로 내려선 청우가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를 아이와 함께 걸었다. 바람이 따뜻합니다, 기분 좋은 혼잣말이 봄바람에 섞여 들었다. 아이의 작은 걸음에 맞추어 청우의 걸음도 작아졌다.

"먹을 수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하여도, 그냥 저 곳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꽃을 보며, 누군가는 아름답다 감탄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산도, 나무도, 풀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둠과 함께 내려앉은 무거운 적막 탓에 마치 소란스러운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양은 그대로 본뜰지언정, 고요한 외침만이 가득한 면경(面鏡) 속 세상처럼, 온 세상에 팽팽한 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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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상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우(靑宇)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달싹이던 입술이 조용히 벌어지며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른다.

천천히 눈을 뜬 청우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다. 쇠약한 얼굴이 강인하게 다물려 있었다. 꺼지기 직전,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황제의 얼굴에 낯선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자식을 살리려는 부정(父情)이다.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낮추고 살겠습니다."

건은 다시 한 번 청우를 일별했다. 담담한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것을 지켜본다. 난감함, 미안함, 자괴감, 그런 것들이 차례로 청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제국이든, 연국이든, 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연국 왕의 눈 밖에 난 듯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는 평범한 삶이, 왜 제게만 이리도 벅찬 것인지, 청우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살아낼 것이다. 청우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용히 살아지지 않는다면 시끄럽게라도 살아야겠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 여물게 마음을 먹는다.

상소를 훑어보던 건이 손에 든 상소문을 거칠게 던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일곱 개째 같은 내용의 상소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하루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내용의 상소

구실, 입속으로 그 말을 굴려보던 건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꽤나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건의 시선이 청우의 얼굴에 멎었다. 단정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화려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반듯해서 시선이 가는 얼굴이다. 이 자를 끌어 들여도 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
청우는 건이 한 말을 무심코 중얼거려 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설레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청우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술렁이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더 이상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저의 숙명이라 받아들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제가 의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이 난 것들을, 제 발로 걷어차는 천치가 여기 있구나.

그런데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문득 말갛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물색없는 동그란 눈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갈팡질팡 하는 생각 사이에서 청우의 속내를 가늠하던 건이 일순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하나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하다 생각했던 저울이, 실은 언젠가부터 ‘거짓이 아니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탓이다.

목숨 부지하는 것이 바빴을 뿐, 백성과 신료들의 힐난에서는 자유로웠던 황자로서의 삶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왕의 탓이오, 날이 가무는 것도 왕의 탓이다.

청우는 비의 자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연국의 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밤이었다.

어느새 뜰로 내려선 청우가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를 아이와 함께 걸었다. 바람이 따뜻합니다, 기분 좋은 혼잣말이 봄바람에 섞여 들었다. 아이의 작은 걸음에 맞추어 청우의 걸음도 작아졌다.

"먹을 수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하여도, 그냥 저 곳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꽃을 보며, 누군가는 아름답다 감탄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산도, 나무도, 풀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둠과 함께 내려앉은 무거운 적막 탓에 마치 소란스러운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양은 그대로 본뜰지언정, 고요한 외침만이 가득한 면경(面鏡) 속 세상처럼, 온 세상에 팽팽한 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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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상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우(靑宇)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달싹이던 입술이 조용히 벌어지며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른다.

천천히 눈을 뜬 청우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다. 쇠약한 얼굴이 강인하게 다물려 있었다. 꺼지기 직전,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황제의 얼굴에 낯선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자식을 살리려는 부정(父情)이다.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낮추고 살겠습니다."

건은 다시 한 번 청우를 일별했다. 담담한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것을 지켜본다. 난감함, 미안함, 자괴감, 그런 것들이 차례로 청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제국이든, 연국이든, 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연국 왕의 눈 밖에 난 듯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는 평범한 삶이, 왜 제게만 이리도 벅찬 것인지, 청우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살아낼 것이다. 청우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용히 살아지지 않는다면 시끄럽게라도 살아야겠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 여물게 마음을 먹는다.

상소를 훑어보던 건이 손에 든 상소문을 거칠게 던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일곱 개째 같은 내용의 상소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하루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내용의 상소

구실, 입속으로 그 말을 굴려보던 건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꽤나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건의 시선이 청우의 얼굴에 멎었다. 단정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화려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반듯해서 시선이 가는 얼굴이다. 이 자를 끌어 들여도 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
청우는 건이 한 말을 무심코 중얼거려 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설레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청우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술렁이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더 이상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저의 숙명이라 받아들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제가 의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이 난 것들을, 제 발로 걷어차는 천치가 여기 있구나.

그런데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문득 말갛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물색없는 동그란 눈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갈팡질팡 하는 생각 사이에서 청우의 속내를 가늠하던 건이 일순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하나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하다 생각했던 저울이, 실은 언젠가부터 ‘거짓이 아니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탓이다.

목숨 부지하는 것이 바빴을 뿐, 백성과 신료들의 힐난에서는 자유로웠던 황자로서의 삶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왕의 탓이오, 날이 가무는 것도 왕의 탓이다.

청우는 비의 자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연국의 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밤이었다.

어느새 뜰로 내려선 청우가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를 아이와 함께 걸었다. 바람이 따뜻합니다, 기분 좋은 혼잣말이 봄바람에 섞여 들었다. 아이의 작은 걸음에 맞추어 청우의 걸음도 작아졌다.

"먹을 수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하여도, 그냥 저 곳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꽃을 보며, 누군가는 아름답다 감탄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산도, 나무도, 풀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둠과 함께 내려앉은 무거운 적막 탓에 마치 소란스러운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양은 그대로 본뜰지언정, 고요한 외침만이 가득한 면경(面鏡) 속 세상처럼, 온 세상에 팽팽한 밤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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