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헌은 머리맡을 더듬어 자리끼가 담긴 주전자와 놋쇠 그릇을 집어 들었다. 미지근한 물이나마 단숨에 들이켜자 정신이 약간 맑아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집무실에서 백은래와 마주할 생각을 하자 속이 갑갑해졌다.
주자헌을 구해 준 아이는 머리쓰개와 갖옷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밖의 실마리라고는 어렴풋한 기억뿐이었다. 사내아이가 확실한지 기화령이 물었을 때, 주자헌은 약간 자신감을 잃었다.
다만 아이가 여자아이라면, 그렇다면 그 아이를 비로 삼을 것이라는 주자헌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일생토록 곁에서 아끼고 귀애해 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 주자헌의 삶은 아이에게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원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자헌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신의를 믿지 않았다.
장안에서 지내는 동안 어린 주자헌이 얻은 것이라고는 숱한 배반과 좌절뿐이었다.
그나마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벗은 하나 얻었으니 그렇게까지 나쁜 삶은 아니라고 주자헌은 생각했다.
어딘가에 살아 있기는 한 것인지, 생사 여부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을 것을. 주자헌은 그날 아이의 이름을 묻지 않았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주자헌은 그저 그를 다시 한번만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태양 아래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네가 구해 준 어린 주자헌이 이렇게 무사히 살아남았다 알려 주고 싶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를 주었으니,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 주겠노라고.
결국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병영 내의 누군가가 백은래를 함부로 대해도 좋을 만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은 모두 제 탓이었다
주자헌은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고, 객쩍은 마음에 죄 없는 종이 끄트머리만 만지작대야 했다. 제 미안함이 조금이라도 백은래에게 전해진다면 좋겠다 생각하며.
짧은 순간 지나간 것은 흡사 작고 귀여운 생김새의 낯선 짐승을 보았을 때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당혹과 두려움을 뒤섞은 다음 약간의 설렘을 더한다면 이러한 느낌일까.
불현듯 주자헌은 서책에서 외운 듯 흠잡을 구석 하나 없는 대답이 아닌, 백은래의 진심이 듣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어떠한 확신 같은 것이 주자헌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면전에서 비판을 쏟아 낼지언정 결코 제 등 뒤에서 칼을 뽑아 들지는 않으리라는, 그런 믿음이.
답하는 목소리는 맑았고, 새벽이 내려앉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창가에 드리운 주렴에 걸러진 햇살이 백은래의 옆얼굴과 목선을 비추었다. 곧게 뻗은 목은 잘 말린 종이처럼 희고 단정하여 먹의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피를 이어받은 이가, 그 점을 내세우지 않고 평민인 제 병사들과 함께 흙먼지를 마시며 생활하는 것은 어떤 마음에서일까
공직에는 나서지 말고, 공연히 바른 말을 하여 타인의 기분을 거스르지 말고, 책이나 쓰며 자연을 벗 삼아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그는 부단히도 강조했다. 너는 눈에 띄는 자리에 서면 공격받기 쉬우니, 그래야만 한다고.
백은래는 이 나라의 미래를 바꾸고 싶었다. 누구도 자신과 같은 대우를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 손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기를 소망했다.
뺨의 붉은 자국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터였으나 백은래의 기분이 상했던 그 순간은 물이 강 하류로 떠내려가듯 돌아볼 틈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강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이미 상하고 만 그의 기분을 되돌리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바람이 새어듦과 동시에 비스듬한 햇빛이 안으로 쏟아지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백은래의 청회색 눈이 빛을 받아 선연한 색채를 띠었다. 청금석을 갈아 진주를 녹인 물에 섞는다면 이런 빛깔이 나올까.
무릇 근면함이란 한 명의 인간으로서도 미덕이었으며 위정자로서는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10여 년이 흘렀음에도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북명족의 항쟁으로 양친을 잃은 소년이 남아 있었다.
백은래는 다만 향주를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싶었고, 거기에 경왕이라는 추를 달아 고정하고 싶은 것이었다.
심장이 유난스레 크게 뛰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백은래가, 자신을 믿는다 말해 준 것인가?
삶은 언제나 한밤의 숲처럼 막막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나, 적어도 발치를 밝혀 주는 불빛이 있다면 조금은 덜 암담하게 느껴질 터였다.
북명족으로서 금족의 땅에서 살며 겪는 모든 일들을 담담히 흘려보내며, 세상이 자신을 어찌 대우하건 아랑곳 않고 그저 만사를 옳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이의 어깨는 지나치게 가늘었다.
그럼에도 그 자세만은 대나무처럼 꼿꼿하여, 휘어지느니 부러지고 말 것만 같았다. 청회색 시선은 파도의 가장자리처럼 아련하여, 곧 포말이 되어 사라질 듯 덧없어 보였다.
삼가고 에두를지언정 거짓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면 가장 내밀한 마음만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주자헌을 상대하고 있자면, 금이 간 물동이처럼 어디선가 본심이 새어 나가고 말았다. 그의 무엇이 그리 각별하기에 그런 것인지.
그럼에도 주자헌은 백은래를 지키고 싶었다. 그가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어떠한 모멸도 겪지 않도록. 모든 이가 그를 우러러보도록.
스스로도 아직 명확히 깨닫지 못한 마음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해소되지 못한 충동이 심장을 채우다 못해 혈관을 타고 어지러울 정도로 전신을 돌고 있어, 주자헌은 백은래의 목련처럼 하얀 얼굴과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운 단정한 눈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잃어도 되는 병력 같은 것은 없었다. 주자헌이 화포에 매달리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동남방위영의 모든 목숨이 제 책임 하에 있었으므로.
주자헌은 언제나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거기에 어떤 결과가 따르든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이것을 죄책감이라 일컫는 것이 옳은지도 확신할 수 없었으나, 아니라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다는 이 마음이 달리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책임져야 할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니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반드시 살아야 했으며, 반드시 백은래에게 돌아가야 했다.
불현듯 위문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주자헌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가벼운 혼란이었다.
내가 향주를 위해 싸우고 돌아왔다고, 그러니 그대는 염려할 것 없이 기력을 회복하는 데만 전념하면 된다고, 그렇게 말하면 백은래는 어떤 얼굴을 할까.
안아 줄 부모도 형제자매도 없이 홀로 자라나는 동안, 사람의 온기가 사무치게 그리운 밤이 없었다 말한다면 기만이리라.
청회색 눈동자는 가을 아침의 안개처럼 아련한 빛깔이어서, 할 수 있다면 손안에 가두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는 수렵꾼의 아이였다. 활을 쥐고 나무 사이를 누비며 자란 그에게, 쇠와 숲의 냄새는 머나먼 고향을 떠난 뒤로는 맡을 수 없었던 그리운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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