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져 나간 팔과 다리를 붙여 줄 순 없겠지만, 난 그냥 고통을 줄여 주고 싶었어요."
테두리가 금빛으로 빛나는 선명한 육각형이 자신의 등에 새겨진 반흔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자 새삼 가슴이 술렁였다
자신에게 자결을 요구하던 무뢰한을 정인이라 부르게 되다니. 그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샘내 본 적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샘내는 감정과는 조금 다르죠. 정을 준 이에게만 느낍니다."
하지만 오래된 소나무 향내처럼 오묘한 이 체취엔 도저히 경계심을 가질 수 없다. 이 세상에 하나뿐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정인의 체취이기 때문이다
"본신의 모습에서 탈피되어 나온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뿐인…… 아니 단둘뿐인 물건이니 잘 지니고 계십시오. 한 번 부서지면 울리지 않으니까 주의하고."
웃느라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비친 금색이 햇빛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신수에게서 피를 착취해 살아가면서도 그를 귀중하다 말하고,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감금하고, 매번 은혜를 바라면서도 그의 감정을 헤아리거나 봉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작일 밤만 해도 친우 같은 가족과 칼춤을 추어 정인에게 기쁨을 주었고, 금일 아침만 해도 가슴에 금색 꿀이 고일만큼 달큼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럴 순 없었다. 머리에 피가 식어 두피 전체가 저릿저릿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도 지금 느끼는 이 낙차보다는 강렬하지 못하리라.
자결하라는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리던 아름다운 신수가 보고 싶었다
팔은 안 되는데. 내 정인은 양팔로 꼭 끌어안아 주는 걸 좋아하는데. 한 팔로도 괜찮을까. 한 팔로도 괜찮다고 해 주겠지? 서가 대신 자신에게 양팔이 있으니 충분하다고…….
심장, 심장은 하나뿐인데. "이걸 잃으면……." 고통과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회랑 바닥을 긁었다. "정말 다신 볼 수 없는데……."
혹한의 추위 속 국경에서 올려다보았던 검은 하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그 암흑은 너무 깊고 진해서, 별빛보다 희게 웃는 아금의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돌연 커다랗게 뜨인 금색 눈동자에 기름등의 불빛이 스쳤다. 자신 때문에 서가가 벌을 받았다.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상황이 불리하다 여겨졌다. 요구가 떨어지면 당연하게 행해지던 피의 착취가 이제는 무척 부당하다고 생각됐다.
서가도 많이 나았을까. 지금 상태가 어떨까. 궁금하였지만 아무도 자신에게 서가의 상황을 알려 주지 않았다. 어디에 있든, 많이 아프지 않다면 좋을 텐데.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 자신은 오래 살 수 있으니 그가 유배를 갔다면 분명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산의 능선은 고른 곳을 알 수 있고, 강 역시 얕아지는 지점을 몸이 이미 알고 있다. 아금이 집중하는 감각은 방울 소리를 듣는 청각뿐. 방울의 소리가 강하게 들리는 쪽으로 쉬지 않고 달릴 뿐.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청명하고 선명한 울림이었는데,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땅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피가 맺혀 찢어진 아금의 손끝이 서가의 목덜미를 따라 가슴 아래로 내려와 옷섶을 헤쳤다. 여기로 와 달라며, 자신을 찾아 달라며 유류품처럼 울고 있던 소리. 이곳에서 계속 자신을 부르고 있었던 소리를 가장 크게 들을 수 있었다.
짝을 만난 방울은 사명을 다하여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아금의 품속에서 공명하며 울고 있던 작은 금속도 건조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아금은 다시 연인의 얼굴을 더듬었다. 눈가며 가슴을 가른 상처 위를 문지르고 매만졌다. 이 나라의 명맥을 고고하게 지키던 귀하디귀한 약이지만 사람 하나를 살리지 못한다.
아금은 이 피로, 희생으로 이 나라를. 황족을 지키고 있었다. 알량하다면 알량한 그 자부심 하나로. 그저 그 이유 하나를 되새기며 모진 고통과 모욕을 참아 냈다.
처음으로 정을 주었던, 이다지도 긴 일생에 단 한 명뿐이었던 정인인데.
틈 없이 꽉 조여진 목구멍은 무언가를 토해 내려 꿈틀거렸지만 일평생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온 신수는 제대로 울음조차 토해 내지 못했다.
애타는 울음소리 속. 아금의 금빛 눈동자에 조그맣게 피어 있던 불씨가 훅 소리를 내며 꺼졌다. 다시는 어떠한 불이 붙지 않도록 심까지 깊숙이 잘렸다
환궁. 민물 속을 자유로이 헤엄쳐야 하는 자신을 꼼꼼히 숨기고 감금하던 그 신수궁으로, 자신은 다시 돌아가는 건가.
황제가 죽으면 이제는 이 인간에게 피를 주면서, 이어서 또 이 인간의 자식에게, 또 그 자식에게 살을 뜯기면서 살아가고, 피를 주며 이 나라를 계속 살리는 건가
신수는 여태껏 보여 준 적 없는 강한 신력으로 모든 인간들, 넘어서 생물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자와 서 있는 자의 위치만 뒤바뀌었을 뿐. 그가 자신을 보는 감정은 똑같았다. 적개심이다.
서가보다는 작고, 자신과 엇비슷한 키. 검은 비단같이 흐르는 매끄러운 머리카락. 백자 같은 얼굴에서 빛나는 꿀처럼 농후한 금색 눈동자. 그에게서 갑자기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인정은 거센 강물에 출렁이는 배의 난간을 잡으며, 멀어져 가는 신수를 향해 울부짖었다. 이대로 그와 헤어져선 안 된단 강함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헤어진다면 자신은 신수를 다신 보지 못하리라. 다시는.
눈보라가 그친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흐르는 강물의 방향과 똑같이 은하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길고 작은 별들의 길. 조용히 깜박이는 흰 눈꺼풀 틈으로 별빛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가 비웃든 말든, 신수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올려다보던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마저 감상하겠다는 듯 흰 목을 꺾어 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투명하고 얇은 살얼음 아래에서는 거센 강물이 휘몰아쳤다. 깨지기 직전의 얇은 얼음 한 장이, 쐐애액 소리를 내며 세차게 흐르는 물 위에 간신히 얼어 있었다
굵은 혈관 안을 빠르게 흐르는 피처럼. 살얼음 아래를 거세게 흐르는 새까만 강물만이 그의 눈 안에 가득했다.
늘 반짝이던 금빛 안의 동공이 평소보다 몹시 작고, 빛깔 역시 다르게 띄고 있단 사실을, 황태자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황태자는 늘 실수했으며, 늘 한걸음이 늦었다.
자신의 이름은 정인만이 부를 수 있다. 서가가 자신을 ‘아금 님.’이라고 다정하게 부른 날 그렇게 정했다.
오래도록, 왜 이런 이들을 그리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나. 왜 그리 존중하고 뒤를 감추어 주느라 정인을 잃었나.
형체 없는 권력과 영생을 탐하며, 살을 찢고 자신의 피를 가져가던 새삼 그들이 대단했다.
아금은 피가 점점이 튄 뺨을 손등으로 훑었다. 작은 방울이었던 피는 하얀 뺨에 유성우 꼬리 같은 궤적을 그렸다.
인간의 체온으로 이미 얼음이 녹아, 피로 질척이는 땅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정인을 향해 발을 떼는 신수의 걸음을 붙잡는 건 살해당한 황족의 피인가, 멸망을 예감하여 서럽기 시작한 무국의 흙인가.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혀 부패하지 않은 새하얀 시신이 검붉게 젖은 신수에게 고요히 안기는 순간은 꿈이라고 생각될 만큼 기이하고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각막에 각인되었다.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가물가물해져 가는 시야 속. 멀리멀리 떠난다는 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고, 어쩐지 꾸역꾸역 눈물이 났다.
멀리 구름을 헤치며 올라오는 일출을 보고 있는 금빛 눈동자가 물비늘에 반짝였다. 서가의 시신을 안고 오래도록 걸어 당도한 국경의 북쪽 끝.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큰 파도가 부딪치며 풍성하고 새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늘 기분 좋은 묵직함으로 자신을 누르던 따뜻한 인간의 체온. 촉촉하게 피부에 닿았던 땀. 부드러이 뺨과 입술을 적시던 입술의 점막. 잠들려는 자신을 고집스레 꽉 안던 두 팔의 근육. 모두 차갑고 가벼웠다
|