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놀라움에 이어 주자헌의 마음을 채운 것은 그의 진심을 들었다는 기쁨이 아니라 측은지심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황제는 의금사의 안뜰을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한 전장처럼 바꾸어 놓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황제의 긴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것은 흡사 싸움터에서 나부끼는 깃발처럼 보였다. 그의 칼은 분명 허리춤에 매달려 있음에도, 그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는 그것이 이미 칼집에서 뽑혀 나와 적의 피를 갈구하는 환영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설령 불만을 품는 이가 생긴다 해도 그들이 그대를 해하려 한 일의 증좌가 명확하고, 심지어 애기살을 밀반입해 사병을 훈련시킨 것은 누가 보아도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오. 이러한 행위를 벌하지 않는다면 누가 법을 지키려 들겠소? 죄 지은 자에게 벌을 내린 것을 폭정이라 할 수는 없지. 반정에는 명분이 필요하오

만인지상의 자리를 욕심내 본 일은 없었다. 만민을 살뜰히 보살피는 어진 군주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 본 일도 없었다. 무겁고 화려한 용포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백은래는 제게 방한모를 씌워 주고는 말을 몰아 떠나 버렸던, 그리고 흙투성이 얼굴로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내 보답해 주겠다 말하던 키 큰 소년을 기억했다. 그가 고된 생을 달려와 마침내 향주의 주인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도, 전부 알았다.

"나는 그대가 살아서, 건강한 몸으로 내 곁에서 함께 일해 주었으면 하오. 이 땅에 도원경을 만들어 낼 자신은 없으나, 그대가 보기에 흡족할 만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 힘쓰겠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슬픔과도 닮아 있었다.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은 삶이었다. 그는 북명족도 금족도 아니었고, 대부분의 곳에서 스스로를 불청객처럼 느껴야 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왔다. 하물며 하늘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가 어찌 자신을 이해할 수 있으랴.

한때는 변방의 야차라 불리던 장수였으며 이제는 천하의 주인이 된 자신을 이토록 겁쟁이로 만드는 이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는 천하 만물의 주인이었다. 더 이상 향주의 경왕이 아니었으니 황제다운 처신을 함이 옳았다

주자헌은 가만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 길잡이를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되어 주리라.

소름끼치는 가정이 뇌리를 스쳤다. 행궁으로 동행하는 관료들 중 누군가에게 서왕의 입김이 미친다면.

아니다, 도리어 그를 살려 두었기 때문에 종내는 모든 것을 확실히 매듭짓게 될 것이다. 백은래의 모친이 가담했던 항쟁과, 그로 인해 살해된 흥왕과, 원치 않던 방향으로 어그러지고 만 주자헌의 생과 자신의 생, 그 모든 일의 발단이 눈앞에 있었다.

곁에 있게 해 달라는 말에 아직 답을 주지 못하였건만.

외양은 그다지 닮지 않았으나, 모어母語 특유의 울림이 깊은 발성은 백은래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향수를 일깨웠다.

북명어는 특정한 일부 단어만이 이따금 섞여 발화될 뿐이라, 온전한 언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취에 불과했다. 땅을 잃고 사라져가는 민족의 흔적.

자신과 마찬가지로 북명족도 금족도 아닌 이들의 공동체를.

‘제가 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이들에게 부채감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자신들의 나라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모를 터인데 말입니다.’

그저, 백은래는 머나먼 후대의 존재들을, 그리고 잃어버린 고향을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는 자신을 연민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을 같은 북명족으로 대우해 준 일이 없었음에도.

명리홀이 나라를 전복시키고자 하였던 것은 아들에게 더 많은 선택이 가능한 삶을 주고자 함이었을 터였다. 그리하여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며, 많은 것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백은래는 자신의 생을 바쳐 명리홀이 이루지 못한 숙원에 매달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빛나는 희망이나 간절한 염원 따위가 없었다. 그저 모친의 상실을 무의미한 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저는 대인께서 고향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또한 고향을 앗아간 원수를 갚는 데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나타난 흰 구름 자락이 하늘을 덮는 광경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은래는 그 구름이 자연적인 생김새를 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글자를 닮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내 나라에서는 누구도 타인을 함부로 업신여길 수 없으며, 민족과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이가 동등하게 존중받아 마땅하다

물론 그들은 녹을 먹지는 않을 터였다. 대신 서왕의 부패한 은전을 받을 것이다. 무수한 이들의 피와 눈물을 밟고 올라가며 긁어모은 돈을.

은애한다 말해 주지 않더라도 좋았고, 온화한 눈길을 보내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그가 한 공간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단정한 침묵 속에서 단잠을 청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미 쏘아 버린 화살을 돌이킬 방도는 없었음에도, 주자헌은 이따금 생각하고는 했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백은래와 자신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져 있었을까.

그리 생각하자 주체할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꼭 자신일 필요는 없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그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심장이 조여들 듯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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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헌이 돌아와 달라 한 것은, 결국 그 자신을 위한 소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은래를 위한 일이었다.

천자란 단지 호사를 누리며 권력을 휘두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세상은 그러한 자를 암군이라 부르며, 종내는 땅으로 끌어내려져 합당한 벌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한 사실을 모른 체하기에는 주자헌은 충분히 명민했고, 성품 또한 지나치게 선했다.

북명족. 벼슬아치. 푸른 눈. 모래가 들어찬 듯 목이 바싹 말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백은래는 그만 이 자리를 벗어나,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에 틀어박히고만 싶었다.

"나를 손안에 쥐고 흔들어야 하는데, 느닷없이 바른 말 잘하기로 이름난 놈이 나타나서는 황제에게 직속되어 움직인다 하니 훼방꾼으로 보였을 테지."

자학이나 체념 따위는 아니었다. 냉정한 머리로 내린 판단이었고, 아쉽게 여겨 본 일도 없었다. 그는 그저 나라에 헌신하여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몸을 바치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백은래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 성정을 물려받은 탓에, 그릇된 것을 밝혀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게 아니던가.

저런 예도 도덕도 모르는 자조차 이승 땅을 딛고 숨을 쉬고 있건만.

따사로운 봄바람이 옷자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갔다. 전모와 너울이 있어 다행이라고 백은래는 생각했다. 제 마음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건만,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만은 서럽도록 화창한 모양새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

다정한 그가 공격받는 일도, 다치는 일도 없이 그저 오래도록 지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해묵은 소망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지나간 시대의 영화榮華는 돌아오지 않는 법이며, 자신은 그러한 태평성대를 만들어 낼 성군은 될 수 없으리라.

"소신이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부족한 재주로나마 폐하의 옷자락을 적시려 드는 파도를 피해 가기 위해 노력하겠사오니, 부디 소신을 믿고 너른 땅으로 향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용히 사과의 말을 건네자 백은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젠가 향주의 학당에서 보았던 것과 아주 닮은 애잔한 웃음이었다. 슬픔이나 서러움, 회한, 그 어떤 단어로도 명확히 분류되지 않을 감정이 번져 들어 색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그 눈빛은 가장 뛰어난 화공의 손으로도 표현해 낼 수 없을 듯 오묘했다.

황제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자를 충신이라 부르는 것과, 광인이라 부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적합할까.

봄밤의 포근한 어둠에 잠긴 채, 백은래와 단둘이 비처럼 내리는 흰 꽃잎을 맞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진정으로 감히 닿을 마음을 품을 수조차 없는 존재가 되었건만, 왜 주자헌의 미소 하나, 손길 하나가 항시 그리도 애틋한지 모를 일이었다.

닫힌 창 너머로 별빛이 들고 있었다. 더 이상 책을 읽을 마음은 들지 않아, 하인을 불러 촛불을 켜게 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쉽사리 잠이 올 성싶지도 않았다. 봄밤의 공기가 지나치게 따스한 탓일 것이다.

어둠은 상념의 좋은 재료였고, 백은래는 조용히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돌연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무너진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에, 백은래는 새삼스레 다시 웃었다.

그는 그저, 주자헌에게 받은 자상함의 조각을 간직하고 싶었다. 누구도 웃어 주지 않던 이방인의 아이에게 보여 준 다정한 미소가 일생토록 눈꺼풀 안쪽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그 미소 때문에 끝내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주자헌을 보았을 때, 그 웃는 얼굴을 조금만 더 오래 눈에 담아 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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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헌이 돌아와 달라 한 것은, 결국 그 자신을 위한 소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은래를 위한 일이었다.

천자란 단지 호사를 누리며 권력을 휘두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세상은 그러한 자를 암군이라 부르며, 종내는 땅으로 끌어내려져 합당한 벌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한 사실을 모른 체하기에는 주자헌은 충분히 명민했고, 성품 또한 지나치게 선했다.

북명족. 벼슬아치. 푸른 눈. 모래가 들어찬 듯 목이 바싹 말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백은래는 그만 이 자리를 벗어나,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에 틀어박히고만 싶었다.

"나를 손안에 쥐고 흔들어야 하는데, 느닷없이 바른 말 잘하기로 이름난 놈이 나타나서는 황제에게 직속되어 움직인다 하니 훼방꾼으로 보였을 테지."

자학이나 체념 따위는 아니었다. 냉정한 머리로 내린 판단이었고, 아쉽게 여겨 본 일도 없었다. 그는 그저 나라에 헌신하여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몸을 바치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백은래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 성정을 물려받은 탓에, 그릇된 것을 밝혀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게 아니던가.

저런 예도 도덕도 모르는 자조차 이승 땅을 딛고 숨을 쉬고 있건만.

따사로운 봄바람이 옷자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갔다. 전모와 너울이 있어 다행이라고 백은래는 생각했다. 제 마음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건만,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만은 서럽도록 화창한 모양새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

다정한 그가 공격받는 일도, 다치는 일도 없이 그저 오래도록 지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해묵은 소망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지나간 시대의 영화榮華는 돌아오지 않는 법이며, 자신은 그러한 태평성대를 만들어 낼 성군은 될 수 없으리라.

"소신이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부족한 재주로나마 폐하의 옷자락을 적시려 드는 파도를 피해 가기 위해 노력하겠사오니, 부디 소신을 믿고 너른 땅으로 향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용히 사과의 말을 건네자 백은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젠가 향주의 학당에서 보았던 것과 아주 닮은 애잔한 웃음이었다. 슬픔이나 서러움, 회한, 그 어떤 단어로도 명확히 분류되지 않을 감정이 번져 들어 색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그 눈빛은 가장 뛰어난 화공의 손으로도 표현해 낼 수 없을 듯 오묘했다.

황제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자를 충신이라 부르는 것과, 광인이라 부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적합할까.

봄밤의 포근한 어둠에 잠긴 채, 백은래와 단둘이 비처럼 내리는 흰 꽃잎을 맞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진정으로 감히 닿을 마음을 품을 수조차 없는 존재가 되었건만, 왜 주자헌의 미소 하나, 손길 하나가 항시 그리도 애틋한지 모를 일이었다.

닫힌 창 너머로 별빛이 들고 있었다. 더 이상 책을 읽을 마음은 들지 않아, 하인을 불러 촛불을 켜게 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쉽사리 잠이 올 성싶지도 않았다. 봄밤의 공기가 지나치게 따스한 탓일 것이다.

어둠은 상념의 좋은 재료였고, 백은래는 조용히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돌연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무너진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에, 백은래는 새삼스레 다시 웃었다.

그는 그저, 주자헌에게 받은 자상함의 조각을 간직하고 싶었다. 누구도 웃어 주지 않던 이방인의 아이에게 보여 준 다정한 미소가 일생토록 눈꺼풀 안쪽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그 미소 때문에 끝내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주자헌을 보았을 때, 그 웃는 얼굴을 조금만 더 오래 눈에 담아 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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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놀라움에 이어 주자헌의 마음을 채운 것은 그의 진심을 들었다는 기쁨이 아니라 측은지심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황제는 의금사의 안뜰을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한 전장처럼 바꾸어 놓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황제의 긴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것은 흡사 싸움터에서 나부끼는 깃발처럼 보였다. 그의 칼은 분명 허리춤에 매달려 있음에도, 그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는 그것이 이미 칼집에서 뽑혀 나와 적의 피를 갈구하는 환영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설령 불만을 품는 이가 생긴다 해도 그들이 그대를 해하려 한 일의 증좌가 명확하고, 심지어 애기살을 밀반입해 사병을 훈련시킨 것은 누가 보아도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오. 이러한 행위를 벌하지 않는다면 누가 법을 지키려 들겠소? 죄 지은 자에게 벌을 내린 것을 폭정이라 할 수는 없지. 반정에는 명분이 필요하오

만인지상의 자리를 욕심내 본 일은 없었다. 만민을 살뜰히 보살피는 어진 군주가 될 수 있으리라 믿어 본 일도 없었다. 무겁고 화려한 용포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백은래는 제게 방한모를 씌워 주고는 말을 몰아 떠나 버렸던, 그리고 흙투성이 얼굴로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내 보답해 주겠다 말하던 키 큰 소년을 기억했다. 그가 고된 생을 달려와 마침내 향주의 주인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도, 전부 알았다.

"나는 그대가 살아서, 건강한 몸으로 내 곁에서 함께 일해 주었으면 하오. 이 땅에 도원경을 만들어 낼 자신은 없으나, 그대가 보기에 흡족할 만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 힘쓰겠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슬픔과도 닮아 있었다.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은 삶이었다. 그는 북명족도 금족도 아니었고, 대부분의 곳에서 스스로를 불청객처럼 느껴야 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왔다. 하물며 하늘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가 어찌 자신을 이해할 수 있으랴.

한때는 변방의 야차라 불리던 장수였으며 이제는 천하의 주인이 된 자신을 이토록 겁쟁이로 만드는 이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는 천하 만물의 주인이었다. 더 이상 향주의 경왕이 아니었으니 황제다운 처신을 함이 옳았다

주자헌은 가만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 길잡이를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되어 주리라.

소름끼치는 가정이 뇌리를 스쳤다. 행궁으로 동행하는 관료들 중 누군가에게 서왕의 입김이 미친다면.

아니다, 도리어 그를 살려 두었기 때문에 종내는 모든 것을 확실히 매듭짓게 될 것이다. 백은래의 모친이 가담했던 항쟁과, 그로 인해 살해된 흥왕과, 원치 않던 방향으로 어그러지고 만 주자헌의 생과 자신의 생, 그 모든 일의 발단이 눈앞에 있었다.

곁에 있게 해 달라는 말에 아직 답을 주지 못하였건만.

외양은 그다지 닮지 않았으나, 모어母語 특유의 울림이 깊은 발성은 백은래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향수를 일깨웠다.

북명어는 특정한 일부 단어만이 이따금 섞여 발화될 뿐이라, 온전한 언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취에 불과했다. 땅을 잃고 사라져가는 민족의 흔적.

자신과 마찬가지로 북명족도 금족도 아닌 이들의 공동체를.

‘제가 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이들에게 부채감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자신들의 나라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모를 터인데 말입니다.’

그저, 백은래는 머나먼 후대의 존재들을, 그리고 잃어버린 고향을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는 자신을 연민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을 같은 북명족으로 대우해 준 일이 없었음에도.

명리홀이 나라를 전복시키고자 하였던 것은 아들에게 더 많은 선택이 가능한 삶을 주고자 함이었을 터였다. 그리하여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며, 많은 것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백은래는 자신의 생을 바쳐 명리홀이 이루지 못한 숙원에 매달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빛나는 희망이나 간절한 염원 따위가 없었다. 그저 모친의 상실을 무의미한 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저는 대인께서 고향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또한 고향을 앗아간 원수를 갚는 데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이든 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나타난 흰 구름 자락이 하늘을 덮는 광경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은래는 그 구름이 자연적인 생김새를 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글자를 닮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내 나라에서는 누구도 타인을 함부로 업신여길 수 없으며, 민족과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이가 동등하게 존중받아 마땅하다

물론 그들은 녹을 먹지는 않을 터였다. 대신 서왕의 부패한 은전을 받을 것이다. 무수한 이들의 피와 눈물을 밟고 올라가며 긁어모은 돈을.

은애한다 말해 주지 않더라도 좋았고, 온화한 눈길을 보내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그가 한 공간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단정한 침묵 속에서 단잠을 청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미 쏘아 버린 화살을 돌이킬 방도는 없었음에도, 주자헌은 이따금 생각하고는 했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백은래와 자신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져 있었을까.

그리 생각하자 주체할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꼭 자신일 필요는 없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그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심장이 조여들 듯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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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헌이 돌아와 달라 한 것은, 결국 그 자신을 위한 소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은래를 위한 일이었다.

천자란 단지 호사를 누리며 권력을 휘두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세상은 그러한 자를 암군이라 부르며, 종내는 땅으로 끌어내려져 합당한 벌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한 사실을 모른 체하기에는 주자헌은 충분히 명민했고, 성품 또한 지나치게 선했다.

북명족. 벼슬아치. 푸른 눈. 모래가 들어찬 듯 목이 바싹 말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백은래는 그만 이 자리를 벗어나,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에 틀어박히고만 싶었다.

"나를 손안에 쥐고 흔들어야 하는데, 느닷없이 바른 말 잘하기로 이름난 놈이 나타나서는 황제에게 직속되어 움직인다 하니 훼방꾼으로 보였을 테지."

자학이나 체념 따위는 아니었다. 냉정한 머리로 내린 판단이었고, 아쉽게 여겨 본 일도 없었다. 그는 그저 나라에 헌신하여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몸을 바치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백은래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 성정을 물려받은 탓에, 그릇된 것을 밝혀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게 아니던가.

저런 예도 도덕도 모르는 자조차 이승 땅을 딛고 숨을 쉬고 있건만.

따사로운 봄바람이 옷자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갔다. 전모와 너울이 있어 다행이라고 백은래는 생각했다. 제 마음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건만,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만은 서럽도록 화창한 모양새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

다정한 그가 공격받는 일도, 다치는 일도 없이 그저 오래도록 지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해묵은 소망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지나간 시대의 영화榮華는 돌아오지 않는 법이며, 자신은 그러한 태평성대를 만들어 낼 성군은 될 수 없으리라.

"소신이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부족한 재주로나마 폐하의 옷자락을 적시려 드는 파도를 피해 가기 위해 노력하겠사오니, 부디 소신을 믿고 너른 땅으로 향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용히 사과의 말을 건네자 백은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젠가 향주의 학당에서 보았던 것과 아주 닮은 애잔한 웃음이었다. 슬픔이나 서러움, 회한, 그 어떤 단어로도 명확히 분류되지 않을 감정이 번져 들어 색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그 눈빛은 가장 뛰어난 화공의 손으로도 표현해 낼 수 없을 듯 오묘했다.

황제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자를 충신이라 부르는 것과, 광인이라 부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적합할까.

봄밤의 포근한 어둠에 잠긴 채, 백은래와 단둘이 비처럼 내리는 흰 꽃잎을 맞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진정으로 감히 닿을 마음을 품을 수조차 없는 존재가 되었건만, 왜 주자헌의 미소 하나, 손길 하나가 항시 그리도 애틋한지 모를 일이었다.

닫힌 창 너머로 별빛이 들고 있었다. 더 이상 책을 읽을 마음은 들지 않아, 하인을 불러 촛불을 켜게 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쉽사리 잠이 올 성싶지도 않았다. 봄밤의 공기가 지나치게 따스한 탓일 것이다.

어둠은 상념의 좋은 재료였고, 백은래는 조용히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돌연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무너진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에, 백은래는 새삼스레 다시 웃었다.

그는 그저, 주자헌에게 받은 자상함의 조각을 간직하고 싶었다. 누구도 웃어 주지 않던 이방인의 아이에게 보여 준 다정한 미소가 일생토록 눈꺼풀 안쪽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그 미소 때문에 끝내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주자헌을 보았을 때, 그 웃는 얼굴을 조금만 더 오래 눈에 담아 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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