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회색 눈의 백은래가 제아무리 향주의 승상이라 한들 하늘의 자손이라 불리는 천자의 혈통에게는 땅을 기는 미물에 불과한 것을.
웃어 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 소원이란 애매한 말로 넘기고 말았다.
목련처럼 하얀 얼굴은 무심했고, 어딘지 수심이 깃든 듯 처연한 표정이 언뜻 비치기도 했다. 관복의 넉넉한 깃으로 감싸인 목은 백로처럼 길고 우아했다. 하도 가늘어 손아귀에 그대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자신을 위해서라니, 착각일 것이다. 그저 그날따라 말을 몰고 싶지 않은 까닭이라도 있었을 테지.
눈을 감았다 뜨자 환영 같던 핏자국은 사라졌다. 발치에는 자신의 그림자만이 놓여 있었다. 그저 백은래를 떠올린 것만으로 우울한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아 아쉬우나, 전하를 지키기 위한 희생이라면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이전까지 그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기대해 본 일이 없었다. 대가 없는 애정과 존중을 원하기에는 그의 삶은 지나치게 척박했다.
어린 백은래는 단 한 차례 들은 소년 주자헌의 다정한 목소리를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리고 끝내는 그를 구해 금족의 땅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의 무사와 안녕을 내내 기원하며 살았다.
화기애애함을 가장해 상대의 의중을 떠보고, 빈틈을 찾고,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자리보다는 차라리 메마른 청회색 눈빛을 마주하며 집무실에 앉아 있고 싶었다
민족이 개인의 내면을 구성하는 전부는 아니지만 고유한 성질의 일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벽을 녹여 낸 듯 청량하게 빛나는 청회색 눈에 다른 사내의 상이 맺히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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