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BL] 연(緣) 1 [BL] 연(緣) 1
이윽고 지음 / 조은세상(북두) / 2017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다상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우(靑宇)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달싹이던 입술이 조용히 벌어지며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른다.

천천히 눈을 뜬 청우가 황제의 얼굴을 바라본다. 쇠약한 얼굴이 강인하게 다물려 있었다. 꺼지기 직전,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황제의 얼굴에 낯선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자식을 살리려는 부정(父情)이다.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낮추고 살겠습니다."

건은 다시 한 번 청우를 일별했다. 담담한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치는 것을 지켜본다. 난감함, 미안함, 자괴감, 그런 것들이 차례로 청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진다. 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은제국이든, 연국이든, 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아무리 봐도 연국 왕의 눈 밖에 난 듯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에 넣는 평범한 삶이, 왜 제게만 이리도 벅찬 것인지, 청우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살아낼 것이다. 청우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조용히 살아지지 않는다면 시끄럽게라도 살아야겠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 여물게 마음을 먹는다.

상소를 훑어보던 건이 손에 든 상소문을 거칠게 던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일곱 개째 같은 내용의 상소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하루 빨리 세자를 세우라는 내용의 상소

구실, 입속으로 그 말을 굴려보던 건의 눈매가 문득 가늘어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꽤나 좋은 구실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건의 시선이 청우의 얼굴에 멎었다. 단정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다. 화려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반듯해서 시선이 가는 얼굴이다. 이 자를 끌어 들여도 될 것인가.

내가 원하는 삶.
청우는 건이 한 말을 무심코 중얼거려 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좌우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이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을 눈앞에 두고 설레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청우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술렁이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청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더 이상 숨죽인 채,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저의 숙명이라 받아들였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곳은 제가 의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며,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들은 못 받아서 안달이 난 것들을, 제 발로 걷어차는 천치가 여기 있구나.

그런데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문득 말갛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물색없는 동그란 눈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갈팡질팡 하는 생각 사이에서 청우의 속내를 가늠하던 건이 일순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하나 기우는 것 없이 팽팽하다 생각했던 저울이, 실은 언젠가부터 ‘거짓이 아니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탓이다.

목숨 부지하는 것이 바빴을 뿐, 백성과 신료들의 힐난에서는 자유로웠던 황자로서의 삶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것도 왕의 탓이오, 날이 가무는 것도 왕의 탓이다.

청우는 비의 자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제가 연국의 비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밤이었다.

어느새 뜰로 내려선 청우가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를 아이와 함께 걸었다. 바람이 따뜻합니다, 기분 좋은 혼잣말이 봄바람에 섞여 들었다. 아이의 작은 걸음에 맞추어 청우의 걸음도 작아졌다.

"먹을 수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하여도, 그냥 저 곳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꽃을 보며, 누군가는 아름답다 감탄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산도, 나무도, 풀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둠과 함께 내려앉은 무거운 적막 탓에 마치 소란스러운 낮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양은 그대로 본뜰지언정, 고요한 외침만이 가득한 면경(面鏡) 속 세상처럼, 온 세상에 팽팽한 밤이 내려앉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