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헌이 돌아와 달라 한 것은, 결국 그 자신을 위한 소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은래를 위한 일이었다.

천자란 단지 호사를 누리며 권력을 휘두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세상은 그러한 자를 암군이라 부르며, 종내는 땅으로 끌어내려져 합당한 벌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한 사실을 모른 체하기에는 주자헌은 충분히 명민했고, 성품 또한 지나치게 선했다.

북명족. 벼슬아치. 푸른 눈. 모래가 들어찬 듯 목이 바싹 말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백은래는 그만 이 자리를 벗어나,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에 틀어박히고만 싶었다.

"나를 손안에 쥐고 흔들어야 하는데, 느닷없이 바른 말 잘하기로 이름난 놈이 나타나서는 황제에게 직속되어 움직인다 하니 훼방꾼으로 보였을 테지."

자학이나 체념 따위는 아니었다. 냉정한 머리로 내린 판단이었고, 아쉽게 여겨 본 일도 없었다. 그는 그저 나라에 헌신하여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몸을 바치리라 믿으며 살아왔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백은래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 성정을 물려받은 탓에, 그릇된 것을 밝혀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게 아니던가.

저런 예도 도덕도 모르는 자조차 이승 땅을 딛고 숨을 쉬고 있건만.

따사로운 봄바람이 옷자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갔다. 전모와 너울이 있어 다행이라고 백은래는 생각했다. 제 마음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건만,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만은 서럽도록 화창한 모양새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

다정한 그가 공격받는 일도, 다치는 일도 없이 그저 오래도록 지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해묵은 소망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지나간 시대의 영화榮華는 돌아오지 않는 법이며, 자신은 그러한 태평성대를 만들어 낼 성군은 될 수 없으리라.

"소신이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부족한 재주로나마 폐하의 옷자락을 적시려 드는 파도를 피해 가기 위해 노력하겠사오니, 부디 소신을 믿고 너른 땅으로 향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용히 사과의 말을 건네자 백은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젠가 향주의 학당에서 보았던 것과 아주 닮은 애잔한 웃음이었다. 슬픔이나 서러움, 회한, 그 어떤 단어로도 명확히 분류되지 않을 감정이 번져 들어 색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그 눈빛은 가장 뛰어난 화공의 손으로도 표현해 낼 수 없을 듯 오묘했다.

황제의 면전에서 이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자를 충신이라 부르는 것과, 광인이라 부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적합할까.

봄밤의 포근한 어둠에 잠긴 채, 백은래와 단둘이 비처럼 내리는 흰 꽃잎을 맞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진정으로 감히 닿을 마음을 품을 수조차 없는 존재가 되었건만, 왜 주자헌의 미소 하나, 손길 하나가 항시 그리도 애틋한지 모를 일이었다.

닫힌 창 너머로 별빛이 들고 있었다. 더 이상 책을 읽을 마음은 들지 않아, 하인을 불러 촛불을 켜게 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쉽사리 잠이 올 성싶지도 않았다. 봄밤의 공기가 지나치게 따스한 탓일 것이다.

어둠은 상념의 좋은 재료였고, 백은래는 조용히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돌연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무너진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에, 백은래는 새삼스레 다시 웃었다.

그는 그저, 주자헌에게 받은 자상함의 조각을 간직하고 싶었다. 누구도 웃어 주지 않던 이방인의 아이에게 보여 준 다정한 미소가 일생토록 눈꺼풀 안쪽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그 미소 때문에 끝내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주자헌을 보았을 때, 그 웃는 얼굴을 조금만 더 오래 눈에 담아 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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